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식사기도와 내안의 '나'들

| 조회수 : 11,083 | 추천수 : 5
작성일 : 2013-08-20 15:04:49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생명 있는 것 없는 것 아픔과 노고와 인연을 알아 소중히 합니다.

이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해지고 꾸려지는 모든 것이 소중합니다.”

7.gif 

텃밭의 방울토마토다.

한 알의 방울토마토가 땅에 떨어져 적당한 때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다시 열매를 맺지만

열매는 앞의 열매와 다르다. 앞의 열매와 싹 트인 땅이 다르고 햇볕이 달랐고 물이 달랐고 꽃피고

수분 조건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들은 누대에 걸쳐 같지만 다른 생을 잇는다.

그 중 상당 부분은 내 생으로 이어지는 희생이 된다.

 

십 수 년 텃밭을 했지만 이제야 이런 방울토마토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어디 방울토마토뿐이랴 만!

이들의 노고에 비해, 겨우 거름 넣어준 땅에 모종해주고 이따금 물 준 내 수고는 참 보잘 것 없다.

그런데 대부분의 과실은 내가 챙긴다. 세상 참!

 

땅과 햇볕과 물을 먹고 자라는 작물들을 보면 사람도 ‘이러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이 씨앗엔 보이지 않지만 씨앗에서 본성대로 나고 자라고 꽃피고 열매를 맺은 것처럼

‘사람도 본성대로 사는 것이겠지’ 하는.

다만, 적절한 시기에 파종하고 물주는 것처럼

‘사람에겐 좀 더 평화롭고 긍정적인 모습들을 가르치고 스스로 경계하는 노력이 더 해지는 것이겠지’ 하는.

  1.gif

가만 보면 내 안에는 많은 내가 있다.

아침이면 아버지와 형과 마당 우물가에 앉아 이를 닦던 대여섯 꼬마도 있고

일하러 사우디 가신다는 아버지 따라 처음가본 공항 에스컬레이터만 신기해하다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소리 없이 눈물 흘리던 열 살 무렵의 소년도 있다.

괜한 심통과 세상 모든 시름 짊어진 듯 행동하던 질풍노도의 알 수 없는 녀석도 있고

서슬 퍼런 독기와 분노로 삶의 한바닥을 헤매던 놈도 있다.

그 밖에도 두려움에 떨면서도 이를 숨기기만 급급한 나, 비교하고 험담하며 문득 거짓을 자연스럽게 행하는 나,

버럭 하는 나, 알면서도 두 번째 화살을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본다. 찌질 한 내가 내안엔 참 많다.

 

내 안의 긍정과 부정의 모습들은 어디서 왔을까?

물려받은 것도 있고 내가 선택한 것도 있으리라. 일조량처럼 방울토마토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건도 있으리라.

하지만 긍정의 모습을 키울지 부정의 모습을 키울지 또 그것을 드러낼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있다.

마치 방울토마토에 물을 주는 것처럼.

삶의 여러 상황에서 아직 철이 덜 들어 질풍노도의 시기를 건너는 녀석이 드러나지 않도록 잘 타이르는 것,

분노로 헤매는 놈을 진정시키는 것,

마냥 돌봐주어야 할 어린아이가 튀어나와 도움만을 바라고 투정부리지 않도록 하는 것,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상황에 휘둘리지 않도록 하는 것,

이 모두 텃밭을 가꾸듯 그렇게 내 안의 ‘나’들을 키우면 되지 않을까?

정성스럽게 애틋함과 너그러움과 부드럽게 ‘나’들을 돌본다면

덜 화내고 덜 비교하고 욕심은 조금 더 비우고 어리석음도 조금 더 덜며 그렇게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이것이 K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오늘만이라도 내 안의 ‘나’들에게 일일이 부드럽게 말 걸어보고 정성스럽게 들어주고

애틋한 마음으로 물을 주고 너그럽게 안아주어야겠다.

그렇게 어쩔 수 없었던 부모님을 이해하고 나 살기 바빠 K에게 전해진 부분 있거들랑 K가 잘 돌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K야 미안하구나. 오늘도 행복하렴.

8.gif 

---------------------------------------------------------------------------------

텃밭서 구한 가지와 풋고추, 꽈리고추, 감자, 근대, 부추, 돌나물, 깻잎으로 차린 밥상

 

6.gif 4.gif 5.gif 2.gif

근대 들어간 감자찌개와 버섯볶음, 돌나물 부추 샐러드?는 내가 한 것 같고

가지 무침과 꽈리고추와 멸치조림은 H씨가 한 것 같다. 양파와 고추 장아찌는 H씨가 담가 뒀던 거고.

1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이피제니
    '13.8.20 3:42 PM

    텃밭을 직접 가꾸시나 봅니다. 매우 보기가 좋아요.
    하루 하루 밥해먹는 것도 투쟁인데 이런 반찬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군침나게 하는 그리운 음식들 언제나 먹어볼 수 있을런지 사진으로만 맛을 보고 갑니다.
    글도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 그린지
    '13.8.20 4:12 PM

    안녕하셨어요?궁금했는데 ....여기서 뵈니 반갑네요.

  • 오후에
    '13.8.20 5:18 PM

    사진으로나마 맛보시고 이 여름 기운내시길...

    처음엔 애 때문에 시작했는데 지금은 아이는 가보지도 않고 저희 부부만 매주 찾는 텃밭이죠.
    이래저래 재밌기도 하고 알게되는 것도 많습니다.

  • 2. 그린지
    '13.8.20 4:13 PM

    이피제니님 궁금했는데 어후에 님 글 덕분에 이렇게 뵙게 되니 더 좋네요.

    경건해 지는 글과 사진이네요.

  • 이피제니
    '13.8.20 4:25 PM

    아직 견디기가 힘이 드는데, 82에서 따뜻한 위로를 많이 받아 마음이 좀 평온해졌어요.
    외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양로원에서 주 3회 의료봉사 하고 있어 피곤하지만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또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하니깐 아주 좋더군요.

  • 오후에
    '13.8.20 5:19 PM

    별말씀을 글보고 댓글 달고 그러다 서로 안부 묻고 걱정해주고 응원해주고 하는거지요 ^^

    감사합니다.

  • 3. 숙이01
    '13.8.20 7:15 PM

    정말 좋네요 그릇도 이쁘고

  • 오후에
    '13.8.21 8:37 AM

    그릇이 좀 투박하지 않나요?
    짝 맞춘것도 아니고....

    그래도 잘 봐주시니 감사 ^^

  • 4. 아침님
    '13.8.20 11:22 PM

    오후에님이 올리신 글은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열심히 보는 숨은팬이에요.
    평소 올리신 글도 좋았지만, 오늘 글은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좋네요.
    감사한 마음 전하려고 숨은팬의 본분을 저버리고 커밍아웃했어요.. ^^;;

  • 오후에
    '13.8.21 8:57 AM

    왜 이제 커밍아웃 하셨나요? 흑흑~
    아침님이 팬이 있는 줄몰랐어요.... 알았다면 좀 더 열심히 올렸을텐데... 훌쩍~

    ㅎㅎ
    좋게 봐주시니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문득 내안엔 다섯살 열살 열일곱, 스무살의 나... 수많은 나가 여전히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 안의 나들.... 잘 살펴주어야 하는 녀석들 같아요

    저도 커밍아웃할 거 있는데 그건 다음에 하겠습니다. ㅋㅋ

  • 5. 름름이
    '13.8.21 8:50 AM

    제가 좋아하는 음식 천지네요!

  • 오후에
    '13.8.21 8:58 AM

    올드한 음식을 좋아하십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 6. 소연
    '13.8.21 4:27 PM

    오후에님.. 저 그댁으로 밥상 힐링하러 가면 안되나요..?

  • 오후에
    '13.8.22 9:15 AM

    저희집 밥상이 보기보다 심심해서 힐링이 되실런지.... ㅋ

    햇볕은 따가워도 하늘도 높고 문득문득 시원한 바람이 붑니다.
    잠자리들도 낮게 날고 이제 가을이 오긴 오려나 봅니다.
    어머님과 이 여름 잘 나시길.... ^^*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추천
41088 파이야! 고독은 나의 힘 2024.11.30 28 0
41087 맛있게 먹고 살았던 9월과 10월의 코코몽 이야기 20 코코몽 2024.11.22 8,452 2
41086 82에서 추천해주신행복 43 ··· 2024.11.18 14,023 7
41085 50대 수영 배우기 + 반찬 몇가지 37 Alison 2024.11.12 15,738 6
41084 가을 반찬 21 이호례 2024.11.11 10,556 4
41083 올핸 무를 사야 할까봐요 ^^; 10 필로소피아 2024.11.11 8,465 5
41082 이토록 사소한 행복 36 백만순이 2024.11.10 9,115 4
41081 177차 봉사후기 및 공지) 2024년 10월 분식세트= 어 김.. 12 행복나눔미소 2024.11.08 3,621 6
41080 바야흐로 김장철 10 꽃게 2024.11.08 5,987 4
41079 깊어가는 가을 18 메이그린 2024.11.04 10,076 5
41078 드라마와 영화속 음식 따라하기 25 차이윈 2024.11.04 8,859 8
41077 아우 한우 너무 맛있네요.. 9 라일락꽃향기 2024.10.31 7,804 4
41076 똑똑 .... 가을이 다 가기전에 찾아왔어예 30 주니엄마 2024.10.29 10,399 8
41075 10월 먹고사는 이야기 12 모하나 2024.10.29 7,383 2
41074 무장비 베이킹…호두크랜베리빵… 12 은초롱 2024.10.28 6,639 5
41073 오랜만이네요~~ 6 김명진 2024.10.28 6,203 3
41072 혼저 합니다~ 17 필로소피아 2024.10.26 6,244 4
41071 이탈리아 여행에서 먹은 것들(와이너리와 식자재) 24 방구석요정 2024.10.26 5,237 3
41070 오늘은 친정엄마, 그리고 장기요양제도 18 꽃게 2024.10.22 10,215 4
41069 무장비 베이킹…소프트 바게트 구워봤어요 14 은초롱 2024.10.22 5,689 2
41068 만들어 맛있었던 음식들 40 ··· 2024.10.22 8,716 5
41067 캠핑 독립 +브라질 치즈빵 40 Alison 2024.10.21 6,145 7
41066 호박파이랑 사과파이중에 저는 사과파이요 11 602호 2024.10.20 3,517 2
41065 어머니 점심, 그리고 요양원 이야기 33 꽃게 2024.10.20 6,338 6
41064 고기 가득 만두 (테니스 이야기도...) 17 항상감사 2024.10.20 4,232 4
41063 오늘 아침 미니 오븐에 구운 빵 14 은초롱 2024.10.16 7,931 2
41062 여전한 백수 25 고고 2024.10.15 7,607 4
41061 과일에 진심인 사람의 과일밥상 24 18층여자 2024.10.15 8,647 3
1 2 3 4 5 6 7 8 9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