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AF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무엇의 약자인가 했더니 서울 오픈 아트 페어이더군요.
금요일, 강남에서 역사모임이 있는 날이라서 그렇다면 수업끝나고 맛있는 점심 먹고, 교보문고에 갔다가
아트페어에서 새로운 그림들을 만나고 마지막으로 신영옥의 노래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를 듣는 날이 되겠구나
길고도 즐거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습니다. 출발할 때부터.
교보문고에서 구한 세 권의 책, 다 들고 다니기엔 너무 무거워서 함께 서점에 간 조조님께 두 권은 월요일
수유공간너머에서 받을 수 있겠는가 부탁을 하고 저는 한 권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만 들고 나왔습니다.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에서는 네그리와 박노해, 비트겐슈타인과 기형도
이런 식으로 21장에 걸쳐 시인과 시인의 시와 연결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쉽고도 마음속에 쑥 스며들게
설명을 하고 있더군요. 교보문고에서 삼성동까지의 그 짧은 거리에서 지하철속에서 읽은 한 편의 글로
마음은 이미 책속으로 빠져들어버렸습니다. 코엑스가 아니라 이대로 2호선을 타고 자리에 앉아 이 글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지만 그것도 어려운 것이 이 전시를 볼 수 있는 제겐 마지막 날이라서요.
고민하다가 내려서 결국 안으로 들어가기 전 광장의 의자에 앉아서 비트겐슈타인과 아렌트까지 읽은 다음
(원래 이 책은 다 읽고 수유 위클리에 올드 걸의 시집이란 제목으로 글을 쓰는 은유님께 선물하고 싶어서
산 책인데, 선물은 곤란하네, 빌려주고 나서 나중에 보람이가 오면 읽을 수 있게 권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바꾸어먹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준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고미숙 선생의 책을 파리에 한 권 보냈을 때
한동안 손도 대지 않더니 엄마, 이 저자가 쓴 책 또 있음면 보내줘 하고 부탁을 하더니 그 책을 다 읽은 후의
소감, 그런데 니체가 궁금해졌어. 아무래도 원전을 읽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고병권이란 사람이 쓴
책부터 읽으면 될까? 아니 이럴 수가 이렇게 대단한 변화가 그 아이에게 일어나더니 역시 고미숙 선생의
영향력이란 대단하구나 보람이에게 책읽고 싶은 기운을 불러일으켜주다니. 니체는 한국에 돌아와서 읽기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 가능하면 남산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하나 정도 가담해보면 정말 좋겠다고
마구 진도가 나가더군요. 제 안에서.

아무 생각없이 전시장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표를 요구하네요. 표요? 몇 년전에 갔을 때는 무료전시였다고
기억을 하고 있어서 당연히 그냥 통과하려던 것인데 입장료가 만 원이라고 하네요. 아니? 어찌 할꼬?
미리 예상하지 않았던 입장료라서 순간 주춤했습니다. 이 돈을 낼 만한 전시가 될 지 어떨지 순간
망서려졌지만 새롭게 만날 그림들,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림들이 상당히 있겠지요?
들어가서 갤러리 넘버순으로 마음에 든 그림들. 새롭게 만난 화가이름들 빼곡히 정리해 놓았는데
아뿔싸 지금 아무리 찾아도 수첩이 없네요. 하루 온 종일 기쁜 날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수첩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이미 잃어버린 것 동동댄다고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드는 수첩을 하나 구해서
새롭게 정리해야 할 모양이네요.

미술관계자 그리고 미술 애호가들에게 그림을 팔기 위한 페어여서 그런지 각 부스에 있는 갤러리 관장이나
큐레이터들이 아주 친절하게 설명을 합니다. 그림 살려는 사람이 아니다, 그림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의 여유는
없어서 보려고 온 것이라고 말해도 그래도 좋다고 그림을 보러 온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이런 저런 설명을
붙이기도 하고 메일 주소를 알려주면 전시 소식을 알려주겠다는 말도 여러 갤러리에서 듣고 메모를
하기도 했지요.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일은 bandi trazos란 갤러리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멀미가 나기 직전일 정도로
그림을 많이 보고 이제는 지쳐서 예술의 전당에 미리 도착해서 조금 쉬어야지 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던
중 눈길을 확 끄는 그림이 있어서 결국 그 곳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권 순익이라는 제겐 처음인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서 그림을 보다 보니 그 화가, 또 다른 화랑에서 본 기억이 있는 르네 마그리뜨 풍의
그러나 그 작가보다는 조금 덜 초현실주의적인 화가, 또 한 명은 외국작가인데 판화작업으로 눈길을 끄는
그림들이 있었습니다. 둘러보고 있는데 여성 관장이 말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겁니다. 그 쪽에서도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라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알고 보니 경복궁 앞쪽에 있는 라틴 아메리카 그림을 많이 전시하는 화랑에서 만난 기억이 있는 큐레이터였는데요
그녀는 따로 독립해서 화랑을 차렸고 보테로전, 라틴아메리카전등의 기획전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라고
하네요. 아 그 때 우리들에게 남미에서 공부하고 막 돌아왔다고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해주고 그림에 대해
설명해주었던 그녀가 기억이 났습니다.

마침 사간동의 그녀의 갤러리에서 베네주엘라 화가들의 전시가 있다는 소개를 받았고 다른 화랑에서는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서 들어갔더니 마침 신사동의 갤러리에서 독일 화가들의 전시가 있다는 소개를
받기도 했지요. 화가의 기법을 자세히 설명해주는 큐레이터들을 만나기도 해서 다른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아트페어였습니다. 제겐

분당에 있는 갤러리라고 소개한 한 여성관장과는 한 화가의 그림으로 인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그녀에게 분당에 예술사를 읽는 모임이 있으니 그 곳에 초대하면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겠는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제가 직접 꾸리는 모임은 아니라도 아템포님이 애정을 갖고 준비하고 참석하는 모임이라서
늘 관심있게 마음으로 성원을 하고 있는 모임이라서요. 그녀는 이론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이 배워야 할 지도
모른다고 겸손하게 말하면서 참가가 가능하다면 자신도 함께 공부하고 싶다고 하네요. 그래서 전화번호까지
받았는데 그것도 역시 없어졌습니다.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한 번 찾아보아야겠습니다.

아트페어 전체에서 제가 한 점 구할 수 있다면 바로 이 그림이라고 생각한 그림이 바로 그 갤러리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또 보면서 마음에 든다고 하니 그녀가 놀라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이냐고 묻네요.
왜 그런가 했더니 화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고요 그러면서 화가에게 그렇게 마음에
들어한 사람이 있었노라고 전달해주겠다고요. 다른 사람들에겐 조금 무거운 느낌이라서 오히려 주목받지
못하는 그림라고 하면서 신기해하네요. 덕분에 이야기를 오래 하면서 제 안에 어떤 벽이 무너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이렇게 해나가는 것이 즐겁다니...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 그렇게 느낀 시간이 벌써 7시 그래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림들이
있어서 그 곳에서 한 번 더 멈춘다음 저녁 먹을 시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빵을 하나 사들고 급하게
지하철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네요. 마치 춤을 추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