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공기 좋은 데서 마시는 술은 잘 취하지 않는다지만
배부르다는 핑계로 점심도 건너뛰고 밀어 넣은 막걸리는 밤이 깊어가자
하나 둘씩 체력대로 나가떨어지게 만들었다.
구들 깐 방이 있었다.
낮부터 때 놓은 군불은 말 그대로 방바닥을 뜨끈뜨끈 달궈 놓았고,
거나한 취기와 적당한 피로는
배나온 중년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잠에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11시 넘어서인가? 술기운과 뜨끈하게 올라오는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었다.
체력 좋게 잠결에 술먹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더니,
“시간 됐어요. 일어나소! 기상!!! 3십니다. 산에 간다메, 기상!!! 기상!!”
하는 소리기 들렸다. 일어나보니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지만 머리는 상쾌하다.
주섬주섬 일어나 화장실가고 옷들 챙겨입는 소리가 들리고 나도 준비를 했다.
“바람 많이 불겠지? 나 모자 안 가져왔는데, 괜찮을까?” 하는 D와
“나 목도리 있어, 바람 불면 아쉬운 대로 해. 올라갈 때야 괜찮을 거고.”라고
답하는 A의 대화 속에 장비를 챙기던 나 “내가 미쳐, 정신머리 하곤!!!” 소리를 빽 질렀다.
모두 나를 돌아보는데, 장갑 들고 멍해 있는 나를 보고.
A “왜? 여름 장갑 가져왔지?”
나 “이 구멍 난 여름 장갑을 내가 왜 챙겼을까? 노안이 왔다고 이것도 못보나....궁시렁”
D “어디 목장갑 찾아봐, 그거 위에더 목장갑 끼면 되겠네.”
“막걸리나 잊지말고 챙겨”
나 “그건 챙겼어, 노고단가서 한잔 해야지 ㅋ"
주말마다 3년째 집을 짓고 있는 녀석이자
비주류라 술 한 잔 못 먹는 후배에게 “운전은 니가 해” 하며 성삼재로 4시쯤 향했다.
구불구불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예상외로 주차장이 한가하다.
앞서 주차된 두어 대 차량 외에는 텅 비어 있다.
“웬일이래? 이리 한가하고, 너무 일찍 온 건가!”
“겨울엔 이쪽에서 많이 안 오르나 보지” 이런 말들을 하며 눈길을 걸어 천천히 걸었다.
“오늘 날씨 좋다. 아직도 별이 창창한데”
“그러게 이대로라면 일출도 보겠다. 보기 어렵다는 노고단 일출!”
“땀난다. 바람 하나 없고 산행엔 정말 좋은 날이다.”
빽빽이 눈 덮인 어둠이 가시지 않은 겨울 새벽 산길을 그렇게 쉬엄쉬엄 걸어 올랐다.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 일출까지 시간 있으니 좀 쉬었다가자고 취사장에 들어갔더니,
어머! 딱 두 팀만이 산행 준비 중이다.
‘바람뿐 아니라 사람도 없고 오늘 정말 날 잘 잡았네.’ 하는 기쁜 마음으로
땀 식히며 물 한 모금 하고 있는데, 랜턴을 든 남자가 쑥~ 들어오더니
“노고단 고개까지만 올라가세요. 고개부터 단속합니다.”
“네?”
“어제 16일부터 통제 시작했어요.” 하는 국립공원 직원의 설명이 있고
“어쩐지 사람이 없더라…….”
“보통 2월말부터 하더니만 이번엔 좀 빠르네.”
“예, 여기선 노고단고개에서 구례로 내려가는 길만 열렸어요. 아니면 백무동으로 가시던가.”
그렇게 새벽 산행은 막히고 말았다.
가져간 막걸리 한 잔씩 들이켜고 터덜터덜 성삼재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산내로 돌아오는 길, “실상사 동종이나 보러가자”는 말에 실상사에 들렸다.
실상사에서 30여분 자분자분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와 보니
밤새 벌어졌던 일을 설명해주는 술병들의 행렬
“술 깨니 배고프다, 라면 끓여 먹자.”
“좋지, 라면에 해장 술!!! ”
“막걸리 얼마나 남았어?”
“가져온 건 다 먹고 여기서 산거 한 박스”
이렇게 일탈 2일째 아침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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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채워지지 않는 허기처럼 문득문득 지속해서 허전했다.
처음엔 심심해서 그런 줄 알았다.
뭘 좀 먹어볼까? 간식거리를 찾아 나섰고 때론 진한 커피, 몸에 좋은 차 따위를 찾았다.
그러다 술과 친구를 찾기도 했다.
‘내가 왜 이럴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남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 이러는 구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일도 만들어보고
약속도 취미도 가져봤지만 허기는 여전했다. 때때로 허기는 외로움을 동반했다.
직장, 경쟁, 집, 행복, 책임, 부모님, 가족, 돈, 노후, 사랑, 자식, 건강, 자기계발,
또 경쟁……. 돈! 돈! 돈!!! 우리가 고민하며 살던 것들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왜 사는가? 왜 죽는가?
왜 행복해야 하는가? 왜 노후를 준비하나? 는 문장으로 고민하지 않고
이런 명사들만으로 고민할까? 고민을 넘어 집착하게 되는 까닭은 뭘까?
우리가 쫓던 명사들은 이름 그대로 만들어진 건 아닐까?
본래 있던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건 아닐까?
배 불룩한 중년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 스스로들에게 묻는 질문이다.
혹 개별화 돼버린 삶, 개인의 감정, 개별 이성이 기준이 되는 책임과 자유, 자의식이
우리를 외롭게 하는 건 아닐까?
“가족이, 배우자가, 자식이, 엄마가 있어도 심심하고 외롭고 괜한 허기짐에 라면을 끓이고
‘언제부턴가 내 말은 나만 들어?’라는 볼멘소리를 하고
밤참과 술을 찾던 적은 없었는지?” 조용히 서로에게 물었던 들키지 말아야 할 감정의 일탈이다.
참 이상하다.
양푼 비빔밥에 김쌈이 어느 땐 한 없이 정겹고
어느 땐 밀려오는 설움만큼 허기지게 한다. 알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자의식과 자유와 책임을, 욕심을 조금 줄이면
들깨 푼 무청된장 지짐처럼 따뜻하게 속을 달래줄 수 있을까??????????
자유와 자의식을 줄일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니 가능한 건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