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조금 뒤쳐지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에 비해서 ) 그런 화가로 생각되어
확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런 저런 책을 읽다보니
그에 관해서 묘하게 흥미가 생겨서 그림을 뒤적거리게 되네요. 더구나 목요일 미술시간에 다니엘 아라스의
글을 통해서 만나는 라파엘로도 제가 알고 있던 그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목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와서 브람스의 바이올린,호른 그리고 피아노를 위한 트리오를 켜놓고
호른 소리에 귀기울이기도 하다가 세 악기의 조화속으로 끌려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고 한참 쉬고 나니
라파엘로 그림을 찾아보고 싶어지는군요.

오늘 찾아본 싸이트에서는 그의 소묘를 여러 점 만날 수 있었습니다.
완성된 작품도 좋지만 소묘는 그의 밑그림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한 화가의 원점을 들여다보는
묘미를 준다고 할까요?


아테네에서 설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라고 하네요. 어린 시절 성경책을 읽으면서 사도 바울에게 끌리던
때가 생각납니다.그 때 저는 그렇게 강렬하게 이상에 불타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도
마다 하지 않는 강렬한 인간들에게 매력을 느끼곤 했지요. 그래서 그에 비하면 베드로는 뭔가 조금 모자란 듯
생각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할까요?

그렇다고 그런 인물이 싫다거나 좋다거나 이렇게 딱 잘라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고요, 인간의 약함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시선이 간다고 할까요?

과연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른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도 생기고, 내가 옳다고 믿고
실천했던 일들이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을 경우 나는 어떻게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생기면서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니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간에 어떻게 소통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목요일에 읽는 책에서 기억술에 관한 이야기가 여러 번에 걸쳐 언급이 되더군요. 기억술이 과연 그럻게
중요했을까? 그런 의문을 품고 있다가 책장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책을 한 권 만났습니다.
제가 발견했다기 보다는 마리포사님이 자신의 발제 차례에 도움이 될 책을 뒤적이다가 만난 책을 제게
소개해준 덕분에 아, 이 책 내게도 있었는데 읽다가 지루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기도 하는지 몰라서
일찌감치 접었던 책이네요, 그러면서 책장을 다시 뒤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중세에 관한 그 책이 다시 읽는
도중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감탄하면서 읽게 되는 겁니다.
왜 이렇게 그 책이 지루했을꼬 생각해보니 철학에 관한 배경 지식이 없었던 시절, 도대체 저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따라잡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어렵고 불편한 것을 참기 힘드니 뭐야? 무슨 글을 이렇게 이상하게 쓴
거지? 저자를 탓하면서 슬며시 도망친 기억이 떠올라서 쓴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그 책에서도 기억술에 관한 것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고, 그 다음날 교보문고에서 책을 고르다가
만난 다른 책에서도 프란츠 예이츠의 기억술에 관한 글이 떠 나오는 겁니다. 아니 여기에도?
그 자리에 서서 읽으면서 눈이 같은 눈이 아니로구나, 사전에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과연 이 책의 이 장이
눈에 들어왔을 것인가 싶어서요.


기억술과는 다른 문제이지만 월요일 프랑스어문반의 철학 책 읽기 시간에 여러 차례 프로이트가 인용되는
중이라 인간의 기억과 기억을 억압하거나 왜곡하는 기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과연 인간은 온전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되고요.


비교를 통하지 않고 오로지 라파엘로의 소묘에 집중해서 본 날, 라파엘로를 새롭게 느낀 기분이네요.
밀라노에서 그의 소묘와 제대로 만나기 위해서 조금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니 그냥 마음으로 만나고 나서 돌아와서 공부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일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아무튼
새롭게 라파엘로를 느낀 날, 함께 귀로 들은 호른 소리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