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승태가 만화를 빌려오더니
방에서 한참 있다가 나와서 소리칩니다.
엄마,이 만화는 엄마도 꼭 보면 좋을 것 같은데 하고요
뭔데?
와인에 관한 것이야
와인? 엄마는 와인 마시지도 않거든
그래도 한 번 줘볼래?
그렇게 읽기 시작한 일본만화가 신의 물방울이란
제목의 시리즈였습니다
너무 늦게 읽기 시작하여 혹시 아침에 보람이를 못 깨우는
사단이 날까봐 2권째 읽다가 중간에서 잠이 들었지요.
내일은 아침 9시부터 수업이 있는 날이니
몸을 너무 혹사하면 곤란하니 하면서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승태 학교가는 것까지 보고는
나머지 만화를 조금만 더 보고 가야지 하면서
다시 소파에 앉았습니다.
문제는 시계로 시간을 보면서도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앞으로 삼십분은 더 볼 수 있겠네 하면서
아무 자각이 없이 쳐다본 것인데 갑자기 전화기 너머로
왜 아직 오지 않는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직이라니,혼자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다시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랴부랴 준비해서 정말 총알같이 날아갔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에게 얼마나 미안하던지요.
정말 살다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도 많지만
오늘같이 황당무계한 날은 처음이었습니다.
마셔보지도 않던 와인의 세계에 푹 빠져서
(와인의 세계라기보다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만화가의
스토리 텔링에 빠져서 그 맛이 과연 그런가
가보지도 못한 고장 부르고뉴와 보르도에 대하여 공상을 하다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다니
수업마치고 집에 와서 나머지 만화를 마저 보고
한의원에 가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은 분량이 상당해서 가려던 시간을 놓치고 말았던 것인데
하루에 두 번이나 만화로 인해 길이 어긋나다니
정말 신기하고 이상야릇한 날입니다.
한의원에 못 가는 바람에 시간여유가 조금 생겨서
도서관 가는 길까지 걸었습니다.


오늘 곰브리치 읽는 시간에 터너와 콘스터블을 소개하면서
곰브리치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자연에 대한 두 가지 태도중에서 당대에는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그림을 그린 사람들이 더 환영받았을지 모르지만
자신의 견해로는 자연을 진실그대로 바라보고 그것을 전달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작품이
더 영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런데 사진기를 들고 다니면서 자연에 카메라를 들이댈 때
과연 나는 자연그대로를 바라보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제 카메라에 잡힌 것은 자연그대로가 아니라
그 중에서 추출하여 흉하거나 보기에 덜 매력적인 부분은
빼고
마음에 드는 것만 추려서 보여주는 것
다른 사람의 경우에는 자연을 대상으로 렌즈를 들이댈 때
어떤 생각을 하는가 문득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화분이 아닌 땅에서 자라는 국화를 보니 반가워서
바짝 다가가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난 번 어떤 집앞에서 화분에 심어진 이 꽃을 보았는데
오늘은 땅에서 피고 있는 상태의 꽃을 만나니
공연히 더 반갑습니다.



낮에 체력장이라고 일찍 집에 온 승태가 신의 물방울
6,7권을 빌려왔더군요.
문제는 5권을 누군가가 빌려가서 반납을 하지 않은 상태라고요
그래서 제가 집에 들어오는 길에 들러서 만화가게 아저씨에게
물어보니 들어오면 전화를 주겠다고 합니다.
열한시가 넘어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만화를 빌리고나서
편의점에 요구르트를 사러 간 순간
바닥의 박스에 담긴 와인에 눈길이 갑니다.
아니,이렇게 사람이 간사할 수가
한 번도 제대로 와인병을 쳐다보지도 않던 제가
만화로 인해서 눈길이 달라지는 것이 너무 신기한
하루 종일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난 날이네요.
다 보고 나면 초보부터 시작하여 와인을 마셔보고 싶다고
엉뚱한 시도를 하고 돌아다니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유쾌하기도 한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