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세상의 많은 딸들이 하는 다짐이다.
나는 남다른 인생을 살 거니까, 전기밥솥 한 번 눌러보지 않고 결혼이란 걸 했다. 그런데,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 보니, 사람이 '의, 식, 주'를 빼고는 어떤 일이든 할 수가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깨달았다.
당장 밥은 자취생활 오래 한 신랑이 하고, 사온 반찬으로 때워봤지만,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왕실의 가족이 아니고서야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인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잠자리를 마련해야 생을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부터 케이크 같은 디저트류를 만드는데 취미가 있었는데, 밥은 달랐다. 밥은 생색도 나지 않고, 매일 반복해야 하는 루틴인 데다 내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무서운 전제가 있었다.
그래도 기왕 해야 하는 거라면 잘해보고 싶어, 요리책도 기웃거리고 요리 사이트도 기웃거렸다.
그때 만난 요리 사이트 82cook.com
요리 잘하는 언니들이 글솜씨에 사진 솜씨, 살림 솜씨들은 어찌나 훌륭한지 매일 드나들며 그녀들이 남긴 레시피를 따라 해 보고 서로 감상을 나누고, 자유게시판에서 수다도 떨면서 나는 자연스레 82 죽순이가 되었다.
이 분들은 행주치마에 돌을 나르던 여인들의 후예답게 나라가 어지러우면 시위에 참여해 시민들에게 커피와 간식을 나누고, 방송국이 파업하면 밥차를 보내주는 화끈한 여인들이었다.
몇 년 전, 가족도 없고 연고도 없는 젊은 애기 엄마가 남편이 암수술을 받는데 병원을 알아보는 글을 올리자, 여기저기 걱정해주고 도움 주겠다는 분들이 생겨났다. 애기 엄마는 마음만 받겠다고, 그래도 다 같이 걱정해주니, 경과보고는 하겠다고 간간히 글을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애기 아빠가 세상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러자 82에서는 모금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몇몇 회원분들이 빈소에 방문해 조문하고 애기 엄마에게 뜻을 전달하고, 확인도 했다.(세상은 사실 못 믿을 일이 많으니까)
애기 엄마는 몇 번을 고사하다 우리의 정성을 받아주었고, 몇 분의 멋진 언니들이 총대를 메고 작은 방을 구해주고 살림 일체를 넣어주셨다. 이 일은 일간지에도 실렸다.
나도 여러 모금에 간간히 참여하며 나의 속물근성에 면피를 하곤 했다.
이 멋진 커뮤니티에서 만난 여인, jasmine.
이 분의 레시피는 일단 간단하고, 명료한데 맛있다. 유머 감각 넘치고, 바지런하고, 강아지를 사랑하고, 자식을 정성껏 잘 기르는 나의 롤모델이었다.
이 분이 전수하신 불고기 레시피로 82쿡 회원들이 만든 고기를 늘어뜨리면 지구 100바퀴는 돌릴 수 있을 정도.
이 달큰 짭짤한 불고기로 아기들 밥도 비벼주고, 고기도 먹여주고, 남은 국물에 당면이나 떡을 넣어 몇 끼를 해결했는지.. 둘째 출산에 임박해서는 내가 조리원 가 있는 동안 큰애와 남편 먹으라고 자스민표 불고기를 10근은 냉동해놓고 갔다. 그걸 갈무리해서 넣으면서 출산하고 살아 돌아와 내가 이걸 먹을 수 있겠지, 했던 비장한 마음도 기억난다. 다른 요리도 이 분께 온라인으로 전수받으며 친구들과도 모여서 얘기하고, 같이 해서 나눠 먹으며 다들 새댁에서 중년으로 나이를 먹어갔다.
어젯밤, 예전처럼 죽순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하루에 두 번은 들르는 82쿡에서 자스민님의 부고를 들었다. 위암 1기인데 수술 후 약해진 체력에 감당을 못 하고 유명을 달리하셨다고. 일면식도 없는 분의 부고에 눈물이 났다. 그분의 레시피로 힘든 육아 시절을 견뎌냈는데 너무 황망하고 가슴이 아팠다.
오늘 아침에 아이들 학교에 보내고,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참 이상도 하지. 생판 남의 장례식장에 가는 게 이렇게 자연스럽다니. 그분은 나를 모르지만, 내 나름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었고, 진심으로 그분의 자녀들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싶었다. 엄마 덕에 내가 아이들 잘 키우고, 살림 잘하게 되었다고, 너무 좋으신 분이었다고.. 그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빈소에 들어서자 생각보다 훨씬 젊은 영정사진에 왈칵 눈물이 났다. 고3이 밥을 잘 안 먹어 급식 나오는 세월에 도시락을 싸며 '고느님'시리즈를 연재하게 했던, 코스모스 같은 따님이 검은 상복을 입고 쓰러질 듯 절을 하는 모습에 아이같이 엉엉 울어버렸다. 어찌어찌 조문을 마치고, 어린 상주와 손을 잡고 좋은 어머님이셨다고.. 준비해 간 말을 더듬더듬 겨우 마쳤다.
여자 나이 53세. 아이 키우느라 정신없는 30대, 몸은 편해지나 사춘기와 입시로 정신없는 40대를 지나 막내를 대학 보냈으니 이제는 큰 동요 없이 행복할 나이. 그 좋은 시절에 목숨 같은 아이와 강아지를 두고 어찌 눈을 감았을까.. 거기 있는 82쿡 아줌마들은 같은 마음으로 눈물을 쏟았으리라.
생각보다 단출한 가족이라 손님이 많지는 않았고, 그 반은 82쿡 회원들로 채워졌다.
한 번도 오프 모임에 나가지 않았지만, 서로 82 회원임을 알아보고 빈소에 앉아 쟈스민님과의 추억을 나누었다.
그때였다. 다들 준비되지 않은 죽음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 작은 폭소가 터진 것은..
서로의 닉네임을 묻다가, '저는 개굴굴 입니다..'라고 아주 작게(장례식장에서 말하기는 창피하니) 말하자 다들 웃음을 띄기 시작했고, '괜찮아요, 우리 남편은 어제 여기서 무뼈 닭발이라고, 다들 무뼈님!이라고 불렀어요.'라는 회원님의 말에 우리는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빈소를 지키고 발인 예배를 같이 보았다.
좋은 곳으로 가서 편안하시라고, 기도를 드리고 운구차에 모시는 것을 보고 회원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음엔 좋은 데서 만나자고 덕담하고 돌아섰다.
장례식장을 나서면 나는 오늘도 식구들에게 줄 밥 걱정을 하겠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그게 인생이겠지.
Jasmine 님의 불고기 레시피
* 이 글의 저작권은 82cook에 있습니다. 빌려왔어요.
재료 : 쇠고기 한 근(600g), 요리용 술 2큰술, 간 양파 1개(혹은 간 배 ½개), 채 썬 양파 ½개
◇ 양념장 재료: 간장 6큰술, 설탕 3큰술, 다진 파, 다진 마늘 각 1½큰 술, 후추 깨, 참기름 조금씩
1. 붙어있는 불고기감은 양념이 잘 스며들게 한 장씩 떼어내고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요.
2. 양파나 배를 갈아 고기에 버무려서 10분 정도 연육을 시키면 고기가 부드러워집니다. 레드와인을 조금 넣으면 풍미가 더 좋아져요.
3. 양념을 넣고 골고루 섞은 후 간이 잘 배도록 잠시 두세요.
집집마다 간이 다르니 10분 후 고기 한 점을 구워서 단맛, 짠맛 등 간을 확인하고 조절하면 좋아요.
4. 채 썬 양파를 섞어요. 한 끼 먹을 만큼씩 소분해서 냉동해두면 편해요.
Tip
※ 고기 100g당 간장 1큰술, 설탕 ½큰 술, 파, 마늘 각 ¼큰 술, 후추, 깨소금, 참기름 약간씩 - 간장부터 반씩 줄어드는 '간설파마후깨참' 양념 공식을 외워두면 편해요.
※ 고기 600g까지는 이 공식을 지키고, 고기 양이 많아지면 양념을 70~80% 정도로 줄여요. 옛말에 많은 양을 할 때는 양념이 양념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어요. 공식 그대로 하면 짜집니다.
※ 고기는 간장과 닿는 순간부터 단단해지므로 미리 술, 과일 등으로 연육 과정을 거친 후 간장 양념하는 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