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를 걸어다닐 때마다 마음을 자극하던 포스터 한 장,그러나 아무리보아도 날짜가 목요일이라서
눈질끔 감고 다녔습니다. 아람누리에 아쉬케나지 지휘에 김선욱 협연으로 필하모니아가 온다고 포스터안에서
유혹하는 글에. 그러다가 곰곰 생각해보니 어린이날 다음 날이라서 그렇다면 수업을 어린이날로 옮겨보면
어떨까 궁리를 하게 되었지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수업을 옮기는 일은 평생 거의 해 보지 않은 일이지만
작년 예술의 전당에 온 아르헤리치때문에 일요일 수업시간을 오전부터 서둘러서 하고 시간을 낸 것 ,그리고
어제 목요일 저녁 시간을 비우고 아람누리에 간 것, 그리고 앞으로 어떤 변수가 생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네요.

혼자 가면서 조금 더 좋은 소리를 들을까. 한 사람을 더 초대해서 이왕이면 함께 들을까 고민하다가
최근 축하할 일이 생긴 사피루덴스님을 초대해서 함께 갔지요. 그녀와 둘이서 가기로 한 연주회였는데
어제 목요일 수업을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은 호수님에게 저녁에 있을 연주회에 대해서 이야기했더니
그녀도 현장판매인 표가 남았다고 갈 수 있다는 연락이 왔네요. 최근에 알게 된 두 사람, 한 명은 수유공간너머에서
다른 한 명은 행복한 왕자에서 , 둘 다 마음속의 자기 검열이 덜 하거나 거의 없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라서
즐거운 마음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들인데요 그녀가 이 연주회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가 기대가 되더군요.

코리올란 ,그리고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 ,마지막 곡은 베토벤의 운명입니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지난 달 서울시향과 아르헤리치 협연으로 들은 바로 그 곡이지만 필하모니아와
김선욱의 협연으로 듣는 맛은 또 달랐습니다.
코리올란 연주때만 해도 박수가 그다지 열광적이지 않았지만 김선욱이 나오니 연주장이 떠나갈 듯 하더군요.

집에서 구해서 보던 아쉬케나지,그는 젊은 날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연주장에 등장한 그는 이미 백발 자체인
모리에 작은 몸집으로 젊은 날의 그가 바로 이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변한 모습이지만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서 아름답다고 느껴질 정도였지요. 남자에게 참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이라 참 드문 경험이었습니다.

피아노 소리를 가슴에 안고 듣기 시작한 베토벤,역시 첫 소절이 시작되자 앞 시간의 소리는 날라가버리고
오랫동안 끝나지 말았으면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몰입한 시간이었지요. 우리는 흔히 운명? 그 곡 나 알아
조금 식상하지 않나 ? 레퍼토리로서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요. 그러나 드레스덴 교향악단의 연주로
들었던 몇 년전의 베토벤, 그 때 안다고 ,들었다고 하는 것의 허상을 여지없이 날려버렸던 연주를 만난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운명이 남성적이었다면 이번의 운명은 여성적인 느낌이라고
할까요? 사실 익숙한 도입부를 지나면 소리가 다 새롭고 그래서 더 몰입이 가능한 곡이 아닐까 싶네요.

3 ,4 악장에서의 현과 관의 어울림에 주목한 날, 지휘자의 마지막 지휘봉이 올라가고 나서도 바로
박수를 치기 어려운 날이었습니다 .마음속의 울림을 조금 더 느껴보려고요.
끝나지 않는 박수에 결국 앵콜로 한 곡을 더 듣고 나오는 길,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서 슈베르티아데에
들렀습니다. 스피커가 좋은 음악감상실인데요, 그 곳에서 칵테일 한 잔 시켜놓고 고른 음반이 아쉬케나지
연주의 모짜르트였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음반 상태가 고르지 않아서 소리가 튀더군요.
그렇다면 ? 다시 고른 것이 카라얀 지휘의 베토벤의 운명이었는데요 연주장에서 들은 곡보다 훨씬 빠른
속도의 운명이 흘러나옵니다. 한 잔의 칵테일이 제 몸속을 돌아다니면서 일으킨 변화에 놀란 날이기도 하고
셋이서 나누는 이야기를 중간에서 잠깐씩 멈추어야 할 정도로 소리에 취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금요일 새벽 저절로 눈이 떠져서 처음으로 고른 곡이 평생 처음 있는 일인데요
교향곡이었습니다 .언젠가 제대로 연주장에서도 들어보고 싶은 베토벤 교향곡 6번 전원. 소파에 누워
1악장을 듣고 있는데 몸은 저절로 깨어나고 어제 한 잔 술에 취해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는데
새벽이 되니 다시 어제의 느낌이 살아나서 마음속에서 절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선 경험이 쌓여야 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던 호수님, 그녀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어제 경험한 모양이더군요.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를 급습하는 것이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듣기 시작한 클래식 음악 .그래도 거의 언제나 배경 음악으로 틀어놓는
것에 불과했던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음과 만나지 않았다는 것을 느낍니다. 현장에서 음악을
들으러 다닌지 4년째 , 그 사이에 음악을 대하는 제 태도가 달라져서 정말 듣고 싶은 음악이 있다면
동시에 책을 읽는 일은 어려워졌네요. 소리가 주는 기쁨을 알아가는 날들에 함께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일 역시 제겐 행복한 일이기도 합니다.

새벽부터 이런 소리를 늘어놓고 있자니 글로만 보아선 유한마담인 줄 알았다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네요. 이제 알만한 사람들은 제가 유한마담이 아닌 줄 다 알고 있으니 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