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산 영지란데 크긴 크다. 손수건은 비교해보시라고.
얼말까?
사지 않을거라 묻지는 못했다.
풀은 산삼이요,나무는 마가목이라했던가.
마가목은 4년 해가리한다.
올해가 그 해로 설악산 도처에 마가목이 풍년이다.
천식,관절염등에 좋은데 특히 어린이한테 효과가 크단다.
줄기,뿌리,열매 어느 하나 약효가 없는게 없는데 특히 크게 자란 나무가 좋다. 물론 다려서.
파시는 할머니가 말하시길,중풍에 좋아 옛날 여자들은 마가목으로 만든 비녀를 꽃았단다.
마가목이라??
마아목(馬牙木)에서 마가목으로.
말의 이빨 처럼 봄날 새싹이 튼실하게 돋아 붙혀진 이름이다.
마가목은 말과 관련이 많다.
이름부터가 그렇고, 또 마가목 줄기로 만든 채칙 한방이면 말이 쓰러진다나.
나무의 산삼이라는 별칭처럼 말같은 기력을 주고.
전주 일요일 중청 아래 마가목 군락지~
매마른 백담계곡엔 공든탑들이~~
용대리~백담사는 8키로를 백담계곡이라 부른다.이후는 수렴동계곡.
전설에 의하면 대청부터 백담사 까지 100개의 담(潭)이 있어서 百潭寺다.
아래는 대한민국 최고 트래킹 코스 백담사~영시암 구간.
전나무 숲길~~
월정사,내소사 전나무숲에 버금간다.
보름 후면 전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 게다.
이처럼~~
사진은 재작년 늦가을에.
전나무와 금강송이 경쟁하듯 호위한다.
사이사이로 하트 잎의 생강나무도.
금강송은 황장목이라고도 하는데 껍질을 벗기면 황토색이여서.
한반도 소나무 식생도 종별 구분이 있다. 경주소나무종,금강송 등등.
지역적 특성에 따라 유전적 특화가 이루어져서다.
금강송은 바람과 폭설이 많은 중북부동해안 고산지대서 주로 자란다.
바람,폭설에 의해 가해진 중력을 이기기 위해 줄기가 곧고, 굵고, 치밀하며 잔줄기는 적게 진화했다.
반면 삼릉숲처럼 굽고 휘고,경주 인근 소나무들은 정말 볼품없다.
1천여간 경주가 권력 중심지가 되면서 좋은 소나무는 죄다 베어져서다.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열성인자가 남아 유전된 것.
다시 전나무 길을 걷다보면~~
이어 금강송 길이~~
우측으론 수렴동( 水廉洞) 계곡이~~
영시암이 보인다.
永矢庵~~
활시위를 떠난 살이라,
삼연 김창흡은 숙종 때 장희빈 사건으로 아버지 김수항이 죽음을 당했다.
울분에 세상을 끊고 전국 산수를 유람 후 이곳에 암자를 짓고 은둔했다.
그리고 세상과 완전히 인연을 끊겠다는 다짐으로 '영시암' 이라.
많이들 산에 들어갔다.
누군 도모하러 들어갔고,
누군 살고자 들어갔고,
누군 내적 자상에 시달리다 안식처 찾아 들어갔다.
김구는 일제 형사 살해 후 공주 마곡사로,
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집회 후 삼각산으로 들어갔다.
4,3은 한라산으로,
러시아 파르티잔들이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갔듯 조선의 그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백성들도 관의 횡포를 피해 저마다 산으로 들어갔다. 장길산도 임꺽정도.
사육신 피비린내 후 매월당 김시습,만해 한용운도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마의태자는 월악산,설악(한계산성)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은 가야산으로 들어갔다.(해인사 시초)
5백년 후엔 최치원도 가야산으로.
터마 남아있던 곳에 1988년 현 영시암이 들어섰다.
오세암을 향해~~
영시암은 중간 이정표 같은 곳이다.
이곳서 봉정암,오세암 가는 길로 나뉜다.
난 봉정암을 버리고 오세암을 향해.
서북능선엔 상현 불노문이 있다면,
오세암 가는길에 하현(下弦) 문지방이~~
전나무~~
사찰 입구 일주문을 받치고있는 기둥의 대부분이 전나무다.
이또한 금강송처럼 중력을 이기고자 곧고,굵으며 잔가지는 적다.
심지여 잔가지는 우산처럼 직각으로 뻗는다.
시기가 다되면 쉽게 끊어지게 해 무게를 줄이는 것.
결국 고목 상층부엔 저리 소수의 잔가지만 남는다.
산천은 의구하다.
재작년 늦가을엔 이랬다.
오세암~~~
예전엔 소청 아래 봉정암 가는 중생들의 중간 기착지이기도.
저 능선을 넘으면 공룡능선 속살을 볼수있는 마등령이다.
동자전~~
맏형 신흥사를 위시해 봉정암,백담사,오세암 등등 설악 품에 안긴 절의 시조는 자장율사란다.
말도 안되는 주장이지만 우기니 믿는수 밖에.
자 장율사는 선덕여왕 최측근으로 왕실 최고 이데올러그였다.
한세대 후 원효,의상이 나타나 통일신라 초기를 산다.
물론 의상은 자장 보다 더한 이데올로그.
기껏해야 고려말인데도 우리나라 사찰 태반이 시조를 이 3인 중 한명이라 우긴다.
여기에 신라말 고려초 도선 정도가 끼고.
1600년 초반 설정대사는 고아가 된 4살된 형님 아들과 둘만이 은거했다.
초겨울 설정은 조카를 남기고 겨울 양식을 구하려 마등령 넘어 양양으로 떠났다.
며칠분 밥을 남겼고 목탁을 치며 관세음보살을 외라는 주문과 함께.
그러나 폭설로 설정은 이듬해 봄에야 돌아왔다(그래서 5세).
와서보니 죽었으리라 여겼던 조카는 여전히 목탁을 두드리며 관세음보살을 외는 거 아닌가.
급히 법당으로 뛰어 들어가 안아 보려했지만 헛 것.
되돌아 보니 대청봉 쪽 하늘엔 꽃비가 내리고 조카는 관음보살과 함께 하늘로 오르더라는.
설악엔 한여름 노란 동자꽃이 멋지다.동자꽃 또한 오세암 전설에 의거한 작명이다.
그 오세동자가 따르는 감로수~~
생밤을 깍아놓은듯 넘 생경하다.
등산객은 이곳서 부족한 식수를 보충한다.
산무인지,안개인지, 스모그인지,,,,가시권이 짧다.
먼 능선이 실루엣으로 한폭의 동양화.
오세암 뒷길을 따르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로 가면 봉정암 거쳐 대청으로,좌측이면 마등령이다.
나는 마등령 길을 따른다. 설정대사가 양식을 구하러 가던 그 길이다.
그러니 마등령을 넘어오면 오세암 뒷편으로 들어오고,백담사서 오면 앞정원을 통해 들어온다.
오세암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따로있다.
한용운,김시습 & 이문구.
한용운은 18세 때 동학에 가담한 후 만주,시베리아를 거쳐 아래 백담사에 둥지를 튼 후,
이곳 오세암을 오가며 <님의침묵>과 <조선불교유신론>을 썼다.
매월당 김시습은 이곳서 머리를 깍았다.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권력을 찬탈하던 해 그는 삼각산 중흥사에 있었다.
비보를 듣고 만주 금강산 등으로 방황길에 올랐는데 이곳 오세암서 머리를 깍았다.
그리고 경주 남산 용장사에서 금오신화를 썼다.
<관촌수필>의 이문구는 소설 <매월당 김시습>을 쓰기전 그의 족적을 찾아 초봄 신흥사를 출발 마등령을 넘었다.
그 날의 일화를 수필로 남겼다(전문은 아래 댓글로)
김시습은 부여,한용운은 홍성,이문구는 보령 사람으로 알고보면 예전 인물들은 죄다 충청이다.
이제 1.4키로 네버엔딩 비탈길을 오른다.
1천미터로 고도가 오르니 가을은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는다.
되돌아보니~~
소나무~신갈나무 사이로.
다리도 아프고 해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저 모델 왈 " 찍어드릴까요?" 한다.
만산홍엽 까지 베어 내 얼골도 홍조로 찍혔다.
마등령 까진 0.5키로 남았다.
늘 뭔가 독특한 형상의 신갈나무~~
한시간 넘게 비탈길을 오르니 마등령 정상이 보이고~~
아래는 마등령 안대에서 바라본 공룡능선,설악골,천화대리지.

앞은 천화대.
앞 골은 설악골로 물은 흘러 천불동계곡으로 간다.
멀리 1275봉과 범봉이.
1275봉 정상의 w형상 사이로 공룡능선 등산로는 이어진다.
더 멀리 희미하게 대청봉도 보인다.
당 연한 거겠지만,
젊어서는,혹은 처초보등산객은 어느 지점을 시발점으로 하든 정복자처럼 대청봉으로 향한다.
그러나 연륜이 쌓이면 멀리서 정상을 조망하는 걸 즐긴다.
이곳 마등령은 그 조망처로 손꼽히는 곳이다.
한폭의 동양화~~~
마등령안부(공룡능선 시작점으로 여기서 오세암 길과 갈린다)를 떠나 이제 마등령 정상을 향해~~~~
험해 손끝이 달아지도록 바위를 잡고 올라야한다해서 摩登嶺이요,말 형상이라 해 馬登嶺이다.
양양 사람들이 인제나 한양 가는 고갯길이다.
또 스님이나 중생들이 오세암이나 봉정암 갈 때 걷던 길.
마등령은 갈림길이요,백두대간 길이다.
단목령~점봉산~한계령~서북능선~대청봉~무너미고개~공룡능선~마등령~저항령~황철봉~미시,진부령 이리.
마등령서 좌로 가면 저항령,황철봉 지나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이요.
우를 택하면 비선대 지나 설악동 가는 길.
아래는 마등령서 바라본 설악골~~~
마등령 지나 본격 하산길~~
세존봉~~
금강문 가는 길의 철조 데크~~~
금강문 입구서 아예 늦은 오수를~~
희디 흰 자작나무~~
아래는 설악계곡 속의 분지~~
우로는 천길 낭떨어지다.
뒤로 천화대~~
더 멀리 희미하게 대청봉.
아래는 암릉 구간 지나~~
저래도 잘자란다.
고도를 낮추니 푸르름이 더하고~~
다릿심이 풀렸는지 한차례 가볍게 굴렀다.
금강굴을 지나니 비선대가 코앞~~
비선대 각자(刻字)~
현대인처럼 승경처엔 조선조에도 사진사가 있었으니.
이름하야 각자공!!
이름을 퍽이나 후세에 남기길 좋아한 민족이다.
있는 자는 물론이고 장삼이사들도 이름 석자를 많이 남겼다.
유람길이다 보니 직접 정을 들고 새길 길은 없고 해 대부분 상주한 각자공에 의뢰했다.
각자공은 글께나 하는 인근 사찰 스님들이 대부분이였으니 당시 사찰의 주 수입원이였을지도.
각자공은 요청한 대로 새기고 탁본해서 인편등기로 보내면 나머지 비용을 지불받았다.
조선조 최고 유람처는 당연 금강산.
금강산 만폭동 계곡 너럭바위엔 수많은 각자로 이름 석자 새길 틈 조차없다.
선대가 남긴 각자 옆에 후손들이 이어서 새겨 바위 일부가 족보가 되어버린 곳도.
비선대서 바라본 천불동계곡~~
여전히 여름이 앞선다.
왼쪽 장군봉 측면으로 금강굴이 희미하게~~
발이 중요한게 아니라 무릅이거늘.....
달궈진 도가니를 먼저 식혀야한다.
샤워도 찬물로 먼저 무릅을,그리고 미지근 한 물로.
한국전쟁 때도 치열한 설악산 지구였듯 조선조에도.
80년대 만해도 神興寺였다. 지금은 新흥사다.왜??
80년대 초 신흥사 사시미 활극을 아시는지? 신구 지주 세력들 간 칼부림 한판에 3명 이 칼에 맞아 죽었다.
개과천선일까, 언젠가 新흥사로 개명했다. 저 일주문에 걸린 이름표엔 그런 속내가 들어있다.
설악동서 비선대 까지 수십만평 대부분이 신흥사(조계종 동해북부 본사) 소유다.
국립공원 입장료가 이미 폐지됐는데도 신흥사는 여전히 문화재 관람료 명목으로 받는다.
변변한 문화재 하나 없는 신흥사.
등산객 처럼 들르지 않아도 받는 이유가 신흥사 소유부지를 걷기 때문이란다.
대동강엔 봉이 김선달이 있다면 설악엔 신흥사가 있다.
받으려면 반듯한 안내원이라도 세워놓고 받든지.
입구서 운동화에 잠바 차림의 건장한 남성들이 마치 80년대 시위현장의 백골단 같다.
분명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무언의 협박이다.
난 씨앗 싸움에 돌부처 외면하듯 고개를 돌리면 지난다.
안그러면 힘들게 얻은 설악 감흥이 한순간에 사라지고말기에.
전전주도 갔고 전주도 갔고 이번주도 갈거다.
전주는 대청을 봤고 오늘은 높은 능선길을 걸었으니 다음은 당연 계곡이다.
상중하,,,그러면 가을 설악을 다보는 거다. 절정은 18일 전후란다. 따라서 이번 주말이 피크.
이번주 가시려는 분은,
1)천불동,수렴동 계곡을 걷던지,
2)오색 주변 흘림골 거처 주전골을 유람하듯 걸어 내려오든지(누구나 가능한 가장 쉬운 코스)
3)한계령 초입 대승령 넘어 12선녀탕 계곡으로 내려오시던지,
4)설악동 케이블카 타고 권금성 오르시던지 (주말은 인파로 시간지체)
5)구룡폭포 구간이나 울산바위길 따르던지(주말은 인파로 고생이니 주중에)
6)뒷산이라도 등산좀 하셨으면 한계령~귀때기~대승령(힘들면 여기서 하산)~12선녀탕을 타시던지
7)여전히 좋을 백담사~오세암~마등령~비선대를 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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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ccolo Paganini - Sonata for violin & guitar, op 2
전곡(6) 이어듣기 (2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