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협을 남해대교를 통해 건넙니다.
이쪽은 하동군 노량리,보이는 건너 편은 남해군 노량리.
남해대교는 1974년에 개통 된 최초의 현수교로 당대에는 수학여행 코스 중 하나였죠.
露梁~~
해협의 물살이 거세 물방울이 일면 무지개 다리처럼 보여서.
사진 왼쪽 바다와 인접해서 이순신을 기리는 충렬사가 있습니다.
장군은 6개월 간 이곳에 가매장된 후 고향 아산으로 이장.
충렬사에서 전사한 관음포 까지 벚꽃길이 장관입니다.
아래 사진(가져옴)은 새로 건설 중인 왕복 4차선 신남해대교.
우측이 올해 준공 예정인 신남해대교,,,건너가 남해도.
남해도는 제주도,거제,진도,강화 다음 다섯번째로 큰 섬입니다.
남해군은 남해도,창선도를 중심으로 한 60여개 섬으로 이루어졌고.
남해대교~관음 포 간 19국도 벚꽃 터널~~
그런데 수십년 된 고목 벚꽃길이 형성된 이유가 있습니다.
관음포 때문이기도 하죠.
남해대교 건너고 10여분 달리니 우측 멀리 관음포가 보이네요.
우측으로 광양 제철소가,좌측으로 여수 산업단지도 보이고.
우측 바다는 노량해협 광양 쪽.
이곳 주민들은 관음포를 이락포 (李落浦)라 부릅니다,,,이순신이 이곳에서 전사했기에.
우측 멀리가 순천 신성리로 당시 신성리 왜성이 있던 곳.
당시 전세가 소강국면에 들어가자 왜군은 순천 신성리에 성을 쌓고 3년간 농성에 들어갔죠.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본토서 파견된 증원군과 함께 철수하는 것을 이순신이 막아서며
노량해전은 시작.
전사 후 이곳 관음포에 안치되었다가 노량해협(충렬사) 쪽에 6개월간 가매장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향 아산으로 이장.
그런데 관음포는 조일전쟁 훨씬 이전에도 큰 역사 하나가 서린 곳~~~!!
고려 팔만대장경의 경판을 만들고 판각한 곳이 이곳 관음포입니다.
경판으로 쓰인 나무 중 가장 많이 쓰인 것이 산벚나무인데 섬진강 주변 지리산 자락에 주로 자라고 있었죠.
당시 지리산에서 벌목된 산벚나무는 선진강을 통해 광양만 까지 운반되엇습니다.
이를 섬진강 하류에 모아두었다가 밀물 때 띄우면 땟목들은 조류를 타고 손쉽게 이곳 관음포구로요.
그리고 관음포 갯벌 속에 3년 정도 묻어 두었다가 말린 후 경판을 판각.
완성품은 남해,서해 바닷길을 통해 강화도 선원사로 옮겨졌습니다.
지금 남해 논밭은 온통 마늘밭으로 푸름니다.
한때 남해 마늘이 유명했어요.
그러나 요 즘은 이모작으로 품질이 떨어져 별 주목을 못받고 있고.
마늘 수확 후 곧바로 벼를 심는데,
이모작으로 재배 기간이 짧다보니 조기 수확으로 품질은 떨어진 것.
남해는 해안도로 드라이브가 압권입니다.
이땅 최고 해안 드라이브 코스.
남원~구례~하동을 지나온 19번국도는 남해대교를 넘은 후
남해읍,두모마을 거쳐 상주해수욕장에서 남해 바다로 빠집니다.
남해읍 지나 15분 달리니 노란 게 확 시선을 끌어 당기네요.
두모포 두모마을의 유체꽃밭입니다.
계단식 다랭이논에 벼 대신 유체꽃을 심어 놓았다는.
혹 지금 이 곡이 흐른 다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 3악장 론도 비바체
피아노,마리아 주앙 피레스
https://www.youtube.com/watch?v=g_lifPUQuvA
계
단식 다랭이논이 만들어 낸 조형미에 노란 색감이 더해지니~~~~
유채꽃의 아름다운 장관은 완도 청산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습니다.
노랑의 향연은 마을이 있는
저 아래 두모포구
까지 이어지고.
남해도 하면 계단식 논,일명 다랭이 논이죠. 완 도 청산도는 구들장 논. 석축을 2미터 이상 쌓아올려 경작지를 만들어 냈네요.한뼘이라도 더 내기 위해 직각으로!
열무가 유채꽃
이란 걸 이번에 알았다는~~
봄이면 유채꽃이 만발하지만 가을이면 이렇게 메밀꽃으로 대체됩니다.
남해도 일대 는 난대림 식생이 공존 해 어딜 가나 동백이 ~~~
사실 두모마을 유체꽃은 에피타이져,,,이제 서둘러 저 산으로 고고~~ 남해군 의 진산 금산입니다. 보리암은 정상 바로 뒤쪽에 있습니다 . 다랭이 논 바로 위쪽으로 19번 국도가 지나가고.
등산로 초입에 왠 중국 풍 노인네 동상이 있네요. 서복입니다.서불,서시라고도 하죠. 2200년 전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러 서쪽으로 떠난 그 총책임자. 그런데 서복이 왜 이곳 남해 금산에??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그 이유를 알수 있습니다 . 먼저 왼쪽 벽에 새겨 놓은 그림 문자 한번 보시구요!!
몇 철쭉이
철 이르게 피였네요.
저 바위,떨어지지 않고 머리가 달라 붙어 있는게 신기~~
난대림 식생~~~ 무슨 나무일까요??
20 여분 오르도록 내내 이것들이~~
아,사스레 피나무군요. 차나무과 라니 난대림 식생 맞네요.
꽃들은 아기 손톱만합니다. 암수 따로인데 이건 암꽃.
수꽃~~
20여분 오르다 보니, 어어!!! 바위 왼쪽 암각화 보이시나요? 등산로 초입 서복 상에서 보았던 그 그림 글자입니다. 이곳 주민들은 거북바위라 부르는 데 거북 머리가 아래 두모마을 포구를 향하고 있답니다. 바다를 향해 물 찾아 급히 기어가는 거겠죠.
이걸 탁본해 보면 아래 형태가 나옵니다.
글자인지 그림인지?? 徐巿過此~~로 해석하네요.서불과차,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 라는 뜻. 혹은 徐福過之~~로. 어떤 이는 徐市起禮日出 ~~로,,,서불이 일어나 뜨는 해에 예를 표하다는 뜻. 또 한글 이전의 우리 고문자라는 설도 있습니다. 위당 정인보는 서불이 새긴 것이 아니고 훈민정음 이전의 한국 고대문자로 해석했는데, '사냥하러 이곳으로 물을 건너와 기를 꽂다'라고. 나아가 범어 계열 글자라는 설,거란족 문자라는 설 등등 분분합니다.
그럼 서불이 왜 이곳 남해 금산까지 왔다는 걸까요? 서불(서시,서복)은 선남선녀 500명을 거느리고 발해만 동쪽 삼신산(봉래산·방장산·영주산)에 있다는 불로초를 구하러 떠났죠. 물론 이후 행방불명. 그런데 세월이 흘러 중국의 동쪽인 제주,한반도 남쪽 바다,일본 등지에 이들 관련 전설들이 구구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곳 남해 금산의 저 석각과 부소암(추후 설명)과 그리고 서귀포 정방폭포의 석각입니다.
서귀포 정방폭포에도 '서불과지(徐市過之)' 라는 문자가 고대 그림문자로 새겨져 있었다죠.
지워져 비록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해방 후 까지도 흔적이 있었음)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에 유배됐을 때 그 글자를 탁본했다고 전해지고.
외에도 여수 동도리꽃 전설, 거제도 해금강의 해동한국과 소매물도의 신선전설, 옹진군 영흥도 양로봉 화상문자,
전남 구례의 서시천(徐市川), 여수시 남면 연도리 까랑포 해안 절벽 등이 그 예랍니다.
바위 굴도 지나고~~~
이제 부소암이 지척~~
부소암(扶蘇巖)~ 부소암 앞쪽으로는 바다를 향해 부소암자가 있습니다. 진시왕 장자인 부소가 이곳에 와서 서불과 함께 기거했다는 전설이~~ 부소는 아버지 진시왕의 분서갱유에 반대하다 변방에 쫏겨났고 결국 진시왕 사후에는 사약을 받았다죠. 그런데 이땅엔 부소 이름이 좀 있어요. 단군의 둘째 아들이 부소이고,부여 사비성은 부소산성으로 불리죠,,,낙화암이 있는 그 부소산성.
섬같이 보이지만 이곳과 붙어있는데 앞섬 왼쪽 끝이 가천 다랭이 마을입니다.
부소암서 바라 본 두모마을~~
노란 유채꽃으로 치장한 화사한 다랭이논도 보이고~~ (양)동이 보다 큰 것을 '드므'라 합니다. 저 두모마을의 두모포구가 드므같이 생겼다 해서 드므포로 불리다 두모포로요.
두모포 바로 앞 섬에 시선 집중!!
멀리 희미하게 수평으로 길게 엎어져 자고 있는 섬 보이시나요~?? 여수 돌산도입니다. 남해도는 강화도 다음으로 큰 섬이지만 이들에 비해 농토가 절대적으로 부족. 그래서 석축 까지 쌓아서 만든 다랭이 논이 탄생했고. 그런데 문제가요,퇴비가 부족했다는. 대안을 찾았는데 눈물겹게도 여수 똥배!!. 저 건너 여수까지 배를 띄워 인분을 실어나른 거죠. 이걸 해방 후 남한 최초 비료공장인 충주비료가 나오긴 전인 60년대 까지 계속.
남해가 얼마나 척박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
노도 보이시나요? 임진왜란 때 노를 만들던 섬이라 해서 노도. 서포 김만중이 3년간 유배 살다 죽은 후 뭍였습니다.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구운몽을 이곳 노도에서 썼습니다. 홀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쓴 구운몽이지만 집필 중에 어머니는 죽고, 본인도 56세 나이로 이곳에서. 정약용 둘째 형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쓴 후 죽어 뭍혔듯이. 이순신은 54세에 전사. 남해도는 이렇게 조선 대표적인 유배지.약 30여명이. 그래서 남해읍엔 유배문학관이 있습니다.
아래 쪽은 다 졌지만 정상이 가까워지니 진달래가 여전하고.
뭘까요? 봄 야생화의 상징 얼레지입니다. 꽃은 지고 씨만 저리.
씨방 아래로 실처럼 대롱대롱 붙어 있는 시든 꽃잎들 보이시죠? 금산 고도가 704 미터인데 여긴 약 5백 미터.
온통 얼레지 꽃밭~~
그런데 그런데요???
1백여미터 더 오르니 씨를 맺히기 직전인지 꽃잎이 시들고들 있네요.
그리고 더 올라 정상 인근에선 여전히 활짝 피여있더라는!!! 불과 고도 3백미터 사이에서 얼레지 식생의 확연한 차이를 볼수 있었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 등산로 일대는 죄다 얼레지 군락지~~
얼레지 저 잎이요??? 만지면 벨벳 처럼 질감에 촉감이 좋아요. 그런데 저 잎이 쌈 용으로 끝내준다는... 삶아 된장국을 끓여도 좋고.
그런데 저걸 어떻게 꺽을수 있다는 건지.............................
보리암 도착~~
핸드폰을 동백꽃에 들이미니 새 소리가 갑자기 터지네요. 동박새겠지 했는데 귀가 후 유투브로 동박새 솔릴 들어보니 아니더라는.
보리암 창건자는 원효대사라는 데 이는 사찰 측 주장. 현존하는 유일한 유물은 저 자그마한 3층 석탑. 1.5미터가 채 안되는 데 양식 상 고려 초 유물.
현대에 세워진 해수관음상~~ 기도발이 좋다고 소문나 전국 각지에서 발길이 끊이질 않고.
그런데 보리암도 엄청난 중창불사로 예전 호젓한 맛은 점차 지워지고 있더라는.
금산 정상 일대 바위란 바위는 각자(刻字)의 대향연~~ 이성계가 잠저 시절 왕이 되겠다며 전국 유명산을 주유했답니다. 금강산,지리산에 들어갔으나 산신에 거절당하고 결국 바다끝 남해 금산에 이르렀어요. 산신과 담판을 통해 왕이 되면 금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어준다는 조건으로 입산이 허용되었습니다. 백일기도 후 결국 왕이 되었고. 그러나 아무리 왕이라도 비단으로 전체를 덮을 수는 없는 노릇. 묘안으로 산 이름을 비단 금자가 들어가는 '錦山' 이름을 하사하는 것으로 퉁쳤습니다. 보리암엔 그때 이태조가 백일기도 했다는 기도처가 있어요. 재밋게도 기도처 뒤에는 세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있는데 두개는 서 있고 하나는 누워있어요. 백일 기도를 마치자 바위 두개는 병풍 처럼 벌떡 일어섰으나 하나는 누운채 그대로. 나머지 하나마저 일어 섰으면 천자,황제가 되었을 거라네요(무지랭이 백성들 홀리는 거 하고는....)
보리암에서 뒤쪽으로 10여분 오르면 정상~~~ 고도는 704미터로 관악산(629) 보다 더 높습니다. 해수면에서 다이렉트로 솟아 있어 정상에 오르는 것이 만만치가 않네요. 바다 끝이니 정상엔 당연 봉수대가 있어야겠죠. 저 봉수대에서 봉수하면 동쪽으로 창선도,삼천포,진주,단청,합천,추풍령을 거쳐 한양 목멱산(남산) 봉수대 까지 도달합니다. 서쪽으로는 여수 오동도를 거쳐 서해안 따라 전달! 전달! 후 목멱산 까지. 보통 장교 2명 포함 12명이 2교대 근무. '봉(烽)'은 횟불을 '수(燧)'는 연기를 의미하는 데 밤에는 봉을,낮에는 수를 띄운거겠죠.
그런데요,봉수가 빠를 까요,고속버스가 빠를까요??? 당시 봉수 체계가 정상 가동되면 시속 110키로 였다네요. 그래서 이곳 금산에서 봉수를 띄우면 한양까진 7시간 정도. 그러니 고금은 막상막하.
문장암(文章岩)~~ 생김새로는 문장하곤 하등 관계가 없어 보이는데 말이죠. 우측에 새겨진 각자 때문입니다.
由虹門 上錦山(유홍문 상금산)~~~ 홍문이 있어서 금산에 오른다는 뜻. 상주 해수욕장에서 보리암으로 오르다 보면 쌍홍문이 있는데 그 홍문을 말합니다. 소수서원의 그 주세붕이 썼다고 전해지면서 후대에 문장암이라는 이름을 얻은 거죠. 바위에 쓴 낙서도 정성에 혼이 들어가면 후대에 문화가 되기도 합니다.
아래는 정상서 바라본 풍광들~~
정상 부근 저 많은 바위란 바위들은 다 각자의 이름을 얻었네요. 가운데 가장 큰 암릉이 상사바위~~~ 남녀 간의 애틋한 사랑 얘기가 깃들어서 라는데 실은 아랫마을 선남선녀들의 러브바위였겠죠.
남쪽 바다를 바라보니 상주해수욕장이~~~ 예전 남해바다에선 부산 해운대 다음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리고 정상서 북으론 지리산이,서쪽으론 여수 돌산도가,동쪽으로 충무와 거제도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오늘 같은 미세먼지가 없다는 전제 하에
능선과 계곡 사이로 하얀 '붓점'들 보이시나요? 산벚꽃들입니다. 이곳 주민 한분이 그러네요.예전엔 금산에 저런 벚꽃 향연이 없었다고. 가로수로 심어놓은 벚나무들의 버찌를 직박구리가 먹고 배설한 씨가 발아해서,,,랍니다. 직박구리가 올라올수 있는 바운더리 까지만 벗나무가 자라고. 직박구리는 진달래 꽃도 잘 따먹습니다.
정상 주변 암릉,바위엔 올라 쉴수 있는 여유 공간들이 많아요. 저 위에 느긋이 앉아 이성복의 시 ' 남해 금산' 도 한번 떠올려보고 (시인은 이곳 정상서 저 바다를 바라보며 시상을 떠올림) 희미한 돌산도 끝 향일함도 찾아보고
점심도 먹고 여유좀부
리다 하산합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이성복, 남해금산-
&&&.....
남해안 끝이라 대부분 승용차로 이동하시겠지만 혹 수도권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이리~~ 남부 버스터미날 출발,4시간 반 소요. 남해읍 버스터미날 하차. 2만원(가격 동일) 택시 타고 보리암 1주차장 하차. 보리암 행 셔틀 타고 5분여 2주차장까지. 10여분 걸으면 보리암.귀경은 역으로.택시는 오던 택시 명함받아 콜. 등산 즐기시는 분은 걸어서 두모마을이나 상주해수욕장 코스로 하산(2시간 소요) 둘 중 두모마을 코스가 더 알참.두모마을서 버스 시간대가 안맞으면 택시 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