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리플이 100개씩이나 달리랴, 하고 헛소리 한번 해본 건데...에구, 약속은 약속이니까...
제 어릴 때 꿈이 FM방송의 음악PD였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학교 방송국에 지원했고, 몇대일인지는 모르지만 암튼 경쟁을 뚫고 음악 PD가 됐습니다. 당시 아나운서, 기자, 교양PD, 음악PD, 엔지니어...이렇게 있었는데, 저는 기자나 교양PD가 '판순이'라 부르며 딴따라 취급을 하던 음악PD가 됐습니다.
무대는 바로 학교 방송국이었습니다. 이건 진짜 같이 활동했던 선후배들도 모르는 비화인데...공개해도 되려는지...82cook 식구중에 당시 관계자가 없으리라 믿으며, 이야기 들어갑니다.

방송국에 들어간 직후 열린 신입국원 환영회~~.
웬 남자가 셔츠를 쥐어뜯으며 '나는 어떡하라구'를 부르대요.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냥 좀 느끼하다...그 정도. 방송국 선배들 이름과 얼굴 익히랴, 방송국의 엄격한 룰을 익히랴, 정신없어, 첨에는 '나는 어떡하라구'와 그 사람이 동일인 인줄도 몰랐어요. 나중에 보니 저랑 방송국은 같이 들어갔지만 1년 선배였고, 목소리가 좀 굵직한, 아나운서 였어요. 아, 그 사람 성이 C였어요.
하루는 제 친구,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과 친구이며 늘 붙어다니던 제 친구가 그러는 거에요.
자기가 고등학교때 사귀었던 남자랑 너무너무 닮은 남자를 학교에서 봤다구, 그리구 그 남자가 너랑 같이 방송국엘 다닌다구...
그래서 약속했어요. 그 남자가 누군지 알려주면 네 앞에 갖다 바치겠다구...그 남자가 바로 C더군요.
마침, 데모로 휴교했고, 갈 곳 없는 저희들은 모두 방송국에서 죽치며 시간을 보냈어요.
방송국에서 마이티를 치기도 하고, 저녁 때는 신촌시장으로 몰려가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자연스럽게 C랑 친해졌죠.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하건대, 전 단지 그 사람을 제 친구에게 소개해주려구 친해진 겁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하루는 C가 숙제를 해달래요.
휴교기간중 마치 초등학교 방학숙제처럼 숙제들이 나왔었는데, C는 사학과인지라, 무슨 지도 그리는 숙제가 나왔어요.
절더러 대신 해주면 영화를 보여주겠다고 하대요. 영화보다도, 이 숙제를 해주고나서 제 친구에게 소개해주려고, "해주겠다"고 했는데, 지도를 그리기가 생각보다 어려운데다가, 제가 원래 그림을 잘못 그려, 결과물이 썩 좋지는 않았어요.
암튼 숙제를 완성해서 주니 대뜸 "이렇게 지도를 못그리냐, 내가 그리느니만 못하게 됐다" 하는 거에요. 그래도 약속은 약속!!
같이 본 영화는 화제의 영화 '엑소시스트'였어요. 린다 블레어가 나오는...
전 원래 공포영화는 안보거든요, 그런데 꼭 그걸 봐야겠다고 하더라구요. 영화를 보는데 어찌 그리 무서운지...C가 앉은 반대편쪽으로 몸을 돌리며, 몇번이나 눈을 가리고, 소리를 질렀는지...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저녁을 먹는데 그러네요.
"넌 무슨 여자가 그러냐? 너무 무서워서 같이 보는 여자들이 남자 품으로 뛰어든다고 해서 이거 보러 왔는데 넌 왜 반대편으로 가냐?"하는 거에요.
그러더니 자기가 예전에 사귀었던 여자친구 얘기를 해주대요. 키도 작고 손도 작은 아기같은 여자였대요. 자기 손에다 그녀의 손을 갖다대면 딱 반이라나 어쨌다나, 그녀가 주먹을 쥐고 있는 손에 자기 손을 덮으면 그녀 손이 보이질 않는다나 어쨌다나... 그녀의 집에 전화를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C목소리만 듣고 나이많은 아저씨인줄 알고 제발 헤어지라고 해서 헤어졌다고...뭐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랬는데 참 이상하죠. 그 선배가 슬금슬금 좋아지기 시작하는 거에요. 짝사랑이죠. 물론 친구에게도 소개해주지 않았어요. 짝사랑의 묘미가 그런거죠, 시작도 내 맘대로, 끝나는 것도 내 맘대로.
얼마 뒤 어느 화창한 일요일날~~
하루종일 TV 앞에서 죽치고 있는데 울리는 전화벨 소리~~
C더라구요. 국립극장에서 하는 발레 '실피드'의 표가 생겼는데, 보러 나오겠느냐 하는 거였죠.
아이구 맘 같아서야 당장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조금은 빼야할 것 같아서 약간 뜸을 들이면서, 반승락을 하고 있는 중인데, 오빠가 들어오더니 펄펄 뛰는 거에요.
"이 기집애가 어딜 갈려구 그래, 저녁 7시에 하는 공연을 4시에 전화하는 녀석이 어딨어? 어딜 가, 너 못나가, 기집애가 자존심도 없이 전화한다구 포르르 뛰어나가, 안돼, 도대체 그 녀석 누구얏?"
오빠가 하도 난리를 해서 난 못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리곤 그후 C의 태도가 확 변해버렸어요.
심지어는 제가 오후에 하던 프로그램은 더블자키로, 앞에 f가 붙은 쓴 멘트는 여자선배가, m이 붙은 건 C가 읽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스튜디오 안에서 부조엘 있는, 절 노려보면서 자기 멘트를 안읽는 거에요.
그러면서, 서로 소 닭쳐다보듯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말았어요.
그리곤 방학이 됐고...
여름방학을 마치고 방송국엘 돌아가보니, C의 연애담이 무성했어요.
어디 여행지에서 한 여자를 만나 요새 아주 열렬히 연애한다나요.
그 여자 이름도 잊을 수 없어요. '오난희'. 선배들 사이에서 당시 유행했던 음료수인 오란c로 불리웠고, 방송국 칠판에는 'C, 오란c에게서 전화'하는 메모가 매일 써있는데 미치겠더라구요.
그래도 표시 안내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방송만 하면서 살았어요. 아침방송 하나, 낮방송 하나, 저녁방송은 원래 하나인데, 남의 것까지 맡아서 둘!! 방송하면서 C얼굴 한번 더 보면 좋고, 아니어도 할 수 없고...
그러다가 해가 바뀌었고, C는 군대엘 가게 됐어요.
군대가기 며칠전 "김혜경, 군대가기 전에 영화나 하나 보여주라"하더군요. 그러라고 했어요, 그래야 할 것 같더라구요.
군대가기 바로 전날 만나서 영화 한 편 보고, 맥주 한 잔 마시면서 그 '오란c' 얘기도 듣고...그리고 그 담날 C는 군대엘 갔어요. 여기서 얘기가 끝났으면...아주 싱거웠겠죠?
그후 3년 뒤~~
대학 졸업 후 취재차 학교엘 갔다가 당시 대학원에 다니던 제 친구를 만났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나무 숲사이 '평화의 집'이라는, 사방이 유리창으로 되어있는 작은 식당이 있었어요. 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데... 거기서 친구랑 차를 마시다가 무심코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C가 친구랑 지나다가 마침 고개를 돌려 절 봤고, 절 보더니 친구랑 헤어져서 안으로 들어오더라구요.
제 친구 나중에 하는 말, "그 사람 지남철에 빨려들듯 안으로 들어오더라"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는지, 제 친구는 황급히 자리를 피해주고, C와 저는 긴 백양로를 별 말없이 걸어내려와 학교앞 어느 맥주집엘 들어갔어요.
거기서 그러대요. 대낮부터 맥주 한병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니가 맘에 들어서 지도 그려달라고 했다.'
'엑소시스트 볼 때 이미 너 많이 좋아했었다.'
'난 어렵사리 발레표를 구했는데 넌 나올듯 나올듯 하더니 안오겠다고 해서 무척 화가 났었다. 날 조롱한다고 생각했다.'
'군대가기 전날밤 영화보여달라고 조른 건 네게 널 좋아한다고 고백하려 했던건데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못했다.'
'휴가를 나와서 널 찾으려고 했는데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곤 마지막 말이, "내가 너 좋아한 거 아니?"였어요.
제가 뭐라고 했는 줄 아세요?
"그 얘길 지금 하면 어떡해요!"
바로 사흘 뒤, 제 결혼식 날이었거든요.
무슨 영화같죠? 당시도 그렇고, 지금 생각해도 제가 무슨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요.
아뭏튼 이게 제 짝사랑이야기에요.
그 뒤 5년 후.
미국에서 나온 선배가 C랑 셋이서 밥 한번 먹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한번 같이 밥을 먹었는데....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짝사랑의 상대는 훗날 절대로 만나지 마세요.
환상이 깨지는 것이 더 슬픈 것 같아요.
p.s.글이 늦은 건 관련사진을 찾다가 그랬습니다. 마땅한 독사진이 없네요. 여럿이 찍은 건 초상권 침해가 될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