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에 이어>
저 문 들어가면 1500년 이전 역사 속으로~~~
왼쪽은 단양 쪽 하류,우는 영월 쪽 남한강 상류,,,,마을은 영춘~~~~
삼국사기,동국여지승람에서는 영춘을 을아단현이라 온달산성을 아단성이라 했습니다.
乙이 上을 뜻하니 한강 상류에 있는 아단현이라는.
멀리 소백산 자락~
동쪽 사면~~동문은 현문,즉 저리 사다리를 이용했습니다.
동사면에서 동북방향~~~저 봉우리를 넘으면 영월,태백이 나옵니다.
저 높이만 7미터는 족이.
북쪽면,,,그러니까 남한강이 바라다 보이는~~~
가운데 하단 작은 구멍이 보이나요?
성내 물을 흘러 보내는 水口입니다.
온달산성은 이땅 수많은 산성 중 보존상태가 가장 좋습니다.
적이 기어오르면?
그야, 남한강서 가져온 강돌로 위에서 내리치겠죠.산성 아래가 급경사라 천혜의 요새.
1500년이 흘렀는데도 완벽합니다.대단하다는 말밖에~
넓고 납작한 점판암을 우물 정자로 빗겨 쌓아 정밀합니다.
돌들은 당연 아래 남한강에서 가져온 강돌도 있구요.
강돌은 성내에서도 쉽게 볼수있는데 기어오르는 적군을 강돌로 내리쳤겠죠.
삼국시대엔 돌팔매 특화 부대가 있었습니다.
당서(唐書)고구려전에는 매년 정초에 돌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는 척석군(擲石軍)이라는 돌팔매 부대를 두었다는 기록도.
정월대보름 마을 단위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풍습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이리.
/보름날이면 만리현 위에서,숭례문·동대문·서대문 등 삼문 밖과 아현 사람들이 편을 갈라 몽둥이를 들거나
또는 돌을 던지면 서 편싸움을 한다. 이 싸움은 한쪽이 져서 달아날 때까지 하는데,문 밖이 이기면 경기도만
풍년이 들고, 아현쪽이 이기면 나머지 지역이 풍년이 든다고 한다/
상부 하중을 견디기 위해 하부(이끼 부분)는 반칸을 돌출해 넓게 쌓았습니다.
남쪽 사면의 훼손구간~~
석축의 속살을 볼수있어 좋네요.
보통 물자나 시간 절략을 위해 중앙부는 흙이나 그냥 돌들로 채우는데 데 저리 외벽을 쌓듯 공을.
원형이 잘 보존된 원인이겠죠.
산성의 총설계자,공사책임자는 미적 감각이 남달랐을지도~~~~~~
경사 구간을 경영하면서도 천연덕스럽게 곡선을 살리는 거 하며.
말굽같은 돌출부는 실전,기능적인 면에서도 만점이었을 겁니다.
산성은 4백미터 고도 정상에 위치합니다.앞은 남한강이요,뒤는 소백산 줄기.
총둘레는 700여미터 정도,,,서쪽은 급경사라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고.
정상 가까이 중심을 빙둘러 석축했기에 경사가 심한 동이나 서쪽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현기증을 느낄정도입니다.
정상을 중심으로 머리띠를 두르듯 쌓는 방식을 테뫼식이라 하는데,
온달산성은 9부 능선상에 내탁(內托)하여 축조된 테뫼식 산성의 대표주자.
포곡식(包谷式)도 있는데,이는 정상~능선~계곡을 이어서 쌓는 방식입니다.
남한산성,북한산성처럼.우리산성 대부분이 포곡식.
포곡식은 산과 골짜기를 끌어안아 크게 둘러쳐,길이도 길고 면적도 넓어 긴급시에 주민이 함께 농성합니다.
wall 이라고나 할까요?영주들이 거주하는 castle하고는 또 다른
자,어떠시나요??
산성도 산성이지만 풍광이 예술~~~
저 마을이 영춘으로 강 위쪽이 상리,아랫쪽(현 온달산성 쪽)이 하리인데 상리쪽에 상위나루가 있어요.
상위나루에서 온달은 화살을 맞아 숨졌고 장사를 지냈다는 전설이.
또한 산성에서 18km 떨어진 영춘면 사지원리(왼쪽 먼산 너머)에는 고구려식 계단 적석총인 '태장이묘'가 있어요.
온달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는.
앞의 섬같은 야산 강변쪽에는 '쉰돌'이,,,온달이 장수들과 쉬었다해서.
그 쉰돌엔 윷판이 새겨져 있습니다.온달이 장수들과 두었다는 전설과 함께.
멀리 보이는 산이 태화산으로 충북과 강원도 경계를 이루고.
저기에도 고구려 산성인 태화산성이 있습니다.
성 오른쪽으로 동문이 보이네요,,,석축을 절반만 쌓고 사다리로 오르내리는 현문 형태로.
세상서 가장 큰 편자아닐까요???
김삿갓 얘기좀 할께요.
산성 중 말굽같이 생긴 지형이 안내하는 방향을 보세요?
산 몇구비만 넘으면 김삿갓이 태어나고 뭍인 노루목이 나와요.
노루목은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마대산 자락에.
영춘읍에서 935번 지방도로를 타고 동남쪽으로 배틀재를 넘으면 충북의 동쪽 끝 의풍리가 나옵니다. 노루목은 그 영춘면 의풍리와 영월 하동군 와석리 사이에 있죠. 어둔리 선래골 (선락동)에는 그의 집터가 있어요.선래골(仙來),선락골(仙落)에서 仙은 김삿갓을 의미하고. 더 나아가 의풍리에서 다시 주막거리 지나 마구령을 넘으면 영주 부석사입니다. 김삿갓은 유랑 후 57세 되던 해인 1863년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13년 살다 죽었습니다. 30년 길 위의 인생, 결국 길에서 인생을 완성한 거죠. 3년 후 차남 익균이 와석리 노루목으로 묘를 이장을.
어려 백일장에서 조부를 비난하는 시를 쓴 곳은 영월 동헌 앞마당,,,영월 객사 동헌은 단종이 목졸라 죽은 곳이기도.
멀리 보이는 산이 태화산~~~그 태화산과 접한 남한강변에 고수동굴이 있고.
태화산에도 포곡식 산성이 있는데 온달산성과 비슷한 역할을 했겠죠.
영월엔 외에도 왕검성,대야산성,정양산성 등이 많습니다.
가을엔 더 멋질듯~~~
북문에서 바라본 영춘~~~~~
성문은 북,동,남 이리 세곳에,,,
북문의 경우 지금은 없어졌지만 초기엔 밀어 여는 성문도 있었겠죠.
나머지 두문은 성벽을 절반만 쌓고 아래로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리는 현문(懸門).
산성의 내부~~~~
산성 정상서 남으로 시선을 돌리니~~~~~~~~~~~비단을 포갠듯 부드러운 소백산 연봉이.
소백 연봉을 조망할수 있는 최적 전망대 아닐까하는,,,가을에 꼭 다시 올것임을 다짐해봅니다.
소백산 국망봉~~~ 저 너머에 영주 부석사가.
지금부턴 온달산성의 역사성을요~~~
뒤론 소백연봉~~~~!
앞으론 남한강~~~~~~~~~~!!! 온달산성의 지리적 중요성을 한눈에 읽을수있네요. 고구려가 장악하면 ,북으론 남한강을 통제하고 남으론 소백산을 방어하는. 반대로,신라가 장악하면 소백산 배후기지로 하고 남한강 향하는 대고구려 전초기지. 그러면 누가,언제,왜 쌓았을까요? 죽령~계립령(현 조령 인근),즉 소백산~월악산~조령산~희양산(문경)~속리산(보은) 이북과 한강 이남 지역의 사이, 즉, 충주~단양 일대는 삼국시대 전략적 거점이였죠. 고구려는 국원성(충주)을 제2의 수도로 삼고 남진 전진기지로 삼았으니,그리고 단양 영춘은 동쪽 날개로. 먼저 충주~ 영춘과 단양 일대는 최초 백제 땅이됩니다. 광개토대왕이 남하를 시작한 390년대 이후 1백여년간 고구려로 넘어가죠. 현존하는 고구려 비는 두개 있는데, 고구려의 초기 수도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충주의 고구려중원비. 광개토왕비는 아들 장수왕이,중원비는 장수왕의 손자 문자왕이 세웠습니다. 각각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정복사업을 칭송하는게 주 골자. 장수왕은 장수해서 아들이 먼저 죽고 손자가 왕위를요. 중원비에는 '고려태왕.....조왕(祖王)'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손자 문자왕이 장수왕을 祖王이라 칭합니다. 당시 고구려는 울진,영덕,평해,포항(냉수리고분이 고구려식)까지,,,죽령 넘어 안동,의령까지 진출했습니다. 안동,의성,영춘엔 고구려 무덤양식인 계단식 적석총(집안의 장수왕릉&태왕릉이 대표적)이 . 온달산성 소백산 너머 영주 순흥에는 남한에선 유일하게 고구려식 벽화도 있습니다. 서역인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자주 등장하는데 널방 입구에는 서역인 모습의 역사가, 고구려를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도 그려져있고. 경주 호우총에서는 장수왕이 광개통대왕에 제사지낼 때 쓰던 그릇인 호우가 발굴되었죠. 즈음해서 신라 세자가 고구려 인질로 끌려가기도. 중원비에는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당주'란 고구려 지방관리를 말하는 데, 고구려가 신라에 통치관리를 직접 파견했음을 알수있는 거죠. 또한 '의복건립처'라는 조공 장소가 있어 고구려 태자가 직접 신라왕을 이곳에 불러 조복(祖服)을 하사했습니다. 심지여 신라 매금(寐錦,신라왕)을 노객(奴客)이라고 칭하기도. 광개토대왕은 400년에는 3만 대군을 이끌고 신라원병 요청을 받아들여 가야를 치죠. 그런데 고구려 남하 정책에 대한 당시 백제와 신라의 대응이 좀 다릅니다. 백제는 북위에 밀서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며 대항합니다. 그러나 그 밀서가 발각되 장수왕의 보복을 당하지만 신라는 납작업드렸다는. 결국 백제 개로왕은 아차산(광진구)에서 살해당하고 한성서 웅진으로 천도합니다.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죠.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맞서기 시작합니다.소위 나제동맹으로 1백년간 지속. 그리고 나제동맹은 '성왕 대 진흥왕'(시호에서 느낌이 오죠? 다이네믹 같은 거)이라는 두 걸출한 군왕대에 절정을. 때마침 장수왕 후 고구려는 귀족간 극심한 권력투쟁이 벌어집니다. 안장왕은 피살되고 어떨 땐 2천명이 주살되기도. 이어 영원왕,평원왕,영양왕 시대로 접어듭니다. 이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평양성(장수왕 때 평양천도)의 내성(內城)인 국내성을 신축하고 신진 세력을 양성하죠.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온달,거문고의 왕산악,을지문덕 등등. 이같은 혼란기를 틈타 백제,신라는 한강 일대를 점령합니다,,,때는 백제 성왕,신라 진흥왕 대로 550년 즈음. 고구려 남진으로 백제가 일대를 빼앗긴지 거의 150년만이네요. 그러나 신라는 1백년 동맹을 어기고 백제로 부터 한강 일대를 빼았습니다. 열받은 성왕(공주에서 부여로 천도)은 신라 응징에 들어갑니다. 3만 군사를 아들들에(성왕 사후 오른 위덕왕) 주고는 신라군이 주둔하고 있는 관산성(옥천)을 치게하죠. 그리고 그는,어느날 야밤 아들들을 격려키위해 호위군 50명만 거느리고 관산성으로 향하고. 정보가 샜는지 보은 삼년산성에 주둔해있던 도도(김유신 조부인 무력의 비장)의 매목에 걸려 그의 머리가 베입니다. 역사는 가끔 이리 황당한 것으로 물줄기가 바뀌곤합니다. 전시에,왕이,몇십명 호위받고,그것도 야밤에 나가다니.. 이때부터 백제는 급격한 내리막을,반면 신라의 중흥기는 열리고. 이 즈음 진흥왕이 551년 경 적성(단양)을 탈환 후 공덕비를 세우니 바로 적성비(단양)입니다. 적성비(국보)가 있는 곳이 바로 적성산성. 고속도로 휴게소에 국보가 있다??? ,,,,,,,,네,있습니다. 중앙고속도로 상행선 단양휴게소(성재산 기슭)에요,,,정확히는 휴게소 쪽문을 걸어나와 5분 거리. 적성산성은 일부만 남아있지만 당시는 전략상 온달산성 만큼이나 중요했어요. 북은 남한강,동은 죽령천,서는 단양천에다 배후가 바로 죽령(소백산)이 받치고 있으니까요. (적성산성이 신라가 쌓은 산성이라는 근거로 20키로 떨어진 영춘의 온달산성도 신라가 쌓았다는 주장을 하기도) 죽령 넘은 영남 사람들은 이곳 적성산성을 지나 충주나 제천으로 갔으니 지리적 중요성이야 더 말할 필요가요. 고구려도 절치부심합니다. 빼앗긴 551년에서 40년 지난 후 고토 수복에 들어갑니다,,,총대장이 바로 온달장군. 여기서 의문 하나!! 온달은 정말 바보였을까, 그리고 그 바보가 공주를 취했다고요??? 김부식의 정치적 의도가 들어갔겠죠.분명 온달은 당대 고구려 최고 장수였고. 고구려 조정에서 온달의 등장은 평원왕의 신진세력 육성책의 소산입니다. 온달(溫達,~591),,,,,그의 성은 온씨. 봉성 온씨의 시조로 김제시 금구엔 온씨 집성촌도 있어요. 영원왕 때 태어나서 평원왕 사위가 된 후 많은 전과를 올리다 영양왕 1년에 온달산성서 전사합니다. 영양왕은 을지문덕이 수나라를 물리치던 그 왕. 온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가 유일합니다.우리가 아는 바보 온달 얘기는 다 여기서. 김부식은 산국사기에서 10명의 인물을 열전에 기록했죠.온달도 그 한명. 온달은/신라에 빼앗긴 계립현(峴)과 죽령 서쪽의 고토를 회복치 않고서는 돌아오지않겠다/고 다짐하고 출진합니다. 그리고,,,/아단성(阿旦城) 아래서 날아온 화살을 막고 전사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아단은 영춘의 고구려 지명. 그러면 온달은 평양성에서 어떤 루트로 남하했을까요? 당시 한강 하류는 신라 주력군이 있었으니 상류 산간지역을 거쳤겠죠. 파주~춘천~원주~제천~단양,영춘 이리,혹은 영월을 거처 남한강을 따라 남하했던지. 인근 영월쪽엔 태화산성,왕검성,고성산성 등 고구려산성이 많아요. 그러면 온달산성은 누가 쌓았을까요?신라설과 고구려설로 나뉘어요. 1)석축방식이 경주 남산성,보은 삼년산성과 유사하고 2)인근에 단양 적성산성이 있고, 3)산성이 남한강을 향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신라설을. 그러나 1)고구려 산성의 특징인 치(雉)가 세군데 있고 2)인근에 온달 전설이 너무 많다는 점을 들어 고구려 산성으로 보기도. 그런데 산성 정상에 서면 온달산성 다중적임을 한눈에 느낄수있어요. 정면의 남한강 뿐만 아니라,소백산 능선도 한눈에 들어오기에 남하하는 신라군을 한눈으로 꿰뚤수있다는. 영춘에는 온달 관련 전설이 너무나 많습니다,,,온달이 한두달 머물렀다면 그런 얘기는 없었겠죠. 1)상리나루는 온달장군이 무술을 수련하고 장사 지낸 곳. 온달을 장사지낼 때 관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평강이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생사가 이미 결정됐으니 편히 가라" 하니 관이 움직였다는. 2)온달산성 아래 절벽에 있는 공주굴에서는 온달과 평강이 사랑을 나누었다는, 3)온달동굴(산성 바로 아래 남한강 가에)에선 온달이 무술 수련했고, 4)'쉬는 돌(쉰돌)'은 바위에 윷판이 새겨져 있는데 온달이 후퇴하다가 윷을 놀았다는, 4)하류의 군간(軍看)나루는 온달의 군사들이 파수를 보던 곳이고. 5)군간나루 북쪽의 '선돌'은 온달을 도우려 달려오던 누이가 패전소식에 그만 굳어 돌이 된 것이라는. 6)영춘면 사지원리에 있는 고구려식 계단 적석총인 '태장이묘'는 온달장군의 무덤이라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얘기를 바꿔, 요즘 지방자치 간 역사 소유권을 놓고 티격태격들 하죠. 실제 역사에는 개뿔도 관심없으면서 돈 되니 역사라.............. 1)고려 공양왕릉을 놓고 파주,동해시가 싸우고, 2)홍길동을 놓고 강릉,장성(전남)이, 3)심청전은 옹진군과 곡성군이, 4)요즘엔 대게 놓고,,,울진대게 대 영덕대게 간 원조싸움이,최근엔 포항대게가 가세했고. 5)온달도 그래요. 광진구는 아차산이 온달이 전사한 그 아단성이라며 최근에 온달 동상을 세우고 난리가 아니죠. 아차산성은 아단성에서 음운이 변형되었다는 논리로. 그런데 영춘의 고구려 이름은 을아단현(乙阿旦縣)이여요.이는 삼국사기,고려지,동국여지승람에 근거. 을지문덕 처럼 흔히 乙은 上을 의미합니다,,,그러니 풀면 한강 상류에 있는 아단현이 되겠죠. 삼국사기에 "아단성(阿旦城) 아래서 날아온 화살을 막고 전사했다' 했는데 그래서 아단성이 온달산성이겠죠. 참고로,평양 인근 동명왕릉 옆 진파리 4호분을 북한학계에서 온달평강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역사학 만큼 정치적인 학문도 없죠.( 난 지금 역사를 즐기는 아마추어로 자유) 김부식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를 발췌 정리하면 이래요. <<온 달(溫達)은 평강왕 때 사람으로 얼굴은 우습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고왔다. 밥을 구걸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다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으로 시정(市井)을 오가니,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평강왕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 하니,농담삼아 늘 이렇게 말했다. 항상 우니,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야겠다." <중략> 구구려에서는 3월3일이면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잡은 것으로 신에게 제사 지냈다. 사냥하러 나가자 군사들이 모두 따랐고 온달도 그 동안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남보다 빨리 달렸고,짐승도 많이 잡았는데 이를 따를 자가 없었다.왕이 놀라며 칭찬을 하였다. 이때,후주의 무제(武帝)가 요동으로 쳐들어 왔다.온달이 선봉이 되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다. 감탄하여 말하기를,"이 사람은 내 사위다."하고,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온달이 아뢰기를,"신라가 우리 한강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으니,백성들이 원통해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군사를 주신다면,반드시 우리의 땅을 되찾겠습니다." 떠날 때 온달은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의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한다면 돌아오지않겠다."하였다. 온달은 신라군사와 아단성(峨旦城) 밑에서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공주가 와서 온달의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마음놓고 돌아가소서." 그러자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아니,홀어미를 모시고 있는 촌부를 임금의 부마로 삼다니요? 당시 고구려 왕들은 스스로 태왕(太王)이라 했죠,,,왕 중에 왕이라는,그리고 주변국 왕을 동의(東夷)라 불렀구요. 심지여 고구려 중원비에는 신라왕을 奴客이라 깔아 뭉겼을 정도.한마디로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다는. 그런 고구려 총사령관이 바보였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칭송한 신라 화랑도의 위상하곤 너무 비교되지않나요?? 온달은 일국의 당대 최고 장수였고 많은 공도 세웠습니다. 수나라는 온달이 죽은지 5년 후 고구려를 침략해요.당시는 영왕왕 재위시절.(2차 침입은 612년) 당시 수나라 사신과 대화 내용이 삼국사기에 나와요. "신라가 빼앗아간 땅 수백리를 우리가 되찮았다",,,이리요,이는 당연 온달장군에 의해서겠죠. 온달이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고토를 되찾아오겠다고 말한 그 계립령, 그러니까 월악산 미륵대원 터 인근에 온달무덤으로 전해지는 적석총이 있어요. 또 온달이 전투 후 쉬다 공기놀이를 했다는 공기 바위(1미터)가 있구요. 온달이 단지 온달산성에서만 전투한게 아니라 충주~단양,영춘 까지 중원을 누볐다는 얘기겠조. 삼국사기는 정치적인 산물입니다. '고려사'가 고려를 문어뜨린 세력들이 집필한 것과 일맥이 상통하죠. 저자인,신라 왕실계로 경주 김씨 김부식(1075~1151) 자체가 철저히 정치적인 인물입니다. 삼국사기의 극단적인 실례 하나~~~ 삼국 중 가장 먼저 건국한 나라는?? 초등생도 알듯 당연 고구려,백제,신라 순. 그러면 보수 역사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그 삼국사기에도 그리 서술되었을까? 아뇨!!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백제는 기원전 18년으로 나옵니다. 신라가 가장 앞섰다니,황당하죠? 조선조 선조실록은 둘입니다.선조실록과 수정선조실록 이리. 전임 권력이 쓰고나니 후임 권력이 완전히 뒤집어 다시 쓴거죠.그래서 당시 인물도 영웅에서 역적으로 왔다갔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입니다. 고려에 있어 권력의 중심축이 뒤집어진 시기가 김부식으로 부터 1백년 전인 8대 현종(顯宗,991~1031)때입니다. 천추태우(千秋太后)를 아신지요? 그녀를 다룬 사극이 온달 오픈세트장서 촬영했더군요. 그녀는 중국 유일한 여제인 측천무후 같은 여자였죠. 경종은 자매를 차례로 왕비로 맞았는데 천추태우가 그 한 여인. 경종이 죽어 성종이 뒤를 잇고,성종이 죽자 천추태우의 아들인 17세 목종이 즉위합니다. 목종은 광종의 손자요 경종의 아들인 게죠. 목종을 천추전에서 수렴첨정했기에 천추태우이고. 그녀는 외척인 김치양과 밀애를 즐기다 결국 애까지,,, 그 아들로 하여금 후손없는 목종 뒤를 이으려다 실패하고,,,,와중에 광조에 의해 목종이 피살됩니다. 천추태우는 현종이 대군으로 있던 시절 그를 머리깍아 승려로 만들어 버리고 삼각산 진관사로 보내죠. (북한산 좋아하시는 분들 진관사를 잘 아실터.진관내외동도 진관사에서 유래) 고려에서는 권력 집중을 위해 태자가 정해지면 서자들은 승려로 보내는 게 일반적인 관례였고. 이후 수차례 자객을 보냈는데 진관대사는 그를 지하실에 숨기고 그 위에 침대를 놓고 위기를 면하게하죠. 결국 목종은 신하 강조에 의해 피살되고 현종은 경주 최씨인 최항,최제안 등 신라계에 의해 옹립됩니다. 현종은 신라 왕가 외손으로, 이후 왕조가 끝날 때까지 고려왕조는 그의 피가. 100년 후 경주 김씨 김부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이리 감복해합니다. /현종께서는 신라 외손으로 보위에 오르셨다. 이후 그 자손이 대통을 모두 이으시니 어찌 신라 음덕이라 아니할수있겠는가/ 고려사에는 /모든 것을 끊어 삼한을 다시 세웠다/했는데,한마디로 신라 부활 선언이네요. 현종 이후 권력 지도는 신라계로 바뀌고 그 상징적인 작업이 훈요십조 조작으로 나타나요. 그동안 실체가 없던 훈요십조는 현종이 몽진에서 돌아온 후 전쟁 으로 소실된 실록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나타납니다. 그것도 느닷없이 최항 집에서 나타납니다,,,와우~~국조 유훈록이 사가에서 나타났다??!! 이전 1차 침입이 있었고, 현종 대에 거란족이 2,3차에 걸처 침입해요.3차 때 바로 감감찬이 귀주대첩을. 2차 때 현종은 충청도 거쳐 전라도로 피신하죠.공주,삼례 거쳐 나주로. 역사상 많은 몽진 중 현종 만큼 비참한 몽진도 없었습니다. 당시는 완전 무정부 상태나 마찬가지였고. 생각해보세요,나랏님이라고 빈털털이로 백수 수백을 거느리고 내려왔으니 민폐가 얼마나 심했을까요. 창화현에선 아전에게 병장기를 빼앗기고,적성현에서는 무뢰배들이 그에게 활을 쏘았다 하네요. 공주를 나오면서는 임신한 왕후마저 떼어놓고 피난해야 할 정도였다니. (이건 훈요십조 중 문제 8조의 조작을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했다는 주장이) 이때 모든 신록도 불탔어요,그래서 새로운 실록 복원 작업도 시작되죠. 그 태조실록 복원 작업 시기에 훈요십조가 최항의 집에서 발견되었다며 최제안이 가져와요. 그런데 문제는 둘은 실록 재편찬 당사자들로 같은 정치적 라인이라는 거죠. 거란 침입의 혼란기를 틈타 신라계의 권력강화를 위한 정지 작업이 훈요십조의 조작으로 나타났다는. 훈요십조 각 항목에 당시 상황을 대비해보면 그런 의혹이 더 일어요. 왕건이 죽기 한달전 박술희를 불러 구두로 전했다죠,,소위 훈요십조입니다. 1,2조는 절의 소유권을 놓고 싸우지 말고 함부로 짓지도 마라. 3조는 장자가 불초하며 형제에 계승해도 된다. 4조는 거란 풍습을 익히지 말라. 5,6조는 왕은 서경에 100일 이상 머물고, 연증회 팔관회는 반드시 열라. 7조는 임금 노릇을 열심히 하라. 8조가 바로 특정지역 배척 항목이죠,,,, 즉, " 차령 이남,공주강 밖은(車峴以南 公州江外) 산과 땅이 모두 배역하니 사람 또한 배역한다. 조정에 들어오면 변란을 꿰하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을 막아 난을 일으키니 이들에 벼슬을 주지말라.",,,이거요. "임금이 행차하는 길에 막아 난을 일으키니...",,,이 문구를 보죠. 이는 바로 현종의 몽진 중에 일어난 소요사건들을 그대로 옮긴 거네요. 잘 알다시피 태조는 호족을 회유하고 지역 통합정책으로 왕권을 강화했죠.특히 혼인정책으로요. 그런 그가 분열적인 정책을 유훈으로 남겼다?? 태조부터 현종 이전에는 전혀 차별을 받지않았습니다,,,오히려 후백제계가 주류였죠. 1)태조 등극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하고 왕조 내내 추앙받은 도선은 영암에서 태어나 광양에서 죽었고. (섬진강 매화마을 뒷산인 백운산 옥룡사에서) 2)태조 왕비가 나주 오다련 딸 장화왕후로 그 아들이 2대 혜종이며, 3)태조부터 6대까지 왕실 최고 어른이였던 최지몽도 영암이고 (그는 반란의 음모에서 후왕들을 수차례 구했고 죽어서는 국장에다 경종 옆 종묘에 배향됐죠.) 4)태조는 평소,"나주 40 여군은 오랫동안 나의 울타리같은 곳"이라 했을 정도도 애정을 보였고. 5)팔공산 전투에서 자신의 목을 바치면서 태조를 위기에서 구한 신숭겸(평산 신씨 시조)은 곡성이죠. 태조는 자신의 묘자리를 신숭겸에 주고 장절공이라는 시호를. 잘린 머리를 금으로 만들고 행여 봉분이 도굴될까봐 3개나요,,춘천에 그의 묘가. 살아 생전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태조가 갑자기 노망이 들어 유언으로 특정 지역을 소외시켰다?? 언급한 실례에서 보듯 황당한 거죠. 참고로,"차현이남(車峴以南)과 공주강외(公州江外)"는 해석에 따라 해당 지역 또한 달라집니다.(공주강은 금강) 1)차령 이남으로 해석 충청도 남부와 전라도를. 2)공주강 이남으로 해석 전라도만을. 3)차령 이남과 공주강 사이로 해석 지금의 홍성,보령,연기,부여,공주,청주만을. (이곳은 특히 공주,청주 호족들은 궁예의 기반으로 궁예 축출 후에 반란이 잦았음)
훈요십조 조작 시기를 현종 사후 100년 후인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기술하던 시기로 보기도 합니다. 단재 신채호가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며 아쉬워했던 묘청난을 제압한 인물이 김부식(1075년~1151)이죠. 묘청파는 칭제건원에 자주적 외교를 주창하고 태조 고구려 정통을 이으려는 진취적인 신진 세력이였습니다. 반면, 김부식을 대표로 하는 집권문벌귀족들은 개경 중심의 부패하고 사대적인,그리고 신라 적통 역사관을 지녔죠. 묘청 일파는 서경 천도 승부수를 띄우고 정변을 일으키지만 김부식 수구세력들에 의해 진압되구요. 당연 김부식파들은 권력 강화를 위해 신라 중심의 이데올로기 교본,즉 삼국사기의 저술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겠죠. 당시에 팩트의 왜곡이야 식은죽 먹기,,,21세기 요즘도 여반장인데요 뭐. '거란을 경계하라'는 항목도 그래요. 10~14세기 말까지 대륙에서는 거란,여진,몽고 등 북방민족이 대두해 중원의 한족(漢族)을 압박하죠. 고려는 중국의 역대왕조와 친선관계를 유지했으나 거란에 대해서는 배척했어요. 이유는 고려가 고구려 계승국으로서 거란이 동족인 발해(渤海)를 멸망시켰으니까요. 거란 침입은 모두 태조 사후였죠.1차 침입은 서희의 담판으로 물리쳐요. 2,3차 침입은 현종 대에 있었는데 그는 역사상 최악의 몽진을 직접 겪었기에 거란 항목이 들어갔겠죠. 또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조작될 가능성이 큰 게 형제 상속도 가능하다는 항목이여요. 훈요십조는 "장자가 불초하면 형제 상속도 가능하다"고 했죠. 바로 문종도 형제로 왕위에 올랐는데 문종 전후로 형제 승계가 많았습니다. 동서 고금 형제 상속을 주장하는 왕조는 없었죠. 또 불교행사인 연등회,팔관회는 반드시 지키라했는데 이를 지킨 임금은 거의 없었어요. 그동안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한 자가 바로 현종입니다,,,이상하죠? 또한 사찰을 짖지 말라했는데 김부식등 수많은 호족들과 권문세족들은 개인 원찰을 세웠죠,,,최제안도,최항도. 이처럼 훈요십조는 고려시대 내내 지켜지지도 않았습니다. <훈요십조 내용은 kbs역사스페셜 많이 참조) 그런데 훈요십조 중 8조 특정지역 배제 항목이 처음으로 조선 중기에 이르러 언급되요. 조선 왕 중 가장 비열하고,무능하고 질투심 많은 자가 선조입니다. 이순신이 겪은 고초하며,의병장 김덕령을 모반으로 몰아 죽이고,그래서 홍의장군 곽재우는 전쟁후 숨어버리고,,, 중종의 9번째 서자의 4번째로 태어났으니 왕위를 꿈엔들,,, 열등감이 얼마나 심했던지 열악한 정치적 기반은 술수로 모면했고. 신하 앞에서 뻑하면 하야 선언을 밥먹듯,같이 죽자 윽박지른거죠. 전주에서 태어나 허균,김시습과 함께 조선조 3대 아웃사이더로 통하는 정여립을 아시죠? 1)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능력세습 이였다며 왕권의 세습을 비판했고, 2) 천하에 어찌 주인이 따로 있겠는가?,,,하며 '天下公物說'을, 3)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何事非君論을 주장했던. 정여립의 공화정은 크롬엘의 공화정보다 50년이나 앞섰다고 배운 기억나네요. 그 정여립(1546~1589)의 혁신사상을 구실삼아 1천여명을 주살한 조선조 최대 옥사가 발생합니다,,,기축옥사. 선조는 서인 세력을 이용, 동인을 내치며 왕권을 강화를 노렸고. 서인은 동인 정국을 일거에 뒤집어 엎으려는 속셈이었고,,,한마디로 선조와 서인의 합작품이라는. 이때 실질적인 기획은 송익필이,행동대장은 속미인곡의 정철. 정여립 모반사건은 이후에 그 파장이 크게 나타났죠. 이 사건으로 호남사림은 초토화 되었으며,이후 호남은 정계진출이 막히고 말았으니. 물론 정여립 모반사건은 철저히 조작된거,,,이는 역사학자들도 공히 인정하는. 정여립사건은 당쟁 속에 확대재생산되며 후기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영조 대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 '성호사설'(1769)에서 최초로 훈요십조의 특정지역을 호남으로 언급했으니. 이는 이중환의 '택리지'에도.둘은 한 집안 사람이죠. 이익은 이중환보다 9살 정도 연상이었는데, 친족 관계상 이중환은 이익의 재종손(再從孫). 이익의 영향력은 이중환이 <택리지>에 강하게 반영되었습니다. 팔도를 발로 뛰며 택리지를 저술한 그런 이중환도 함경도,전라도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그리고, 그리고 성호 이익과 이중환은 정통 남인들이라는.............
하신 길에 사극 세트장~~재법 폼나네요.
떠나려니 아쉬워 되돌아보니 멀리 산성이~~~~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단양으로~~~
단양의 특산물 육종마늘 한정식.
마늘 요리가 다양하게 나오는데 사라다도 겨자,당귀 등등 몇가지로.
뭐 마늘이 다양한들 그맛이 그맛이지만.
마늘을 튀기고,절이고,만두 만들고 그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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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rtour
'11.4.1 12:16 AM글이 마니 마니 거칩니다.널리 이해하시길.
2. coco
'11.4.1 6:46 AM와우, 일편과 이편을 따라가는데 숨을 고르기가 힘드네요.ㅎㅎ 많이 배웠습니다. 올해가 이태리 통일 150주년 이어서 움베르토 에코를 인터뷰한 기사를 읽게 되었어요. 이태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스페인, 프랑스, 독립된 시들, 바티칸, 나폴리왕국등 역사적 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다른 지배를 받고 있다가 가리발리에 의해서 19새가 중반, 통일을 이룬거지요.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가 하는 문제는 간단한 문제는 아닙니다. 에코는 이태리의 언어라는 말을 하는데 이태리 사람들은 대부분 통일당시 현재의 이태리말을 쓰지 않았다고 하기도 하네요. 엘리트들의 언어였다고 하고요. 단테의 글을 엘리트 소수들만 썼기 때문에 그 긴세월에도 불구하고 언어가 거의 변하지 않고 이태리 현재의 사람들이 그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통일후 교육과 현재의 티비방송을 통해서 모든 지역의 이태리 사람들이 이젠 모두 이태리말을 하게 되었다고 하고요. 각각의 나라들 마다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역사는 각기 특수하지요. 에코가 뉴욕에 갔을때 택시 기사가 이태리의 적국은 어느 나라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에코는 대답을 선듯 못합니다. 이태리 사람들은 외국을 적국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이웃의 시들, 옆동네 사람들을 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거지요.ㅎ 어쩌면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보편적인 일일 수도 있지요. 이해가 엇갈리고 분쟁이 생기는거요. 단지, 긴장과 경쟁을 좀 조심스럽게 하는게 좋겠지요. 좋은 긴장감있는 이웃과의 경쟁이 나쁠것만은 아니겠지만 오리진에 오리진까지 찾아가기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아 있고요. 그래서 창조적으로 역사를 읽는 그런 시도도 기대되고요. 역사는 왜곡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입장에서 자유롭게 주장되는 거라고 볼 수도 있겠죠. 더 설득력있는 역사가 기존의 역사를 이기게 되면 새로운 버젼이 그때 그때에 따라 정설이 되겠고요. 변치 않는 역사인 것만은 아니겠죠. 그런 다른 담론들을 우리는 계속 리뷰하면서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을 수 있겠고요.
3. 미실란
'11.4.1 9:39 AM여행 다녀온 기분입니다. 음식까지...행복한 봄날 되세요.
4. 하늘재
'11.4.2 12:59 PM온달산성에서 내려다 본 동,서,남,북 풍경이 모두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오관을 통해 전해오는 유혹중 가장 약한것이 시각!! 이라고 하던데...
당장 짐보따리 꾸리고 싶어 지네요...ㅎ
우선 자연 풍광에 매료되고,
역사지리에,,인문지리에,,, 문화지리에...
그리고 wrtour님의 시각으로 본 재 해석 또한 흥미롭군요...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것이 있다면,
새로운 권력을 쥔 자들은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자신들을 그럴듯 하게 미화 시키는
이미지 메이킹이 필요한 법일터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역적이 영웅이 되고,,영웅이 역적이 되어야 하는,,,
마녀사냥감이 필요한 법이겠죠!!
후대의 우리들로서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냉철한 재 해석이 필요한 법 일터이구요....
전략적 요충지라거나,,,
힘없는 국가의 풍부한 자원은 오히려 열강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니...
죄 없이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란 ~~피폐해 지기 일쑤이구요....ㅊ
분명 천혜의 좋은 조건을 갖추었는데 말입니다....
역시 나라가 진정한 의미에서 힘이 있어야해요....
늘 정성들인 긴~~글 감사하게 잘 보고 있습니다~~
꾸~벅~~
용량 부족으로 머리에 쥐가 좀 많이 나긴 했습니다~~~~ 하하~~~~
에너지 과소비로 배가 고프군요...
젓가락 들고 한정식 밥상에 무조건 낑겨 앉습니다...ㅎ5. wrtour
'11.4.5 12:35 AM코코님~~
이태리 독립 관련 말씀하신거 읽다보니 주세페 베르디 오페라 나브꼬(느브네갓살) 이 귓가에 웅웅합니다.그래서 음반 걸었어요,ㅎㅎ.좋은데요.
장미의 전쟁,푸코의 추도 다시 읽고 싶고.
늘 좋은 글 감사하구요.^^
미실란님~~
감사하구요.올 귀농사업 번창하시구요.건강은 기본입니다.^^
하늘재님~~^^
정말 좋아요,가을에 온달산성에 서면 최고일듯요.
산성 정상서 뒤돌아보는 소백산 단풍,상상해보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