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K가 왔던 어느 토요일 저녁
골뱅이 소면에 캔맥주를 곁들였다.
장마철에도 골뱅이 소면에 맥주 진리의 맛!
#2
일요일 아침 텃밭에서 따온 깻잎, 미나리, 고추로
깻잎전도 하고 미나리와 깻잎 무침도 하고 고추와 함께 볶은 깻잎 반찬.
찐 감자와 물김치까지.
일요일 늦은 아침 겸 점심상차림
#3
“20년을 넘게 살아도 그 고약한 성질은 도대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나의 ‘버럭’질이 있었다. 그 여파로 며칠간 불편함이 이어지던 어느 날.
퇴근 후 H씨가 빚은 찐만두에 맥주 한 잔하고 잠시 그친 비 사이로 산책을 했다.
-짜증 낼 때 마다 뭔가 벌칙을 정합시다. 그래야 좀 덜 하지 않겠어.
반성문 10장 쓰기든, 청소하기든……. 어때요? 하는 H씨 말에.
-청소가 벌칙인건 이상하잖아. 어차피 하는 건데.
반성문이라는 것도 반성보다 듣기 좋은 말만 쓰게 되는 거고
차라리‘벽보고 서있기’. 내가 짜증내거나 버럭 댈 것 같으면 말해요.
바로 벽보고 5분 서 있을 게.
-5분은 짧아, 10분?
-좋아요.
그렇게 내겐 생애 최초의 벌칙이라는 게 생겼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엔 H씨가 1분간 벽보고 서있기다.
‘나이 들수록 좀 더 차분해지고 너그러워지자’ 다짐하지만
어느 순간 이걸 놓치곤 한다. 이상하게도 가까운 사람일수록 잘 놓치게 된다.
정말 벽보고 반성할 일이다.
찬밥이 좀 적다 싶게 남은 날은
양푼에 부추며 깻잎 잔뜩 넣고 얼른 부침개 두어 장 부쳐
풋고추에 근대 잎에 쌈 싸 먹는 저녁상도 요즘 같은 날은 좋다.
불을 최소한을 써서 좋고 후다닥 금방 차릴 수 있어 좋다.
이런 날 냉장고 들어있던 꽈리멸치볶음은 그저 자리만 차지하게 된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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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쨍한 햇볕이 그리울 만큼 흐리고 비오는 날이 연속이다.
생애 첫 혼자만의 여행을 준비하고 있는 딸에게 그냥 편지가 쓰고 싶었다.
언젠가 너의 고민과 불안에 대해 얘기하며 여행으로 이 모든 것을 미루고 있다는 말이 생각났어.
우선 이번 여행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말라는 말부터 해주고 싶다.
왜냐하면 풀기 위해 충실했던 어제 없이 오늘 풀리는 문제는 없고 그 삶의 문제는 내일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네가 당면한 문제는 풀어야 할 수학문제나 정답이 있는 숙제가 아니란다.
‘지금’이라는 시간에 네가 선택해야 할 선택지에 지나지 않아.
그 선택을 위한 고민이 나쁜 건 아니지만 불안과 염려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고민은 필요 없는 거란다.
네 고민을 좀 더 풍부하고 깊이 있게 가져가고 싶다면, 실마리를 찾고 싶다면 ‘지금 여기’ 현재에 집중하렴.
아이야! 화장실에 앉아서는 화장실 문제에 온 힘을 다해야 하고 책을 볼 땐 책에 집중하는 거란다.
밥을 먹을 땐 식사자리에 집중하는 것, 고민이 있을 땐 그 고민 자리를 봐야 한다.
그래야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의 답(선택)을 구할 수 있단다.
‘집중하라’는 건 오랜 시간 붙들고 밤새워 고민하고 상담하고 토론하고 또 할까 말까 고민하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문제는 문제대로 선택은 선택으로 맞이하는 태도,
문제와 선택 게다가 너의 이해득실까지 섞어서 현재를 바라보거나 과거에 얽매이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말라는 거다.
고민이 있다면 지금 하렴. 선택해야 한다면 지금 하렴. 너의 선택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지금 요청하렴.
지금해도 되는 것을 여행 가방에 싸지 말거라.
호기심 가득, 즐거워야 할 여행지에 네 삶의 염려와 걱정보따리를 가져가지 말거라. 여행은 그저 여행일 뿐이란다.
그래도 굳이 무언가 가져가고 싶다면,
혹 너의 염려와 걱정이 ‘우물 안 개구리의 하늘’은 아니었는지 의심하고 성찰하는 마음.
환한 웃음. 따뜻한 눈. 튼튼한 다리면 되지 않을까?
혼자 있는 여행지에서 너무 심심하고 무료해서 사색을 즐기고 싶어지면
‘사소한 것에 열과 성을 다하기’, ‘개인적, 이기적, 편파적, 제한적’이라는 말들을 떠올려 보렴.
‘사소한 것’에 대한 개인, 이기, 편파, 제한적 판단과 행동들은 없었는지 돌아보는 것? 재미있지 않을까.
혹시 편파적이고 제한적 감정이나 생각들에 묶여 사물과 관계의 실재를 제대로 못 받아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네 가치판단들을 한 줄로 쭉~ 한 번 꾀보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릴 수 있듯, 사소한 것이 네 일상, 네 삶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단다.
사소한 것에 열과 성을 다해야 하는 까닭이다. 네가 여행지에 가져갈 책을 구한다면 내가 선물해도 될까?
사랑하는 딸
오늘도 행복하렴.
오늘 저녁은 감자와 호박을 넣은 고추장 찌개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