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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숭악하다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조회수 : 2,680 | 추천수 : 102
작성일 : 2010-07-17 13:23:17
* 텍스트의 내용이 꽤 길고 지루할 수 있습니다.




조하문 - 얼마나 나를

[그리스도의 수난 - The Passion of the Christ]


제작, 각본, 감독 멜 깁슨 / 출연 짐 카비젤, 마이아 모겐스턴, 모니카 벨루치, 세르비오 루비니 / 음악 존 데브니 / 의상 마우리지오 멜레노티 / 편집 존 라이트, ACE / 촬영 카레브 데스챠넬 / 2004년작 색채 / 러닝타임 126분


먼저 이 영화를 보고난 후 저의 개인적인 감상은 단 한마디로 일축되어 버렸습니다.

"숭악하다."

사실... 그것도 사투리로 숭악하다...고 표현하기엔 조금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화면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그런 느낌이 충분히 들도고 두되는 남을 것 같습니다.
단지 잔혹하고, 폭력성이 몸서리 쳐지고 하는 정도를 넘어서는 수위라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흉악하다는 느낌이 남습니다.

멜 깁슨은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종교적인 사명감을 많이 강조했지만, 그래서 더욱 이 영화에 집착했고 공개후에 수많은 비판과 반항의 목소리에도 아랑곳않고 꿋꿋이 버티지만... 이 속에 담긴 정신과 함축적 의미는 흉악한 화면의 과도한 폭력에 의해 본질이 가리워졌다는 혐의를 결코 떨칠 수 없습니다.

본질은 모든 원칙을 초월하며 그 순수성을 위해 과감하게 원칙들이 제거되어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련의 예수 영화들은 그 본질의 순수성을 지나친 원칙에 의해서 많이들 변질시켜왔었습니다.
이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가장 그 상황에 사실적으로 접근했다고 다소 우회적으로 본질의 순수성을 지킨 것인양 홍보하지만 결국 사실에 가깝게 재현해냈다는 원칙이 우상이 되어 또한 본질을 순간적으로 흐리게 했다는 것이 치명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본질은 무엇일까요?

성경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굳이 인간의 땅에 내려왔다는 이야기의 본질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죄 많은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전한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즉 하나님과 동격의, 완전한 신이지만 그 신의 권좌를 버리고 스스로 인간의 땅에 내려와 가장 비천한 존재로 태어나 완벽한 인간으로 삶을 살다가 인간들을 위하여 인생을 마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류의 영혼을 구원할 유일한 신이자 메시아라는 사실이 바로 이 근본 이야기의 본질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그 본질을 지키기 위해 많은 원칙들을 만들어왔습니다.
그 원칙들을 가지고 교회를 운영하고 비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전도를 하며 매주일 교회에 모여 예배를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죽고 부활한지 2000년도 훨씬 지난 지금, 이 교회의 법들은 수많은 자질구레한 원칙들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의미를, 그 본질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고 그 숭고한 피의 의미를 더럽혀왔습니다.
종교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란 이렇게 비참한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음을, 2000년이 넘도록 오류에 오류를 범해왔으면서도 아직까지 자기들 교회법이 본질인줄 알고, 그것이 진리인양 착각하며 사람들을 호도하는 것이 바로 우리 눈에 보이는 현대 기독교회의 모습입니다.

영화는, 철저하게 인간을 그려내는 예술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는, 기독교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기독교인들이 원하는, 기독교인식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위 "은혜"를 끼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왜냐면 성경은 철저한 신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영화는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며 결국 영화라는 것은 인간을 그려내지 결코 신을 그려내지 못하는 쟝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마지막 12시간을 다른 부연 설명 한마디 없이 그저 담담하게 서술적으로 그려냈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화가 될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인간의 영화도 역시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본질의 반만 보이는 셈인데... 본질의 순수성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시도가 바로 본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만 보여준다는 것임을 상기해본다면, 이러한 관점에서 봤을때, 이 영화 역시 다른 예수 영화들과도 큰 차별성을 갖지 못하고 다른 영화보다 잔혹하다는 빈축만 살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개봉 당시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문제가 됐던 반 유대주의 정서.
글쎄, 과연 어떻게 그것을 변명하고 해석해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을 들여다봐도, 실제로 당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미친듯이 요구했던 엄연한 역사적인 사실이 보란듯이 기록되어 있는 현실 앞에서... 물론 성경에는 가급적이면 예수를 처형하지 않으려는 빌라도의 고민이 짧으나마 밝혀져 있지만, 반면에 그런 빌라도에게 '그 피를 우리에게 돌리라'고 위험한 요청을 했던 유대인들의 함성 또한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어쩌자고... 저 위대한 선민이라는 자의식 속의 유대민족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그 시대만큼이나 이토록 미워하는지...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 영화는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들에게 훨씬 안좋은 영향을 미칠게 틀림없는데... 그 이유 또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래부터 보이지 않는 신입니다.
그런데도 굳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기 원합니다.
끊임없이 요구해왔고 결국 하나님도 그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성자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이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귀찮게 조르던 유대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합니다.
단순한 계산으로 보자면 참으로 배은망덕한 사실인 것입니다.
물론, 유대교 전통에 따라 종교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왜 그런지 무궁무진한 이유들이 뛰쳐나올테지만...

원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대해 자신들 민족적 자긍심 안에서 오랜 시간동안 길러왔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그런 교만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만인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빌미를 제공했고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계획은 그렇게 실천되기 시작했다...고 보는 기독교적 해석과 사뭇 다른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종교를 떠나 지극히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그들 유대인들이 인정하든 말든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하실 뿐인 것입니다.

유대인은 그렇게 구약시대에 머물러 있으면서 계속 원칙으로 본질을 더럽히고 기독교회는 신약을 떠받들며 이제 오늘날까지 또한 본질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 기독교의 본질 왜곡의 역사에 대한 가장 극명한 증거가 바로 '사도신경'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도신경'은 특히 우리 나라의 기독교회(개신교회)들이 자기는 이단이 아님을, 정통 적자라는 자부심을 갖기위해 채택하고 있는 경구로써 원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대략 짐작은 가지만 이제는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시간마다 마치 주문처럼 열심히 달달 외우기도 하는 것으로... 그 본래 의미마저 퇴색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결코 떨칠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물론 기독교인이라면 그 내용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사도신경이라는 단어 자체가 매우 불경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속에는, 현재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이 66권의 책에 적힌 말씀 외에는 다른것을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오늘날 교회는 이 사도신경을 마치 성경에 준하여 신성시 합니다.
또한 사도신경은 실제 사도들의 신조도 아니었고, 성경도 아니고 기도도 아닌, 초기 카톨릭 교회의 순수성과 정통성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당시 어떤 젊은 수도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강령인데 마치 이것이 기독교회의 본질인양 오해된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만들어낸 강령이, 인간의 법이 하나님의 교회의 순수성을 증명한다는 다소 오만한 생각이 그 근저에 깔려있기도 한 것입니다.

기독교적 해석으로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만으로도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될 수 있는데... 거기에 덧붙여 이를 기준으로 이단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으니... 그 믿음 참으로 허약하기 이를데 없군요!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성경 구절의 오역, 혹은 의도적 왜곡 등입니다.

먼저 고전적, 학문적 의미로써의 왜곡을 살펴보자면...

오랜 시간동안 성경이 필사본으로 전승되어 오면서 그 필사자들과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치던 당대 교회지도자들의 의도적인 왜곡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요즘 우리 나라에서는 '원전'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 모양인데 정확한 용어는 '원본문'이라 합니다.
원전이든 원본문이든 어짜피 같은 뜻이긴 한데...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에게는 원본문, 즉 "Original Text"라는 것이 실제로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어 사본을 들고 다니며 '원전'이란 단어로 사람들에게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헬라어 사본의 역사는 크게 두가지 경로로 현재까지 이해되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우리가 흔하게, 비교적 쉽게 구해 볼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과 또 하나는 킹제임스 성경의 모태가 됐던 시리아 계열의 사본이 그것입니다.
본문 비평학적 관점에서는 알렉산드리아 계열의 사본이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어오고 있는 반면 사본학적 관점에서는 시리아계열 사본이 중요한 사료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계열 사본은 필사자 개인의 신앙적 색깔보다는 당대의 교회지도자들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그들의 입김에 의해 성경 본문들이 변개되어 그 가치를 상당히 손상입은 것으로 연구 결과가 나와 있으며 가장 극명하게 훼손되었던 것이 유명한 '70인역' 성경이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본문 비평학자인 바트 어만에 따르면 이 '70인역성경'은 알렉산드리아 공의회 위원들이 같이 머리를 맞대고 편찬했을 뿐 성경적 가치로서도, 역사적 가치로서도, 학문적 가치로서도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 성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만을 가중시키는, 나와서는 안될 사본이라고까지 얘기할 정도였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소위 성경을 연구한다는 사람들에게 이 '70인역'성경은 이상하리만치 과대평가되어 있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그 '70인역'성경을 과대평가하는 미국의 성경편찬위원회의 대다수 지도부가 지금도 우리 나라 기독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복음주의(혹은 근본주의)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혐의를 결코 떨칠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 시리아 계열 사본은 초기 기독교의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로마 카톨릭과는 조금은 거리가 있었는지 몰라도 필사자 개인의 신앙적 색깔에 의해 부분부분 약간씩의 단어 첨가나 삭제가 있어왔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진데에는 1611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간행된 King James Bible Athurised Version 이었고 이 성경은 오늘날까지 여러번에 걸쳐 수정된 N.I.V.성경에 비하면 그래도 많은 부분 원본문을 재구성 하는데 비교적 정확한 진의를 전해주는 사료로 인정받아오고 있는 형국입니다.

현대적 의미로 왜곡의 한 단면을 살펴보자면,

예를 들어 구약의 맨 마지막 책은 '말라기서'입니다.
이 말라기서의 주된 요지는, 사람들에게 그 욕심에 기인한 재물을 더 이상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욕심에 하나님은 이제 질릴만큼 질렸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저주한다는 것이 말라기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땅의 많은 기독교회들은 주일날 설교에 말라기서를 인용하는 경우는 대부분 십일조 얘기를 할 때뿐입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이 처음에 가장 부담을 갖는 부분이 이 십일조 문제입니다.
자기 수입의 1/10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그러나 이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회의 목사들이 말라기서에 있는 한구절을 인용하여 설교를 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여기에서 중요한 본질은, '십일조'라는 것은 자기 수입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믿음의 고백으로, 즉 자신의 삶에 깊이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권리를 인정해 드리는 믿음의 행위여야 한다는 의미로 그 구절은 해석되어야 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신학과정을 수학한 목회자라면 당연히 알고 있고, 반드시 그 진의를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실제로 설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십일조를 꼭 해야 하나님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축복해 주신다고 왜곡하는 목회자들이 너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해서 더 많은 돈을 번다면... 그건 더이상 신앙이 아닙니다.
그건 신과 거래를 하겠다는 욕망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욕망의 찌꺼기들로 원칙을 만들어 20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본질을 왜곡시켜 왔습니다.

기독교회에서 흔하게 강조되는 면면을 상기해봐도 이건 분명한 언어도단이요, 비열한 이중잣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 가르치고 전도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생각할 때, 십일조를 바치면 축복해주고 안바치면 저주를 퍼부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아버지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께 무언가를 바치든 말든 상관없이, 그저 사람은 존재하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무조건적으로 희생가지 하며 사랑한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본질, 즉 '진리'인 것입니다.
이 진리가 현대의 교회가 설파하는 원칙, 소위 '교리'와는 얼마나 상반된 것인지... 그저 답답할 따름입니다.

오늘날,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가 갑자기 재림한다 한들... 잘했다 칭찬받고 천국에 들어갈 기독교인들은 과연 몇명이나 될까요?
그 옛날 유대땅에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무리라고 강도 높게 책망하셨던 예수님은 오늘날 한국땅의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무엇이라 말씀하실지 상상할 수 있을까요...!?

현대에 재현되고 있는 진짜 그리스도의 수난은 바로 기독교인들에 의해 본질이 왜곡당하는 하나님의 진리인 것입니다.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Clip
    '10.7.19 10:25 AM

    외국에서는 십일조를 걷지 않는다고도 들었는데, 왜 한국의 교회에서는 계속 걷는지 모르겠어요. 엄청난 헌금을 걷어서 모양좋게 비싼 건물만 짓고 문화센터를 만들고 정작 선량한 이웃과 도움이 필요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얼 나눠주는지 모르겠어요. 남을 돕고 희생하고, 가르치고 하는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였다고 생각해왔는데, 막대한 양의 헌금중에서 몇 %나 사회복지에 기여하는지 모르겠어요.

  • 2. 그린
    '10.7.21 12:19 AM

    언제한번 님께서 추천올리신 영화! 꼭한번 보아야겠습니다.성경공부를 많이하신분인가봐요.작년 조카가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훌륭한 목회자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정작 기독교에대한 편견을 많이 하고있으면서도 (그 대부분이 목회자들로 인한 것이지만)그 편견을 고치려는 ,되새기려는 노력들은 안해왔습니다.님의 글을 읽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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