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산책을 나갔다가 잠시 쉬면서 빌라도의 아내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책들을 함께 읽느라 한 번에 확 읽지 못해서 덕분에 세세한 부분까지 눈여겨 볼 수 있게
되는 장점도 있으니 이런 방식도 좋은가,아니 소설에의 몰입을 조금은 방해하는 것이 아닌가?
안에서 목소리들끼리 대화가 한창이로군요.
집에 와서 기돈 크레머가 연주하는 바흐의 파르티타를 틀어놓고 뜨거운 커피 한 잔 타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당연히 손이 가는 것은 모로의 그림인데요,살로메 그림을 보러 들어왔다가 귀한 그림 한 점을 만났으니
우선 그 작품부터 보고 싶네요.
한국에서는 지오토라고도 조토라고도 번역이 되는 피렌체 화가인데요,그가 어린 시절 치마부에란 화가에게
발탁된 이야기,아마 이야기에 더 가까운 것이겠지만,가 전승되어 오고 있는데 그 장면을 그린 모양입니다.
유대총독으로 임명된 빌라도가 그 지역에 갔을때 유대인들이 서로 갈라져서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신을 믿고 있었다고 하더군요.그 당시 유대인의 왕 노릇을 한 사람이 헤롯 안티파스인데
그의 아내 헤로디아는 전 남편의 딸 살로메와 함께 궁전으로 왔다고요.
팜므 파탈하면 꼭 언급되는 그녀 (그런데 팜므 파탈이란 명칭을 누가 붙인 것인가,누구의 시각으로 그것을
볼 것인가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겠지요?)살로메가 연회에서 춤을 춘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들어주겠노라고 헤롯이 장담을 합니다.
많은 화가들이 살로메의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겼지만 오늘 찾아보고 싶어진 화가는 구스타프 모로입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귓속말로 이런 결정에 동의하지만 사실 그 전후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우리들은 알 턱이 없지요.다만 소설가들이나 화가들,아니면
작곡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들만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는 것인데
그것을 만날지 말지 정하는 것도 역시 우리의 몫입니다,그래도 가끔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그것이 우리를 뒤바꾸는 수도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예술은 일종의 기습이라고
가끔은 우리의 인생을 바꾸는 기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살로메에 한정해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감옥에 간 살로메라고 제목이 되어 있네요.이 그림을 보니 오래전 웬디 수녀가 이 그림을 소개하면서
감옥에 찾아간 살로메에게 세례자 요한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그 이야기가 차원이 서로 다른 것이라
살로메에겐 이해가 어렵고 결국 자신을 거절한 것으로 받아들인 살로메가 마음속의 원한으로
쉽게 어머니의 청을 수락한 것은 아닐까,그런 식으로 서로 이해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있습니다,아마 그 때 그 이야기는 제가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건드려서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모로는 무엇에 끌려 이렇게 많은 살로메를 그렸을까요?
화가로서 보다는 좋은 스승으로,제자들에게 자신을 모방하지 말고 스스로의 그림을 그리라고 격려해서
기량있는 많은 화가를 배충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모로,아마 그림이 그다지 끌리지 않아서
이제까지는 멀찍이 밀어두고 있었던 화가인데,어쩐지 오늘 그의 그림이 마음을 잡아당기는 것을 보니
이제 드디어 그를 화가로서 만날 준비가 된 모양이구나,혼자서 웃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가 무르익어야 만나게 되는 것들이 있지요.사람도,그림도,그리고 음악도
그리고 하고 싶은 일들,해야 할 일들도,그래서 조금은 느슨하게 마음을 풀고 기다리는 힘을 기르는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 날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