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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남편이 쓴 라면예찬입니다.

| 조회수 : 2,780 | 추천수 : 6
작성일 : 2004-04-23 23:34:18
가끔...아주 가끔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딱이 먹을 게 없어서도 아니고, 다른 맛있는 게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냥, 라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버릴 때가 있습니다.



사실, 마흔이 된 나이엔, 병원만 가면 의사가 그럽죠. 라면 먹지 말라고.

몸이 그러한 데도 라면이 땡(?)깁니다.



어떻게 라면이라는 식품이 생겨났는지는 아직도 설이 구구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라면이 시판된건 1963년 삼양라면이 시작이었으니,

이듬해 태어난 나로서는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라면을 접해온 라면세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생 라면에 대한 추억, 기억 참 많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 겨울에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학교에서 음악선생님을 초빙해서 아주 싼 가격에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방학동안에는 오후 두시쯤 교습시간이 있었는데,

온 가족이 바깥에 나간 시간에 혼자서 점심을 먹어야 했습니다.

마루에 피워놓은 연탄난로. 70년대엔 대부분의 집엔 마루나 안방에 난로가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연탄을 때기 때문에 언제나 물담아 놓은 커다란 주전자가 올려져 있었구요.

그 물을 따라서 냄비를 올려 놓고 물끓을 때까지 기다립니다.

어쩌다 교습시간에 늦을 것 같은 날은 왜그리 물이 더디 끓는지

애꿎은 난로 뚜껑만 자꾸 열어보았습니다.



끓이는데 한 오분 걸렸을까요. 먹는데는 일분도 안걸렸습니다.

그 당시 라면은 좀 양이 적었었나요? 몇 젓가락 휘리릭 하면 벌써 국물만 바닥에 남습니다.

그리고는 부리나케 옷입고 뛰어나갑니다. 바이올린 가방 한 손에 들고.



하지만, 바이올린실에 들어서기전에 몸에서 나는 라면냄새를 지우려고 애를 썼습니다.

따뜻한 밥에 맛난 반찬 먹고 오는 친구들에게 혼자 라면먹고 온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라면이 시판된지 10년, 벌써부터 라면은 가난의 상징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에 한끼를 라면으로 먹으면 부자는 아니었지요.



임춘애였던가요? 아시안 게임에서 중거리 금메달이 확정되는 순간,

온 매스컴에서 떠들어 대던 문장이 "라면 먹고 뛰었다"였습니다.

에이, 그게 뭐 자랑이라고. 그게 또 10년 뒤였습니다.

라면 역사 20년에 라면은 가난한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 위해 먹는 식사아닌 식사였습니다.



괴테는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한다."라고 했답니다.

아마 이를 우리말로 제대로 번역을 한다면,

"눈물에 불은 라면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인생을 알지 못한다."가 되겠죠.



그 뒤로 10년 채 안되었을 때, 결혼했습니다.

아마 혼인서약할 때, 속으로 제가 이랬을 것 같습니다.

"평생 라면은 안 먹게 해줄께...."

틀림없이 못지킬 약속이었겠죠.



그런데, 1주년 결혼기념일에는

근사한 외식, 한아름 가득히 안개꽃에 파묻힌 장미다발,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촛불 하나 밝힌 결혼기념 케익 위로 건네준,

"사랑해"라고 쓴 선물꾸러미.....


그러나
이런건 해주지도 못하고 오히려

둘이서 1년 동안 모은 양초들을 사이에 두고

라면을 끓여 먹었더랬습니다.



그당시 아내가 썼다 버린 글에는 이런 글이 남아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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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나는 긴 연애 끝에 작년 가을 결혼을 했다.

그이는 아직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친정과 시댁식구들은 어떻게 살것인가를 우리 둘 보다 더욱 걱정이셨지만,

우리는 "어쨌든 둘 중에 하나는 돈을 버니까 걱정마시고 결혼만 시켜주세요"라고

거의 때를 쓰다시피해서 우리의 결혼 생활은 시작됐다.

그이는 총각때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런 그이가 믿음직스럽고,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을 병행해야하는 힘겨움은

오히려 보람이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콩나물국, 미역국,....



모든 요리는 내 생애 처음 해보는 것들이었고, 그저 정성만 가득할 뿐인 식탁으로

그이를 대접할 수 밖에 없었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맛있다" "최고야"라는

찬사를 받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풋내기 새댁 시절이 막 1년이 되어갈 때쯤,

우리의 첫 보금자리의 전세계약이 만기가 되었다.

우리는 1년만에 다시 신혼여행을 가자면서 짐을 꾸려서 유난히 고물스럽던 트럭에

살림살이를 싣고서 남편학교가 가까운 봉천동 언덕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이사를 도우러 오셨던 친정어머니는 " 너는 지하실방을 얻고서도 몰랐단 말이냐?"  
너무 기막혀 하시며 눈물을 훔치셨다.

입구가 지하가 아니였으므로 반지하라는 것을 몰랐지만,
우리돈으로는 그 집도  좋다고 생각되었으니...
참 바보다.  어머니께 죄송할뿐.....


"생활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괜시리 서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라는 것이 마음 든든하기만 한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으리라.

우리의 작은 집에 작은 살림을 이리 놓고 저리 놓고.
뚝딱거리면서 우리의 첫번째 결혼 기념일 저녁이 되어 버렸다.



아차차.

우리의 첫번째 결혼기념일에 대한 기대가 어수선하고 썰렁하기만 한

이삿짐 꾸러미 속에서 쭈그러들고 있었다. 늦가을의 어둠은 자꾸 짙어만 가고

이제는 정말 서러운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가 싶을 때에

남편은 구석구석에서 촛불을 찾아 들고, 우리의 작은 식탁을 대강 치우더니

구색도 맞지 않는 크고 작은 촛불 앞에서

"축하해,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라며 '배고프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배고프다는 신랑에게 주변머리없는 아내가 내올 수 있는

음식이라곤 가난한 "라면" 밖에 없었다.



높고 낮은 촛불 앞에서 분위기 있게 라면을 먹으면서도

변함없이 "맛있지? 정말 맛있다."라는 라면예찬을 잊지 않던 그이와 나는

우리의 첫 기념일과 라면얘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자고 약속했다.



남들이 따라하면 재미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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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아주 가끔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김혜경
    '04.4.23 11:49 PM

    홈페이지 들어가봤습니다. 우먼센스에서 보고 아주 부러워했던 그 집의 주인이시더군요...한번 놀러가도 될까요?

  • 2. 집이야기
    '04.4.23 11:52 PM

    와~ 영광입니다. 왜 이렇게 가슴이 뛸까요. 꼭 뵙고 싶네요. 빨리요 ^ ^

  • 3. 꾸득꾸득
    '04.4.24 12:03 AM

    아름다운 라면예찬인것 같아요...^^
    아,,얼마전 까지만해도 그곳 가까이 살았지만 지금은 넘 멀어 아쉽네요..
    저두 가보고 싶은데....

  • 4. 여니쌤
    '04.4.24 12:03 AM

    홈피가 멋지네요..
    즐겨찾기 추가입니다..^^

  • 5. Ranhee
    '04.4.24 1:25 AM

    전 아직도 라면먹고 사는 가난한 유학생인데요...
    저흰 라면 먹으면서도 한번도 슬퍼본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글 읽다보니 괜히 마음이 짠...하네요.

    히히, 사실 이동네는 라면도 비싸서 그것도 아껴먹어요.
    라면 하나에 80센트 그러니까...천원쯤 하거든요.
    그래서 일본라면에다 김치넣어서 한국 라면 비슷하게 만들어서 먹기도 하고 그러죠....

    집이야기님의 글 읽으면서 그냥 행복해졌습니다.
    나이들어 가난한 것도 늦게까지 공부하는 덕이잖아요.
    남들보다 좀 늦게 돈벌게 되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감사할 이유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홈피 들어가봤는데, 제 컴퓨터랑은 뭐가 잘 안맞는지 계속 에러가 나는군요.
    나중에 또 들어가봐야겠어요.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 6. 집이야기
    '04.4.24 7:41 AM

    꾸득꾸득님, 여니쌤님, 고맙습니다.
    란희님 화이팅 ! 라면 화이팅!
    10년 전에 잠깐 영국에 살았을 때 그 동네는 밍밍한 일본 라면만 있어서리...
    화끈한 신라면 무지하게 그리워하던 때도 있었지요.
    라면은 역시 한국라면 따봉입니다.
    Ranhee님 말씀처럼 고생 없이는 행복도 없습니다.
    행복하소서 !!!

  • 7. 핫코코아
    '04.4.24 9:20 AM

    아..글들이 다 주옥같아서 읽고 또 읽고 했는데 덧글들을 보니 홈페이지가 있나봐요
    저도 얼른 들어가서 구경하고 오겠습니다
    남편분도 아내분도 너무나 멋진 ..
    감동스런 아침을 맞이하게 해주신 집이야기님 ..영원히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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