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님들의 힐링푸드를 읽으며 저의 힐링푸드도 소개하고 싶어 부끄럽지만 몇 자 적어봅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먹었는가에 따라 음식은 추억으로 남습니다. 그렇게 화려한 음식은 아니더라도 서투르고 간도 안맞는 음식이라도 오랜 시간 간직하고 싶은 맛의 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제 인생에도 그런 맛의 기억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힘들 때는 힘이 되어주는 음식을 기억하며 먹는 것만으로 새로이 살아나갈 힘이 생기거든요. 비록 기억 속의 맛보다 덜할지는 몰라도요.
제게 힘이 되는 맛들은 바로 고등학교 학창시절 내내 친언니가 싸주었던 도시락입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일찍 돌아가셔서 언니와 같이 살아왔는데 언니가 늘 동생의 도시락을 챙겨주었던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싶어요. 언니도 그땐 같은 학생일 뿐이었는데... 도시락을 매일 챙긴다는 것은 무척 번거로운 일이니까요. 형편도 그리 좋지 못했고 반찬 하나뿐인 날도 많았지만 저에겐 세상에서 제일 따뜻한 밥이었지요. 빨갛게 무친 달달한 오징어채에 김 하나라도 그렇게 맛이 있었어요. 가끔 계란에 부친 동그랑땡이나 비엔나소시지에 케첩만 뿌려져 있어도 점심시간이 정말 행복했었지요. 제가 고3때 외부 급식업체에서 도시락을 신청해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언니는 제가 고등학교를 끝마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도시락을 챙겨주었어요. 그때는 학생들이 지금처럼 핸드폰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집에 따로 카메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여서 도시락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지만 사진이 따로 없기에 기억 속의 음식은 더 완벽하게 기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답니다.
언니가 싸주었던 마지막 도시락은 아직도 생생해요. 바로 제가 수능 보던 날의 도시락이었는데 그 전날부터 언니는 시험보는 동생을 위해 분주히 시장에 다녀오고 이것 저것 반찬거리들을 많이 준비해두었어요. 파를 송송 썰어 넣은 계란말이를 하려고 싱싱한 계란도 한 판 사두고, 바삭한 두부부침을 하려고 두부물기 빠지게 체에도 받쳐두고, 감자도 얇게 채를 썰어 물에 담궈 두었었어요. 새벽에 일어나서 따뜻하게 싸주고 싶었는데 그만 언니도 저도 늦잠을 자버린 거예요. 언니가 준비했던 재료들은 만들어 보지도 못하고 냉장고에 있었던 밑반찬인 빨간 오징어채 무침만 하나 달랑 반찬으로 챙기고 부랴부랴 시험장으로 달려갔어요. 하지만 가는 도중에도 맘속으론 언니에게 미안한 마음에, 언니걱정 뿐이었어요. 동생이 시험을 잘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것 저것 신경을 많이 썼을텐데... 준비했던대로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해 얼마나 속상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도 저는 그날 시험을 잘 보고 집으로 돌아가 언니가 전날 준비했던 재료로 같이 따스한 밥 한끼 잘 먹었었답니다.
이런 따스한 밥의 기억이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힘든 순간순간마다 저에겐 참 힘이 됩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엄마의 노하우와 손맛이 살아있는 음식들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어 보일지는 몰라도 언니의 사랑이 담긴 도시락을 먹을 수 있었던 학창시절이 지금도 참 소중합니다.
이제 언니도 저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아 사랑하는 아이들과 함께 또 새로운 음식의 추억들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힘들 때 힘이 되는 음식이길 바라면서요.
문득, 지금은 멀리 타지에서 살고 있는 언니를 찾아가 예전처럼 도시락 싸달라고 떼를 쓰고 싶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