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귀가 버스서 잠이 들었다.
집 앞은 진작 지나쳐 버스 종점서 부스스 깨어 휴대폰을 보니,
시간은 12시가 넘었고 H씨로부터 전화가 여러 통 와 있다. ‘아직 안자나?’ 하며 집으로 전화를 했다.
“어디예요. K가 아직 안 왔어. 신환회 준비한다고 학교 갔다가 11시쯤 출발했다고 전화 왔었는데,
전화기는 꺼져있고…….” 근심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알았어요. 졸아서 버스종점인데, 빨리 갈게” 짧게 대답하고 택시 올라타자마자 K에게 전화를 건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 멘트가 나오면 끊고 다시 걸기를 반복하며
‘학교를 가봐야 하나, 학교친구들 연락처는 있던가? 오늘 누구와 있었던 거지…….’ 걱정은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생각 따로 손 따로를 반복하며 전화기를 누르던 중, 어느 순간 신호가 간다.
“여보세요”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맑다. 순간 안도하며 “왜 전화기는 꺼 놔! 어디야?”라고 묻자.
“집 앞, 버스에서 막 내렸어, 배터리가 없어서……. 꺼 놨다 켜면 1%씩 생겨서” 라고
부모 걱정은 오간데 없는 대답이 들려왔다. “알았어, 얼른 들어가, 엄마 걱정 많이 했어”라며 끊었다.
집에 도착하니, H씨는 방에 있는 듯하고 K가 혼자 제 방을 치우고 있다.
안 봤지만 짐작 가는 풍경이다. H씨 한 걱정하고 들어갔고 뾰로통해진 K 조용히 제 방 정리중인 광경.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늦으면 늦는다고 문자라도 하던가? 술 먹은 것도 아니고.
배터리 없어서 전화 꺼놓는다고 말했어야지.” 라고 한마디 하자,
“알았어, 미안해!” “근데 나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 알아서 한다고” 팩하니 K가 성질을 낸다.
순간 욱하고 올라왔으나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로
“왜 네가 성질인데, 11시 출발했다는데 지금까지 안 오고 전화는 꺼져있으면 걱정되잖아.
엄마 걱정했을 건 생각 안 해. 배터리 없어서 전화 꺼 놓는다고 문자 한번 하는 게 그렇게 힘든 거 아니잖아.
짜증부릴 일도 아니고, 성질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생각해 봐” 라고 말하자,
“알아, 출발한다고 해 놓고 친구들하고 얘기하다 2~30분 늦었어. 전화기 꺼놓는 건 문자할 생각 못했어.
잘못했어! 근데 엄마도 막 뭐라 하고 아빠도 얘기하니까……. 내가 알아서 할 게 걱정 마”라고 대답하는데,
성질은 죽었으나 입은 여전히 닷 발 나와 있다.
“씻고 일찍 자, 내일 엄마한테 얘기 잘하고, 짜증내지 말고…….”
그렇게 소동은 지나갔으나, 이런저런 생각들로 쉬 잠들지 못한 밤이었다.
K말대로 스무 살이 넘었고 제 몸 뿐 아니라 제 생활 전체를 지키고 만들어갈 나이가 되었고
조금 걱정되더라도 지켜봐줘야 하는데, 혹 세상이 험하다는 핑계로 K가 독립하는 걸 가로 막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택시타고 집에 오며 들었던 내 걱정도 결국 아이에 대한 신뢰가 없어서 만들어진 괜한 걱정은 아니었는지…….
묻게 되는 밤이었다.
이런 저런 걱정을 떨쳐버리고 벽사辟邪의 마음을 담은 팥죽 사진을 올린다.
나는 국수를 좋아해서인지, 새알 들어간 팥죽보다 팥 칼국수를 즐기는 편이다.
동치미와 김치만으로도 훌륭한 식탁이나
아마도 K를 위해 연근튀김도 했던 듯하다.
딸 둔 부모들은 괜한 걱정이랑 접어두고 모든 딸들은 안전하길……. OT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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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
어젯밤 일을 복기해봤다.
너는 친구들과 수다 떠느라고 조금 늦게 출발했고 이를 알리지 않고
때마침 배터리가 잔량이 떨어진 전화기를 꺼 놓으면서 이런 사정을 얘기 안한 건 잘 못이지만
절대 있어서는 안 될 큰 잘못도 아니고 너무 걱정이 많은 엄마 아빠 때문에 짜증 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널 얼마나 자식이 아닌 성인으로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직은 확실히 준비가 덜된 것 같아.
조금은 섭섭하지만 널 믿고 널 독립시키는 연습을 일부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두 번째 화살’이라는 말이 있어, 불교에서 쓰는 말인데,
어떤 일, 사건, 말들이 있고 난 후 그에 대한 ‘내’반응을 말하는 거야.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는 말은, 있었던 사건,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야.
어제일로 예를 들자면, 네가 엄마한테 걱정을 들은 건 엄마의 걱정인거지 너의 걱정은 아니었던거고
따라서 넌 엄마의 걱정이 어디서 왔는지 그 걱정을 네가 덜어줄 수 있다면
네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하고 얘기하고 행동하면 그뿐인거지 그런데
엄마의 걱정을 너를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억울해하고 짜증부리는 걸로 나타나면 결과는 정반대겠지.
네가 엄마로터 걱정을 들은 걸 첫 번째 화살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한 네 반응이 억울해 하고 짜증부린다면 두 번째 화살을 맞았다고 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차분히 엄마의 걱정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면
넌 짜증나는 일이 없을 거고 오히려 엄마에게도 힐링이 되지 않을까? 이경운 두번째 화살을 피한거지.
아빠도 마찬가지고 결과적으로는 너에 대한 신뢰가 커가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이해할 수 있겠니?
K야 살면서 수없이 많은 일들을 겪는다. 특히 사람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더 많단다.
그때마다 짜증부리고 상황에 휘둘리자 말고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하렴.
지나치게 너를 앞세워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도록 하는 것. 스스로를 굳세게 하는 길이란다.
독립을 준비하는 딸! 화이팅!!!
오늘도 행복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