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외갓집에 가면 미국말로 쏼라쏼라 써있는 그림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아니 그림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두꺼운, 베고 자면 딱 좋을 두께였다고 할까요?
암튼 그 그림책의 앞쪽에는 쭉쭉빵빵한 아줌마들이 벼라별 이쁜 옷들을 다 입고 서있고,
조금 더 넘기면, 근육질의 아저씨들, 전 개인적으로 근육질의 남자 되게 싫어합니다, 그 아저씨들도 멋진 옷을 입고 있고...
이렇게 한참 넘기다 보면,
제 눈이 고정되어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그런 사진들이 나옵니다.
분명 인형이 아니라 어린이임에 분명한데, 그 아이가 갖고 놀고있는 건 거의 그 아이 키 높이의 싱크대, 가스오븐, 뭐 이런거 였습니다.
정말 '그림책 탐험, 신비의 세계' 였다고나 할까요?
짐작하시죠? 그 책이 뭐 였는지...시어스 로벅인지 하는 회사의 통신판매 카달로그였대요, 나중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니. 그때가 1960년 무렵인데...그럼 미국이라는 나라의 통신판매역사는??
그건 중요하지 않고,지금 생각해보니 저를 현혹시켰던 그 장난감들이 지금으로 치면 리틀타익스의 장난감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제 딸아이를 키울때도 리틀타익스 장난감을 사줘보지 못했어요.
다만 미니어처로 만든 목욕놀이세트, 전기프라이팬놀이세트( 전기프라이팬에 물을 조금 붓고 누르면 물이 자글자글거리는...)같은건, 옛날 생각이 나서 참 잘 사줬는데...울 딸 기억할 지 모르겠어요.
둘.
초등학교 2학년 땐가, 갈월동에 살다가 상도동으로 이사하게 됐어요.
울 엄마 아버지의 지론, 전학은 절대 안된다였어요.
그래서 오빠랑 저랑 둘이서 버스를 타고 후암동에 있는 학교를 줄기차게 다녔는데...
그러다보니 하학해서 집으로 가면 동네에 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늘 혼자서 놀았어요. 외롭게.
아니면 의자 뒤집어 놓고 "띵요 띵요"하는 소리를 내며 전쟁놀이하는 오빠랑 남동생이랑 놀아야 하는데 이때는 겨우 간호병이나 시켜줬거든요.
그때 온갖 소꼽장을 다 모아서 혼자서 엄마도 됐다가, 아이도 됐다가...하며 놀았는데...
엄마가 보시기에는 여덟살이나 먹은 아이의 놀이로 적당치 않다고 생각하셨는지, 그걸 볼 때마다 뭐라 하셔서 하는 수 없이 제 보물, 그 소꼽장 바구니를 마루 밑에 숨겨두고, 엄마의 감시가 소홀할 때만 꺼내서 놀곤 했습니다.
상도동에서 한 2년 살았나, 아버지의 전근으로 이사를 하게 됐는데...
이사를 하고 와서 보니 제가 그만 그 보물 보따리를 놓고 온거였어요. 흑흑...
엄마 모르게 얼마나 슬퍼했는지, 아마 통곡도 했을 거에요.
오죽하면 혼자서 찾으러가봐? 하는 생각까지 했었어요.
지금도 그 소꼽바구니가 눈앞에 선해서 구멍이 숭숭 뚫린 분홍바구니 안에, 몇세트씩이나 사서 모은 플라스틱 소꼽과 소꼽장난에 어울릴 각종 소품들...

며칠전 선물을 받았습니다.
하하하...소꼽장이요...
이걸 제게 선물한 사람의 뜻은 잘 모르겠어요.
촬영용 소품으로 쓸만한 물건이니까 소품으로 쓰라는 뜻인지...
아니면 낼 모레면 ○살(정말 이 단어만은 안쓰고 싶어요)이 될 여자지만 하도 철이 없으니까 소꼽을 갖고 놀라는 뜻인지...
그 진의를 파악이 아직 되지 않고 있으나, 아니 뭐 파악하고 싶은 생각도 없구요.
왜냐면 너무 맘에 드니까...
편수 냄비 1개, 양수 냄비 2개, 프라이팬과 뒤지개 국자 등등으로 구성된 소꼽인데, 그래봬도 재질이 스테인리스에요. 냄비들의 지름이 11.5㎝. 같이 있는 냄비가 저희 집에서 가장 작은 냄비, 지금이 19㎝되는 냄비에요. 깜찍하죠??
어려서 통신판매 카달로그에서 본듯 싶기도 한 그런 소꼽장이에요.
이걸 받고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 것 같으세요...
좋아서 입이 귀에 걸렸었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이거 만화에, 소꼽장에..., 2004년은 '回春의 해'인가 봅니다.
P.S.
그동안 많이 불편하셨죠?
당분간도 다소 불편하실 거에요, 서버 교체가 이런거라고 하네요. 용량이 엄청 늘어나 클릭하자마자 화면이 좌악 뜨는 건 줄 알았더니, 서버가 안정이 될때까지 당분간은 이럴거라고 하네요.
죄송해요. 특히 맑음님의 사진들, ido님의 주옥같은 글, orange님의 치즈만드는 법 등 증발한 글들 때문에 너무너무 속상하고, 죄송해요. 다시 올려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