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문을 열고 닫기 위해서는 문의 한 쪽 위에 달린 걸쇠라고 해야 하나, 쇠로 된 장치를 움직여야 합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작동이 어려워서 닫는데 힘이 들더군요.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하다보면 닫기곤 해서 그냥 쓰고 있었는데
어느 토요일 밤 드디어 한참을 씨름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겁니다. 당황해서 더 그랬을까요?
살짝 닫고 그냥 집에 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어서 고민하다가 다시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
겨우 닫고 집에 가면서 무엇이 문제일꼬 하고 궁금해했지요.
그 일이 있었던 것이 지난 토요일 밤, 도서관을 담당하고 있는 동생에게 연락해서 월요일 출근하면 손을 보자고 말을 해놓았지요.
그런데 월요일 오후에 도서관에 가니 해결이 되었노라고요. 어떻게?
기름을 부탁해서 칠하니 너무나 작동이 쉽게 된다고요. 그렇구나 한 방 먹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날 밤부터는 열고 닫는 일에 무리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뒤에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적적한 상황에서의 기름칠이라
그런 것을 모르고 무조건 왜 이렇게 될까 불편하다고만 생각하고 상황에 대한 개선이 없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요
물론 기름칠이란 여기서 비유적인 의미라고도 해석할 수 있겠지요?
the pillars of the earth 소설을 원본으로 한 8부작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주인공이 프랑스의 생 드니 수도원 건축 현장에 가서 일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는 막 세워지고 있는 고딕 성당의 건축 비밀을
알고자 하는데 그 곳을 담당하고 있던 쉬제르, (번역자는 쉬제르가 누구인지 몰랐던 모양이라서 요상한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더라고요
그러니 번역은 언어자체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또 한 번 느낀 날이었지요 )에게 물어보더군요.
그러자 쉬제르가 유클리드를 아는가, 그를 모르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앗, 여기서도 유클리드를 만나네 하고
놀랐지요. 수학이 사변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어떻게 응용되는가를 알려주는 장면이었는데 제겐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영국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성당 건축을 이어갑니다, 그러다 어느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틈이 생긴 것을 발견하는데요
고민하던 그가 알아낸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의 바람이 다르다는 것, 그래서 플라잉 버트리스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이었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가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지요. 제겐
아하 소리가 절로 나면서 우리가 새로운 것에 다가갈 때의 태도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이 되었다고 할까요?
기름이 있다는 것도 모를 수가 있고, 기름이 있지만 언제 쳐야 하는 지를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고 미리 너무 쳐서 미끌미끌하게 만들어서
기능을 손상시킬 수도 , 너무 치지 않아서 불편을 안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요? 아니면 현명하게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양을 치면서
제대로 기능하는 인생을 살 수도 있고요. 문제는 그것이 머릿속으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란 것,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적적한 때를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사실 그런 시행착오를 두려워해서 한 발 앞으로 내딛는 것을 주저하면서 불편하게 살아갈 수도 있고
아니면 불편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살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닐까? 도서관 문에 친 기름으로 인해서 며칠간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이라고 보편적인 호칭을 썼지만 사실은 나는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네요.
조각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고 나서 민경이가 데가스라고 쓴 말을 정정하느라 드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저절로 드가의 그림을 찾아보게 됩니다. 그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업이 일상에 향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어제는 같은 책을 윤교가 읽고 있던 중 제게 보여준 조각, 헨리 무어라고 생각했지만 아니더라고요. 첫 눈에 분명히 그의 작품이라고
느꼈는데, 덕분에 새로운 이름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렇구나 이 조각가는 누구지?
이런 관심이 새로운 조각가와 만나게 해주겠지요?
새로운 조각가를 알고 모르고가 사는 일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누군가 물으면 글쎄요,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제겐 그런 호기심이 열어주는 문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점에서 상관이 있다고 할 수 밖에요.
더 큰 일에는 손을 내밀지 못하고 이런 일에만 관심을 쏟는 너는 누군가 하고 스스로 묻는 일도 자주 있습니다.
도가니 소설이 나왔을때도 영화가 나왔을때도 선뜻 읽지도 보러 가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리는 기사를 읽는 일로만으도
마음속의 분노가 힘이 들어서요. 어느 날 개천절 쉬는 날의 불어수업에 관한 문의로 조르바님과 통화를 시도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더군요.
나중에 걸려온 전화,도가니를 보는 중이었노라고요. 영화라도 보아야 할 것 같아서 보러 갔다고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의 일만 하고 산다는 자세는 과연 옳바른가에 대해서 자꾸 생각해보게 되는 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