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빠와 헤어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내 마음이 무슨 마음인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일상은 공장 컨베이어 벨트처럼 잘 돌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비바람에 나뭇가지 사이를 헤집는 까만 비닐봉다리처럼 갈피를 못잡고 펄럭였어요.
<오랜 친구와 여행가서 아무것도 안하기 했어요... 아침상>
그런데 생각 한 줄기가 송곳처럼 마음을 찔렀어요.
이번 상실은 그냥 보내선 안돼.
어릴 적 엄마와 헤어질 때 비현실성에 압도되어 울지도 못했지.
그 후 몇십년을 딱딱하게 석회하된 마음 이고지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했니.(나와 내 가까운 사람 모두)
가슴을 아무리 쳐도 밤고구마 세 개가 늘 가슴 한복판을 막고 있는 듯 울어도 울어지지 않았잖아.
이번만큼은 제 때 제대로 슬퍼해보자. 나를 위해서.
<소나무와 하늘이 있는 도서관 자리-이자리에서 졸기도 울기도 많이 했어요>
내게 가장 익숙한 도서관, 솔나무와 햇빛이 있는 창가에 앉아 죽음에 관한 책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나를 위해 울어주는 듯한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나도 그들을 위해 울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1인석 소파가 띄엄띄엄이라 조용한 눈물에 손수건이면 됐어요.
그렇게 감정의 빗장을 겨우 열었어요.
<막내가 좋아하는 열무김치를 담갔어요. 망했..>
<송편은 집앞에서 샀고>
<추석때 친한 친구 부부가 와서 일상다반사(茶飯事)를 나눴어요>
아빠 건강하실 땐 같이 대화도 여행도 가본적이 없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좋은 시간은 쓴 바 없이 다 바람에 휘발되었고, 게으른 자는 해질녁에 바쁘다던데 딱 그짝이었죠. 지난 몇십년간 못해봤던 것을 몇 달 동안 속성으로 해치웠어요.
죽음이 얼마나 우리 삶을 강렬하고 날카롭게 관통하며
흩어질뻔한 조각의 중앙을 꼬치처럼 줄줄 꿰주던지요.
<이 시간을 함께 보내준 가족에게 고마워 다녀온 근거리 여행>
어릴 때, 아빠가
뒤로 나를 불러내 먹이고 돈을 몰래 쥐어 주며
너, 나 없으면 고아야..라고 하시며
자조적인 듯, 나를 불쌍해하는 듯 알 수 없이 웃으셨는데
그 사랑이 나에겐 도둑 아빠가 훔쳐온 빵과 같았네요.
매번 허기가 나를 이겨서 허겁지겁 몰래 목구멍에 쑤셔넣을 수 밖에 없지만
그 빵은 내 허기를 더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여전히 배고픈 내 자신이 얼마나 수치스러웠는지 몰라요.
아빠를 싫어해야 할지 고마워 해야 할지도 몰랐지요.
그런 아빠가 저는 필요했지만 동시에 싫었거든요.
저는 아픈 아빠의 곁에 있을 때 그런 과거의 나를
하나씩 차례로 다 만났습니다.
<도서관 다닐때 가볍게 샌드위치 도시락으로>
병실에 있다가 지치면 나와서 이어폰을 꽂고
박완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마음을 달랬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가까운 사람을 혐오하고,
밉살스럽게 행동할 때
내가 인간성 꼴찌를 면한 것처럼 반가웠어요.
아 다행이다. 나만 못된게 아니어서.
<도시락 도시락 도시락>
아빠를 보내드리고 오니 계절이 바뀌었어요.
저는 곧 일상으로 돌아왔고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다시 착착 돌아갑니다.
여전히 저는 잘 웃고, 마녀처럼 잔소리하며 살지만
내 마음에 물에 젖은 솜이 켜켜이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시간, 예상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 솜 위에 누름돌을 살짝 얹으면
물기가 주르륵 새어나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많이 씻어냈어요
가족도 친구도 아무도 몰래요.
아빠에 대한 그리움 보다는 내 인생에 대한 애도가 컸던 것 같습니다.
주어졌으나 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요.
사람 겉으로만 보고 마음이 어떨거라고 짐작하는거 아니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마음의 가닥이 오래된 셀룰라이트처럼 엉겨있어
누군가와 나눌 수도 없어 혼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예전엔 내가 잊혀진 존재가 될까봐 초조했는데
이젠 어느때보다 혼자의 시간이 나를 채워준다고 느껴요.
<큰딸과 시간 보내려고 아이 입맛대로 먹은 마라탕. >
<아침 동무 메리와의 가을산책..잔등의 꽃이 예뻐서>
아빠가 가시면 더 홀가분하고 더 자유롭기만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징검다리의 가장 넓직한 돌 한 개가 사라져
어떻게 개울을 건너야 할까 주저하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무기력과 무망이 커다란 바람덩어리가 되어 내 가슴을 짓누를때도 있죠.
그래도 저는 이전보다 더 잘살고 있는 것 같아요.
<어제 저녁. 만만한 오볶>
생노병사와 희노애락,
모든 때가 아름답다는 성경의 말씀을 진하게 체험했습니다.
내가 지나온 모든 슬픔과 원망 고통의 순간이 쾌락과 행복만큼이나 소중합니다.
아빠가 남기신
‘사랑하는 우리 딸’이란 말과,
죽음을 통해 배운
‘지금, 여기서 사랑하며 살기’란 진실을
잊지 않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