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낮 도서관에 수업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참 수업중에 동생이 부르더군요. 언니 어버이날이라고
보람이가 국제 전화를 했네. 받아보니 지금 피렌체인데 비가 많이 와서 우울하고 미술관, 박물관 ,성당을
너무 많이 보아서 질린다고요. 그리곤 불평을 해댑니다. 파리에서는 대학생이라고 무료로 보고 다니던 곳을
돈을 내고 들어가니 불편하고 화가 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그 곳까지 갔으니 사람들에게 먼저 말도 걸고
이왕이면 즐겁게 다니고 엄마에게 좋은 엽서도 보내라고 하니 이미 두 장이나 보냈으니 기다려 보라고 하네요.

이모하고 통화하라고 수화기를 넘겨주고 저는 수업으로 돌아갔습니다.그리곤 잊고 있었는데
늦은 밤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내 한국 휴대폰으로 전화 좀 해 줘 하더니 바로 수화기를 놓습니다.
그런데 낮에 국제 전화인 걸 잊고 오래 통화했네,엄마보고 다시 걸라고 하지 그랬니?
알고 보니 숙소에서 070으로 길게 통화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곳을 나온 상태라 엄마에게 전화를
요청한 것이더군요. 엄마 사실은 할 말이 있었는데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이렇게 나오면 안 봐도
비디오란 말이 딱 들어 맞는 경우거든요. 무슨 일인데? 내일 밀라노로 갈 건데 그 곳에 디자인 호텔이
있거든. 디자인 호텔이 무슨 말인가 저는 물론 어리둥절합니다. 디자인 호텔이 평소라면 전혀 가기 어려운
곳인데 (하루 밤 자는데 500유로라고 하네요) 딱 하루 90유로로 잘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고민중이라고요
그런데 너무 비싸서 곤란하겠지? 호스텔은 하루 묵는데 얼마냐고 물으니 한국돈으로 5만원, 디자인 호텔은
15만원,마음은 그 곳으로 가고 싶지만 마음이 찔리니 엄마에게 면죄부를 받을 필요가 있었을 겁니다.

평소에는 다 컸으니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라고 부르짖어도 막상 그런 결정에는 혼자서 확 뛰어들기 어려워
하는 보람이가 재미있어서 웃으면서 말을 했지요.너 사실은 그 곳에서 자고 싶은 것 맞지?
일주일 여행에 지치기도 했고 그런 드문 기회가 생겼으니 가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엄마 돈이라 엄마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도 같다고요. 사실은 자신이 장학금으로 받은 돈으로 교환학생도 가고 여행도 하는 것이라
엄마 돈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전화한 아이에게 기분좋게 그러면 하루 그렇게
자도록 하라고 말하고 통화를 마무리했지요.

늦은 밤의 통화로 잠이 깨버려서 금요일 서울 스프링 실내악 축제에서 들었던 놀라운 곡
리쾨라고 처음 들어보는 작곡가 24세의 나이로 요절한 (친구들과 함께 오염된 물을 마셨으나 다른 친구들은
회복되고 혼자서 이른 나이에 죽었다고 하는 이 작곡가의 곡은 난생 처음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의 연주로
들었습니다. 전 날 좋은 연주를 들은 관계로 혹시 이 음악회에서 즐거움을 못 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은
완전 기우였습니다. 피아노와 호흡을 맞추는 그의 소리 하나가 오케스트라에 필적할 만한 박력으로 압도해와서
역시 강동석이라고 감탄을 한 날이었거든요.)그에 관한 기록을 찾아보기도 하고 그의 음반을 구해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보람이와 동갑인 김 선욱이 지금 활동하는 것, 15세부터 작곡을 했다는 리쾨에 대한
생각, 모짜르트의 음악에 대한 생각, 두서없이 머릿속에서 흘러다니는 상념들에 붙들린 시간, 천재는 왜 유독
음악계에 빈번하게 출몰하는가 고개 갸웃거리게 되기도 했습니다.

처음 실내악 축제에 갔던 때가 기억나네요. 강동석과 조영창의 협연이 너무 아름다워서 넋놓고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그래서 이번에도 혹시 호흡을 맞추나 기다렸지만 조영창은 피아노와 호흡을 맞추고
마지막 슈만곡에서 혹시 하고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으나 다른 멤버들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그들의 하모니가 대단해서 그 전의 안타까움은 그 사이 사라지고 말던 시간을 머릿속에서 복기하느라
토요일 밤, 한 통의 전화로 갑자기 전 날 음악회의 after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제적으로 좋은 음악회가 많아도 그림의 떡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찾아보면
국내에서도 ,멀리는 통영 국제 음악제, 평창의 국제 음악제가 있지만 서울에서도 좋은 음악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5월 18일까지 계속되는 음악회에 저는 한 번 더 갈 기회가 있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겐 그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널리 알려졌으면 싶네요.

다음 금요일에는 멀리서 올라오는 선배와 함께 슈베르트의 가곡을 들을 수 있고 살림열공님을 만나서
새롭게 공부할 가능성이 생긴 쉐익스피어 강좌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미리 정하지 않고 이렇게 저렇게 우연한 마주침으로 선택하고
즐기다가 거기서 한 발 더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보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 생긴다는 것, 이것이 제겐 바로
놀라운 기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날들입니다. 그 길 어딘가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중에 누군가가
또 제게 멋진 세계를 열어보여주겠지요? 그것을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이 더 즐거운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일요일 낮, 이런 기운을 돌아오는 보람이에게도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음을 열고 자신이 익숙한 세계 너머로 나서는 모험을 부추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드는 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