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로
산그늘을 따라서 걷다보면은
해 저무는 물가에는 바람이 일고
물결들이 밀려오는 강기슭에는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이
물결보다 잔잔하게 피었습니다
구절초꽃 피면은 가을 오고요
구절초꽃 지면은 가을 가는데
하루해가 다 저문 저녁 강가에
산 너머 그 너머 검은 산 너머
서늘한 저녁달만 떠오릅니다
구절초꽃 새하얀 구절초꽃에
달빛만 하얗게 모여듭니다
소쩍새만 서럽게 울어댑니다 *
*구절초(九節草) - 박용래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메디메디 눈물 비친 사랑아 *
* 구절초 - 유안진
들꽃처럼 나는
욕심 없이 살지만
그리움이 많아서
한이 깊은 여자
서리 걷힌 아침나절
풀밭에 서면
가사장삼(袈娑長衫)입은
비구니의 행렬
그 틈에 끼여든
나는
구절초
다사로운 오늘 별은
성자(聖者)의 미소 *
* 구절초 - 신달자
무주구천동 오르는 계곡
구절초 한마당
가락으로 흐르고 있네요
하필이면 그 음절이
꼭 울 엄마 가슴 에던
그 곡조 같아서
나 바람 속에 취해 흥얼거리는
구절초 한 송이 꺾어
입술에 대니 그렇구나
울 엄마 낮술에 취해 있던
그 내음 그 노래라 *
* 구절초 - 오세영
하늘의 별들은 왜 항상
외로워야 하는가.
왜 서로 대화를 트지 않고
먼 지상만을
바라다보아야 하는가.
무리를 이루어도 별들은 항상
홀로다.
늦가을 어스름
저녁답을 보아라.
난만히 핀 한 떼의 구절초꽃들은
푸른 초원에서만 뜨는 별,
그가 응시하는 것은 왜 항상
먼 산맥이어야 하는가. *
* 山구절초 - 김해화
밤새 하얗게 하얗게 서리 내려 내 가슴 뒤척이다가 시들어 은행잎 수북히 쌓인 길 쭉정이 몸 웅크리고 상처 위에 상처 덧쌓일까 발 비켜 딛으며 공사장 가는 새벽 안개 속 피어오르는 그리운 얼굴 있어 눈물 피잉 돌아 쳐다본 언덕
가슴 속에서 걸어 나가
저기
하얗게 핀
그리움
* 구절초 - 석여공
구절초 꽃몸 허기지게 쓰러지는 날이면
마른 꽃줄기 바람에 흔들리듯
네 눈썹도 그렇게 가녀린 것이었다
산에 눈 박고 앉았다고
새 나는 것 볼 수 없으랴
구절초 꽃모가지 시린 날에도
허공중에서 너를 끄집어내
애 터지게 읽고 있는 걸 *
* 석여공시집[잘 되었다]-문학의전당
* 구절초엽서 - 이정자
먼 산 가까워지고 산구절초 피었습니다
지상의 꽃 피우던 나무는 제 열매를 맺는데
맺을 것 없는 사랑은 속절없습니다
가을 햇살은 단풍을 물들이고 단풍은 사람을 물들이는데
무엇 하나 붉게 물들여보지도 못한
생이 저물어 갑니다
쓸쓸하고 또 쓸쓸하여
찻물을 올려놓고 먼 산 바라기를 합니다
그대도 잘 있느냐고
이 가을 잘 견디고 있느냐고
구절초 꽃잎에 부치지 못할 마음의 엽서 다시 씁니다
*
구절초 시편 - 박기섭
찻물을 올려놓고 가을 소식 듣습니다
살다 보면 웬만큼은 떫은 물이 든다지만
먼 그대 생각에 온통 짓물러 터진 앞섶
못다 여민 앞섶에도 한 사나흘 비는 오고
마을에서 멀어질수록 허기를 버리는 강
내 몸은 그 강가 돌밭 잔돌로나 앉습니다
두어 평 꽃밭마저 차마 가꾸지 못해
눈먼 하 세월에 절간 하나 지어놓고
구절초 구절초 같은 차 한 잔을 올립니다
* 구절초의 북쪽 - 안도현
흔들리는 몇 송이 구절초 옆에
쪼그리고 앉아본 적 있는가?
흔들리기는 싫어, 싫어, 하다가
아주 한없이 가늘어진 위쪽부터 떨리는 것
본 적 있는가? 그러다가 꽃송이가 좌우로 흔들릴 때
그 사이에 생기는 쪽방에 가을햇빛이
잠깐씩 세들어 살다가 떠나는 것 보았는가?
구절초, 안고 살아가기엔 너무 무거워
가까스로 땅에 내려놓은 그늘이
하나같이 목을 길게 빼고, 하나같이 북쪽으로
섧도록 엷게 뻗어 있는 것을 보았는가?
구절초의 사무치는 북쪽을 보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