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오전에는 경복궁에서 사진을 찍고 오후에는 진실의 순간을 보러 갔습니다.
원래는 저녁시간 실내악 축제에 가기 전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서 박수근 전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진실의 순간을 한 번 두 번 세 번 여러 차례 사진을 보고, 다큐멘터리 영상까지 다 보고 나니
기운이 빠져서 걷기에도 힘이 들더군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일단 5호선 지하철 역근처에서 책을 판매하고 있는 교보문고로 갔습니다.
가방안에 들어있는 단 두 권의 책 하나는 도서관의 김미라씨에게 선물로 받은 나츠메 소세끼의 마음
문제는 일본어 원문이라 지금처럼 피곤한 시간에는 읽을 기운이 없고, 다른 한 권은 네덜란드 회화에 관한
글인데 이미 읽었던 책이라 지금처럼 피곤한 때에는 지적 자극이 일어나지 않을 책이란 느낌이 들어서
혹시 좋은 책을 발견하면 한 권 구하고 아니면 바람이 좋은 곳에 가서 조금 쉬고 싶었거든요.
새벽부터 저절로 잠이 깨서 난생 처음 교향곡을 들었던 별난 날,그래서일까요 ? 잠이 모자란 탓에
대낮에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은 이상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발견한 한 권의 책으로 그 이후의 시간이 확 달라지는 경험을 한 별스런 날이기도 했네요.
사실 이 책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는 이미 오래 전에 빌려서 읽은 책인데요,그 때는 수유 공간 너머에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서 멀찍이 바라보는 기분으로 읽은 책이었고 그리곤 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 곳에 발을 들여놓고 내 나름대로 이런 저런 경험을 하고 있는 장소라서 그런가요?
글을 완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읽게 되었습니다.
광화문의 공원에 자리잡고 앉아서 시간의 흐름을 의식하지 못 할 정도로 몰두해서 책을 읽던 중 시간을 보니
벌써 음악회에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고 아,아쉽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저절로 바라게 되는
그런 희안한 시간을 광화문 한 복판에서 보내게 만든 책이기도 했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책안에서 발견한 스피노자의 기쁜 능동촉발이란 말이 바로 지난 11월부터 그 곳에 다니게
된 이후의 저 자신을 설명하는 말처럼 느껴졌습니다.그렇지 않아도 강신주의 철학 vs 철학을 읽다가 에피쿠로스
의 편지에서 발견한 한 구절을 스피노자의 코나투스와 연결해서 이번 에세이 주제로 삼아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중 책속에서 발견한 바로 그 말 한 마디 기쁜 능동촉발. 바로 이것이네 하고 무릎을 치게 되었답니다.

2004년에 출간된 책이라 지금의 수유 공간너머 이전의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이 공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한 보고서라면
그렇게 몰입의 즐거움을 주는 일은 없었겠지요?
자주 그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시 나도 궁금한데 도대체
그 곳의 정체는 무엇인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겐 이 책을 읽어보라고,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무엇인가를
분명 건드릴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바로 일어나서 길을 떠나고 싶은 기분을 느끼게 할 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할 수 있답니다.

사실 공간이 있다고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겠지요 ? 공간에서 누구와 만나고 무엇을 하는가 그리고
그 일에 자신을 어느 정도 열고 참여하는가, 얼마나 마음만이 아니라 몸의 습속을 바꿀 수 있는가가 문제인데요
이상하게 제겐 평생 피해서 도망다니던 문제가 그 곳에 다니면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어
지금은 마음 가볍게 (물론 전부 해결되어서 가벼워진 것은 아니지만 ) 살아갈 힘이 생기는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표현하겠지요?
그런데 저 역시 어떻게 보면 그 일이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기적처럼 ,혹은 선물처럼 느껴지고 있어서
가끔씩 신기해하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5월 선물할 일이 많은 계절, 이 책을 구해서 읽고 친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면 받는 사람들에게도
예상치 못한 기쁨을 퍼뜨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 혼자서 공상을 하게 되네요. 이미 자야 할 시간이
넘었는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