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서 문득 내 시선을 끄는 제목의 책이 보였다.
“말을 듣지 않는 남자,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이거야말로 나의 이야기가 아닌가!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그것은 남편이 내게 첨 준 타박이였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신혼을 시작한 우리는 새 집을 구한다,시내를 구경한다,하며 같이 여기저기를 다녔는데 미국 생활에 익숙한 남편이야 어딜 가든 지도를 보며 척척 잘 다녔다.
한데 나는 거의 무대뽀 정신에 입각,일단 헤매면서 무작정 다니는 스타일이였으니......
전혀 지도로 길을 익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길 이름이 참으로 명쾌히 잘 되어 있는 미국에서도 처음엔 지도를 제대로 보며 다니지를 않았다.
여행을 다녀도 옆에서 지도를 봐 주기는커녕 옆에서 어느 샌가 자 버리는 통에 강렬한 햇빛을 걱정하는 남편이 늘 지도로 나를 덮어 주는 정도로만 나에게 쓸모 있었다고 할까......
필리핀에서는 당연히 지도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2년 반 동안 운전을 전혀 하지 않았다.
외국인은 무조건 ‘봉’이라는 필리핀에서 길을 모르는 상태로 운전을 하는 것은 참 위험했기 때문이다.
데리고 다니는 어린 딸아이가 있고 임신 중이기도 해서 험한 도로에 주차를 하기 힘든 장소가 대부분인 그 곳에서 운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운전사가 있으니 남의 도움 필요 없이 가고 싶은 곳을 맘대로 찾아 다닐 수 있어 그곳 생활에 적응하기는 좀더 쉬운 장점도 있었고 또 운전사는 가끔 일종의 보디 가드역도 해 주었다.
(운전사,멋지게만 생각되는가?물론 여기엔 당연히 다른 비화가 쏠쏠하다.편한 댓가로 치루어야 하는 것들이라고 해야할까)
자,네덜란드.
여기서도 도착 당시 암스텔담이며,헤이그 지도를 받아 보았는데 드디어 혼자 쏠쏠히 다니기 시작해서 눈에 익지 않은 더치어를 더듬거리며 찾기가 쉽지는 않았다.
웬 길 이름이 긴 것이 그리 많은지......
또한 발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들 투성이니......
내 멋대로 영어 발음 그대로 앞 부분만 대충 외워 다녔다.
하지만 다니다보니,다닌 곳을 지도에 표시 해 보며 눈 여겨 봐두니까 길 이름의 접미사가 착착 구분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재미있다는 생각에 네덜란드 번역기(www.kordut.be)에서 그 접미사의 뜻이 뭔지 찾아 보기도 했다.
이제는 제법 지도를 보는 눈이 어느샌가 생겨서 나 혼자서 지도를 펼쳐 들고 대담히 먼 곳도 잘도 다니고 있다.
plein(plaza),straat(street),laan(avenue),weg(way),land(land),kade(platform)......
주로 사람 이름이 붙은 곳이 많은데 재미난 것은 이들 역사에 있을 왕가의 이름이 붙은 것은 이해 하겠지만 (prins,prinse로 시작되는 이름이 붙은 길들이 많다) kennedy president laan이 있다는 사실이다.
또 네덜란드의 유명한 철학자들의 이름 erasmus laan,spinoza laan......
음악가 이름 mozart laan,beethoven laan,chopin straat,verdi straat,toskanini straat,debussy straat,rossini laan,louis Amstrong kade,Melodie straat.....
꽃 이름 iris straat,rozen straat,hycinth straat,orchidee straat,begonia straat......
재미있는 것으로는 monsterse laan,sport laan도 있다.
또한 많은 길들 앞에는 van alkemadelaan 이런 식으로 van이 붙은 길들이 있는데 옛날 귀족들에게 붙인 호칭으로 나는 알고 있다.
물론 내가 헤이그에 살기 때문에 헤이그 지도만을 자세히 봐서 다른 곳과 비교까진 못하고 있지만 더치어를 알면 나름대로 참 재미있고 유익한 사실을 많이 알 수 있을텐데 참 유감스럽다는 생각이다.
하긴 언어만 제대로 안다면 어디어느 곳을 가든 자신있고 멋지지않을까.생각해본다.
외국인이라는 장애도 없앨 수 있고.....
다행이도 여기 네덜란드는 도로 표지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찾아 다니기가 쉽다.
도로 표지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사실 외국에서보다 한국에서 그 도로 표지판을 이해 못 해 더 황당했던 때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게 무슨 아이러니람.
남편도 늘 한국서 투덜거린 것 중의 하나가 도대체 왜 저렇게 도로를 설명해 놨는지 또 따라 가다 보면 아예 표시가 갑자기 없어지는 바람에 헤매는 경우도 허다했었다.
나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도대체 길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해 못할 도로 표지판이 많아서 누가 저렇게 적도록 했는지 정말 궁금했었다.
우리 나라 체류 외국인들의 큰 불만이 바로 저 도로 표지판이라던데......
남의 나라에서 살다보니 외국인으로 당하는 언어와 문화의 서러움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탓 할 필요도 없는 것이 우리나라 역시 외국인에게 주는 불공평함이 심함을 떠올리면 된다.
가장 이상한 것은 길을 잃어 지도를 펴 보이며 지나가는 이에게 길을 물어 보면 어쩌면 하나같이 다들 제대로 가르쳐 준 일이 없다.
물론 워낙 외국인이 많은 탓에 내가 운없게 이민자들을 골랐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간혹 잘못 걸리면 역시 길을 알지 못하는데도 무려 5분 이상 지도를 들고 애쓰는 너무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을 만날 때도 있다.
그렇게 몇 번 겪고나니 더 이상 길을 헤메더라도 물어 볼 마음이 사라졌고 되도록이면 경찰을 찾게 되었다.
이곳은 여기저기에 경찰소가 꽤 많은데다 순찰하는 경찰들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계속 같은 길을 빙빙 도는 듯해 급한 마음에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 중인 경찰을 불러 세웠다.아주 간략히 설명을 하고 내가 제대로 출발하는지 지켜보는 경찰에게 쌀쌀맞네,는 서운함도 가질밖에.
바쁘지 않으면 따라 오라고 길을 안내해줘도 고마우련만....
이제 제법 지도 보는 법을 익힌 덕에 지도 보는 일도 하나의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알지 못하는 곳에 대한 새로운 지각이랄까.
또한 내가 있는 곳을 제대로 안다는 것으로 어쩌면 내 존재감을 새삼 실감한다고 할까.
지도를 보면서 또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인생이란 지도를 과연 나는 얼마나 크게 펼치며 사는 걸까.
어디에 내가 있는지 또 어느 곳을 지나다니며 사는지 또 얼마나 모르는 다른 곳이 있는지 나는 알고 있는 걸까.
내 인생의 지도가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
그보다 인생이란 지도를 제대로 보고나 있는건지.
오늘도 큰지도를 펼치고는 제대로 깔끔히 접지 못하고 두리뭉실 두텁게 놔두었는데 이건......
지도를 관리하지 못하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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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
Beauty 조회수 : 1,033
작성일 : 2004-09-29 04:45:26
IP : 81.205.xxx.243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김세연
'04.9.29 2:09 PM (61.252.xxx.197)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저도 미국서 무대뽀 정신으로 버스를 타며 도시 구석 구석을 헤매고 다녔던 적 있죠. 덕분에 갱한테 총 맞고 죽으려나고 아주버님한테 디따 혼난적 있습니다.
즐 지도~^^*2. ...
'04.9.29 2:47 PM (211.209.xxx.154)글이 너무 좋네요..
감동이에요..
(특히 마지막 부분)
전 외국 여행 나갈때마다 기분은 좋은데.
왠지 두렵고 떨렸거든요..
남의 나라까지가서 적응하면서 자리잡고 사는 사람들 보면..
참 대단하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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