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말 스페인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끝난 여행이 너무 아쉽고
그 길을 내내 인도해준 가이드와의 여행이 좋아서
내년에는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하여 프랑스 남부를 함깨
하자고 여럿이서 약속을 했습니다.
후앙 미로의 미술관,가우디의 건축물,그리고 타피에스의 그림들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조금 더 거리를 돌아다녀보고 싶다고
가능하면 빌바오 구겐하임에도 가보고 싶다고 생각을 했지요.
운전을 못하는 저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프랑스 남부를
그 곳 지리를 잘 아는 가이드와 함께라면 마음으로만
품어온 마티스의 후기작품을 보러 (그가 장식한 조그만
성당이라고 해야 하나,작은 교회라고 해야 하나 방스에 있는
그 곳에도 가보고) 샤갈의 흔적을 찾아서 ,그리고 로마의
흔적들,마지막으로 고흐가 살았던 곳까지
그런 꿈을 품고 올 여름까지 준비를 하는 동안 행복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면서 정작 인원을 확정하고 일정을 짤 때가
되자 함께 하기로 한 사람들중에서 그 곳에 가는 일이 어렵다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그 여행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하게 되었지요.
많이 아쉬웠지만 언젠가 기회가 생기겠지,그렇게 위로를
하면서 그렇다면 도쿄에 가서 그림을 보고,그 주변의
가마쿠라,닛코등으로 가서 일본역사속의 시대를 돌아보자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는 한동안 일본사에 관한 책을 부지런히
찾아읽었습니다.
일본사뿐만 아니라,사람들이 쓴 여행기도 찾아읽고
인터넷상에서 그 곳의 박물관,미술관에 들어가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검색을 해나가기도 했지요.
물론 비행기표도 가예약을 다 한 상태고 숙소만 정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환율이 춤추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되겠지 하던 것이 설상가상으로 변하면서
이런 시기에 여행을 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풍선처럼 부풀었던 마음에 구멍이 생겨버렸습니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동안 갈고 닦은? 일본어로
그 곳 사람들과 얼마나 의사소통이 되는가를 경험하는 것역시
즐거운 기대중의 하나였는데,그것도 미루게 되었지요.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연말에 떠나던 여행을 해야 되야 말아야
되나,고민이 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기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느라 전시장을
돌아다니던 중,피오니님이 제주올레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더군요.
올레길? 그게 뭔데요?
산티아고 길을 걷다가 제주도에 길을 내게 된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보게 되었는데 내년에 꼭 가보려고 한다고
그러니 한 번 책을 읽어보면 분명히 제주도에 가고 싶을
것이라고요.
사실 그 때만 해도 마음이 동하지 않아서 약간은 반신반의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바로 책을 구하는 성의를 보이지도 못했고
한 번 김이 샌 여행에 대한 의욕도 많이 꺽여버린 기분이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everymonth에 올려준 올레 홈페이지 주소를
통해서 한 번 들어가보고는 이상하게 하루,혹은 이틀에
한 번 그 곳에 들어가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올레길을 걷고 나서 올린 이야기,그 곳의 숙소를
소개하는 글,특히 여성들만 묵을 수 있는 숙소에 대한 글
맛집소개,그리고 올라온 사진들을 보면서 서서히
제주도가 제 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주걷기여행책을 주문한 상태에서
제게 있던 책,그러나 아직 못 읽은 책인 제주역사기행을
읽기 시작한 것이 지난 토요일입니다.

그 책에는 제가 모르는 제주도가 오롯이 담겨있었습니다.
선사시대유적지부터 시작하여 삼별초의 난과 관련한 이야기
제주의 신화,제주에 유배온 사람들이야기,제주의 불교는
다른 곳과 어떻게 다르게 성장했는가,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제주에 가서 무엇을 보고 싶은가
메모를 해나가던 중 ,토요일 밤에 기다리던 책을 받았습니다.

밤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던 길에 서점에 들러 구한 책
집에서는 가능하면 책을 읽지 않으려는 규칙을 깨고
조금만 조그만 더 읽게 만들던 책,일요일 아침에도
마루에 음악을 틀어놓고 앉아서 다시 손대게 되던 책
결국에는 일요일 하루,그 책과 더불어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걷는 일에 익숙하지 못한 제게 산티아고 여행기를 통해서
자극을 주었던 김남희의 글이 생각나더군요.
그 때는 마음에 품기는 했지만 과연 내 생애에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의심이 나서 그저 꿈처럼 품기만 한 길
그 길처럼 아름다운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길은 만들어가는 것,그 안에서 희망이 자라는 것
뤼쉰의 말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되네요.
어제 만난 아이들에게 그 책속의 사진을 보여주니
이런 아름다운 바다가 한국에 있는 것인가 놀라더군요.
마지막 장에서 만난 사진 한 장,자전거가 앞에 놓인
파란 바다,마라도라고,수학여행때 이 곳에 가 본 적이 있노라고
한 여학생이 반색을 하면서 좋아합니다.

집에 들어와서 책을 보람이에게 건네면서 말을 했지요.
보람아,엄마 언젠가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고 훌쩍
떠날지도 모르겠는걸
무슨 소린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딸에게 (함께 떠나기로
했지만 계절학기가 겹치면 곤란하다고 해서,엄마는
네 사정과 상관없이 떠날 것이라고 선언을 했지요)
일단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늦은 밤,동생이 시골에서 보내온 생선을 들고 왔습니다.
갈무리해서 잘 먹으라고요.
그 때 동생이 마루에 펼쳐진 제주걷기여행을 보더니
언니,남도를 돌아볼 예정아니었어? 하고 물어봅니다.
일정이 바뀌어서 제주도로 가기로 했는데
아마 조금 더 늙으면 제주도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할 것 같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가서 무엇을 하고 살거야?
글쎄,걷기도 하고,거기서도 스터디 모임 조직해서 공부할까?

망설임에서 시작한 여행준비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어서 이제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되는
연말의 제주도,
마음을 열고 바라보면 제주도가 제게 보여줄 진짜
사람들이 살아갔던 흔적과 지금의 모습들을 기대하게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