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돌리느라 금요일에 구해온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에서 2006년 공연한 음반실황을 들었습니다.
제겐 2010년 1월하면 슈만과 제대로 만나기 시작한 달이라고 기억하게 될 것 같네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아르헤르치가 협연하고,교향곡도 슈만곡인 그런 음반을 구하게 된 것은
역시 그 날의 연주회에서 들은 슈만의 교향곡덕분이겠지요?
우리가 이름으로만 알거나 스쳐지나가면서 듣는 음악은 무수히 많지만 어라,이 음악과 처음 만난 것 같아라고
정색하고 달라들어서 듣게 되는 날,이미 그 음악은 그저 그런 곡이 아니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는 것,그것을 수없이 오랜 세월 음악을 들으면서 아주 가끔씩 그런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축복을 경험하기 위해서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일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음악중에서 라벨곡이 하나 들어있었는데요 CARNIVAL이 아니라 제목이 carnaval이더라고요.
뭐지? 궁금한 순간 처음으로 보람이 방에 있는 불어사전을 뒤적여보았습니다.내친 김에 marche까지
이것도 역시 기념할 만한 순간인데요 제겐,언어공부에 있어서 첫발은 과연 그 언어에 대해서 사전까지
겸비하고 공부하고 싶은가,아닌가가 제겐 하나의 척도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불어사전을 마루에
들고나와서 일부러 음악의 제목을 알고 싶어서 찾아보았다는 것은 하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사실은 토요일 오전에 다른 일을 하면서 이 음반을 들었엇는데 그 때는 집중해서 들을 형편이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실례란 생각에 오늘 아침에는 일부러 음악에만 집중을 했는데 덕분에 이런 즐거움을 누려서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불어사전을 들고 나올 생각을 한 것이겠고,그래서 역시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하나가
생기는 것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요,그렇게 하고 나서 바탕화면에 퐁뒤가르 사진을 올려놓고
오늘은 그 이야기를 기록해보려고 줌인줌아웃에 들어오니 노니님이 시슬리와 피사로를 생각하면서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네요.아하,그렇다면 다시 마음이 바뀌어 퐁뒤가르는 뒤로 미루고 나도 시슬리와 피사로를
찾아보고 싶어집니다.이런 교류가 참 재미있네요.


퐁텐블로 숲의 안과 밖을 그린 그림이라고 하네요.퐁텐블로숲 막연히 이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공부를 하다보니 퐁텐블로파라고 프랑수아 1세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관심을 갖고
화가들을 데려오기도 하고,그 화가들의 소문을 듣고 프랑스로 몰려온 사람들도 있어서
프랑스 회화사는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퐁텐블로파로부터 비롯된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런 선지식으로 인해 르부르박물관에 갔을 때 조금 신경써서 그들의 그림을 찾아서 볼 수 있었습니다.

모네가 부인 까미유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순간순간 변하는 그녀의 육체를 그림에 담았듯이
시슬리도 당시에 홍수가 나면 그 상황의 변화를 화폭에 담았더군요.
처음 그런 그림을 보거나 기록을 읽을 때 당황했습니다.그럴 수 있을까?
그러다가 다시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그것을 윤리적인 잣대로 재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한마디로 옳다,그르다를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것이 갈수록 헛갈린다는 것,그래서 나이는 우리에게 잣대를 여러개 준비하도록 하거나 아예 정해진
어떤 잣대를 버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결정을 미루거나 결정을 못하는 이상한 상황으로
몰고 가는 것일까요?

이 그림은 노니님의 사진에 대한 응답으로 고른 것입니다.

피사로는 세잔의 아뜰리에에 갔을 때도 이야기가 나왔던 화가인데요,괴팍하다는 느낌을 주었던 세잔에게도
피사로는 마치 아버지처럼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고 하더군요.
사회주의적 이상을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피사로는 재능이 뛰어난 화가여서 미술사를 크게 장식하는 그런
화가는 아니라해도 주변 화가들에게 의지가 되고 그들의 재능을 자극하고 좌절하고 있던 화가들에게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주었다고 합니다.그래서 한동안은 세잔이 피사로가 그림 그리는 곳으로 가서
살면서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는 일화를 들으면서 인간의 다양한 역할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도 했던
시간이 기억납니다.


어느 봄 날 아침의 뛸리리 정원입니다.
오랑주리 가던 길에 만난 정원의 풍광이 마음속을 스치면서 이 그림을 다시 바라보게 되는군요.그것이
여행이 주는 선물중의 하나겠지요?

이 작품은 수채화로군요.오랫만에 만난 수채화가 반가워서 한참 들여다보고 있는 중입니다.
피사로를 찾던 중에 재미있는 전시와 설명이 있어서 올려놓습니다.
Cezanne and Pissarro’s dialogue about art was most fully articulated on the canvases they painted. Each had a unique syntax and vocabulary for the careful building of their paintings and arguments. While their subjects were often similar or even on occasion identical, their means for describing these scenes were quite different. The paintings selected for this study were subjected to close visual and technical examinations, bringing key differences forward and elaborating on the dynamic dialogue in which these two artists engaged over several decades.
두 사람사이의 예술에 관한 대화는 캔버스에 가장 잘 드러나있는데 소재는 상당히 비슷하지만 그것을 위한 수단은상당히 다르다는 것,그래서 전시에서는 그들이 얼마나 다른가를 수십년에 걸쳐서 두 사람이 그린 그림을 전시해서 보여준다는 취지의 전시회가 있었네요.
노니님 사진덕분에 귀한 전시를 사이버상에서 만나게 된 것,오늘의 선물이네요.제겐


어느 작품이 피사로이고 어느 작품이 세잔인지 구별이 가나요?


노니님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이런 식의 교류가 가능하면 훨씬 풍부한 글쓰기만이 아니라 다채로운 일상의
확산이 가능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