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섬진강가 친환경 1번지 심청골 곡성에 정착했습니다.
한국벤처농업대학에서 우연찮게 만났던 곡성군 농업정책과 과장이셨던 김주환 과장님과의 인연이 이곳에 있게 했습니다.
체육행사 때 같은 조에 계셨던 그 분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족구를 하고 나서 지금 농림식품부 1차관으로 가신 민승규 박사님께서 "이박사는 일본에서 족구로 박사를 했나 봅니다"라는 말을 듣고 있는 그 분이 이것 저것을 물어왔습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곡성군 공무원인데 저희 군수님"고현석 전 군수님, 김화중 전 보건복지부 장관님 부군"이께서 이박사님과 같은 젊은 인재를 찾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시면서 저를 곡성군에 초대를 하였습니다. 곡성군 목요포럼에 초청강연을 부탁하여 강연을 하고 있는데 군수님께서 들어오셔서 끝날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계셨습니다. 지금껏 보아 왔던 형식적 행사에 참가하는 그런 지자체 단체장이 아니시더군요. 그리고 군수실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농촌 발전(비전) 프로그램을 설명하는데 그 열정이 너무 대단하셨습니다. 모두가 희망이 없다고 떠나는 농촌에서 희망을 만들고 저와 같은 다음세대에게 그 자리를 넘겨 주는 그런 일꾼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그 말씀에 그냥 마음속에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랐습니다. 더 좋은 초청들을 다 뿌리치고 곡성에 오게 되었던 것은 희망의 농촌, 문화가 숨쉬는 농촌, 더뎌가도 환경이 살아나는 농촌과 올바른 풍토의 조성등의 이야기 속에서 이곳에 희망이 생길거라는 기대감이 더 커졌습니다. 대학시절 지금의 기차마을 역사 소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섬진강과 소나무 숲이 어울리는 이곳 섬진강가에 40중반이 넘으면 들어오겠다고 다짐을 했었는데 7년을 앞당겨 섬진강가에 2006년 3월에 정착했습니다. 곡성 동초등학교 폐교(폐교 된 지 10년)를 임차하여 직원들과 어지럽고 쓰레기 더미로 넘쳐나는 폐교를 청소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군수님께 약속했던 300여 품종을 어렵게 준비 했습니다. 그리고 희망의 씨앗을 만지면서 내 꿈이며 농촌의 희망을 위해 미소를 띄웠습니다. 그러던 2006년 5월에 지자체 단체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저를 초청하신 고 군수님께서 현 군수님이신 조군수님께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 주변에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공무원들은 발길을 거두었습니다. 오직 두 분의 공무원이 찾아오셨습니다. 미안하다고....지금이라도 다시 순천으로 가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제가 그 때 그 분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음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농부가 태풍과 비바람과 혼란이 온다고 뿌린 씨앗을 버리고 도망가는 것 보았습니까? 저는 참 농부가 되겠습니다. 이 자리 약속데로 지켜가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외롭고 고독한 농촌희망지기의 스스로의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은 노력하는 자에게 희망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열정을 가지고 뿌린 씨앗 잘 자라 모내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군과 미실란과의 약속을 지키기위해서 김주환과장님 기술센터 직원들 독려해서 300여 품종 손모네기 함께 하였습니다. 그 의지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을 겁니다. 그것은 신념이 있는 농촌희망지기인 이동현과 참 공무원이 할 수 있었습니다. 벼들은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습니다. 하늘도 감동하셨는지 농약과 화학비료 살포 하지 않아도 잘 자라 여름을 맞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새벽부터 생육조사와 환경생태 조사를 겸할 때 함께 해 준 것은 저희 가족과 반려동반견인 "복돌이"가 함께 하였습니다. 자연은 인간이 과하게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면 꼭 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오염 된 토양은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되어 갔습니다.
이상은 귀농 후 첫 농사를 지었던 2006년 여름까지의 이야기 였습니다.....이어서 가을과 겨울을 적어가렵니다.
2009년 2월 18일 2006년 귀농첫 해 농사짓기를 적어 봅니다. 농촌희망지기 농부 이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