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에 이어서>
부도 너머 눈 덮인 산좀 보실레요.
저 골짜기가 '조대감골'이여요,,,
영감,대감,상감의 그 대감입니다.
조대감이라?????
중종 때의 풍운아 조광조를 일컬은다는.
38세에 능주(쌍봉사 소재 이양과 접해있음)에 귀양 후 1달만에 사사되었는데 그 시신이 이곳에 가매장되었죠.
(이순신이 노량대전 전사 후 아산으로 이장 전 남해 관음포에 가매장되었듯이)
역적 시신인데도 쌍봉리에 낙향해있던 학포(學圃)양팽손(梁彭孫,1480~1545)이 거두웠습니다.
그리고 인근 서운태(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제향을.
쌍봉리에는 학포(學圃)가 학문하던 공간 '학포당'이 있고.
양팽손은 22세인 1510년(중종 5년)에 6살 연상 조광조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 후 홍문관 교리를.
기묘사화 직후 고향 쌍봉리로 낙향했구요.
조광조 유배지에서 마지막 한달도 함께 했는데 염,장례,제향도 그의 손으로,,,
1년뒤 시신을 다시 용인 심곡으로.
죽어서도 둘은 함께 했는데,능주 죽수서원과 정암의 고향 용인 심곡서원에도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조광조 사상의 핵심은
지배층의 도덕 재무장운동,,,한마디로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
세조의 찬탈,연산군 폭정,중종반정으로 지배층 부패가 극에 달하자 34세 열혈남아로 참을수가 없었던 게죠.
조광조의 마지막은 참 담백했습니다.
/먼 길 돌아가기 어렵다.관은 아주 얇은 것으로 하라./
그리고 초가 주인에게 감사말 전하고,마지막으로 학포를 찾았습니다.
/양공,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는가. 태산이 무너지는가.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哲人)은 시드는가/
,,,,사마천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는,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하고 사약을 마셨다는.
그리고 공자의 마지막 말은 /아아, 천하에는 오랫동안 도(道)가 없구나/였네요.
이는 조광조가 내밷지는 않았지만 흉중에 심은 마지막 말이기도 하겠지요.
조광조 최후는 허균의 형 허봉이 쓴 야사 <海東野言>에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쌍봉리충신각(雙峰里忠臣閣)~~~
쌍봉사 아랫 마을은 쌍봉리입니다.
29번 국도에서 쌍봉사 길로 들어서면 이곳이 쌍봉리로 한눈에 전통이 밴 마을임을 느낄수 있어요.
고목에 색바랜 충신각,고택,정자가 보이고.
쌍봉사 사하촌으로 한때는 일대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겠죠.
충신각(忠臣閣)은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인각,병자호란 때 전사한 그의 아들 김시협 부자를 기린 사당.
학포당의 외삼문(外三門)~~
은행나무는 당시 학포가 심은 거라네요.
학포의 서재 학포당~~~~
그러고 보니 쌍봉리는 우리 사상사에서 나름의 큰 족적 두개가 맞닿아있네요.
신라하대 선사상과 조광조의 도덕정치.
우리 정치사에서 정암 조광조 만큼 드라마틱한 사람도 없을걸요.
요즘 노통을 얘기해지만 드라마틱에 있어 조광조에 비하면야.
정암이 정계에 있던 기간은 4년에 불과했지만 이후 성리학,아니 사대부 권력사는 그를 시금석으로해 흘렀으니까요.
그는 이미 성균관 시절 부터 낭중지추였죠.
일부에서 그를 조기 기용하려 하자 더 크게 키워야한다며 반대했을 정도였으니.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정암이 처음이자 마지막.
조광조 라인은 무오사화로 죽은 김종직,그리고 그 제자 김굉필을 이어받는 것.
김굉필이 기묘사화 건으로 함북도에 유배와 있었는데 그곳 찰방이 바로 조광조 아버지.
조광조는 여기서 김굉필의 문하생으로.
그런 그에게 중종반정 후 기회가 와요.
그는 중종의 반정공신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대사헌(지금 검찰총장)에 오릅니다.
그 대사헌에 있으면서 반정세력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죠.
1)불교 궁중행사인 기신제를 폐지하고,
2)민간인을 대상으로 이잣놀이를 하던 내수사를 없애고
3)옥황상제,노자에 제사지내던 소격소를 폐지하고,
4)개혁 추진세력 조기 양성차 현량과라는 관료 추천제를 신설하고,
5)위훈삭제(僞勳削除)를 통해 당시 권력들의 토지,노비를 몰수했고,,
위훈삭제란 거짓 공적을 박탈하는 거.
반정 당시를 한번 되돌아볼까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앉치니 중종반정입니다.
조선왕조에서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운 최초 사건인데,이는 신하가 택군(擇君)하는 시발점.
실은 조선조는 왕보다 신하(당파,척족등) 파워가 더 막강했죠.
중종이 왕에 오른 직후의 조회 때는 박종원 등 삼정승이 퇴장한 후에야 왕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이후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면서 무기력한 조선은 계속되죠.
반정으로 쫓겨 강화도서 3달만에 죽은 연산군 얘기를 안할수없네요.
그리 폭군이였을까?
공식적인 연산군 얘기는 <연산군 일기>와 <중종실록>에 나오는데 이게 반정세력들에 의해 쓰여졌으니 뭐.
실록에 들어있는 얘기지만 얼마나 허황된지 그 실례 하나~~
성종의 큰아들이 연산군,큰형이 월산대군입니다.
월산대군에 부인 박씨가 있었어요,,,박씨의 오빠가 반정세력의 우두머리 박원종.
실록엔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겁탈해 얘를 배자 자결케하는 폐륜을 저질러 오라비 박원종이 거사한걸로 나오죠.
근데요,당시 연산군 나이 30대,박씨 나이 60을 바라볼 나이였다는.
당시 여자 나이 50줄이라....감이 오나요?
저 때가 1500년대 초인데,한참을 지나 1700년대 유럽도 평균수명이 40을 넘기지 못했다는.
벌써 황천길이 낼모래인 사람이
애를 뱃다???
월산대군은 박씨와 20년 넘게 살았는데 애가 없어요.물론 후처한테는 있죠.
이는 박씨에 문제가 있다는 거,,,
실록에는 사초에 근거한게 아닌 민가에 이런 얘기가 떠돌고있다고 기술했습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입니다.
박종원 일파가 북한산 자락에서 칼을 간후(그래서 세검정) 당시 북문으로 불린 창의문(현 자하문)을 치고들어옵니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까지 돌파하고 대궐을 장악한 후 곧바로 19살 먹은 진성대군(중종)을 찾아가죠.
연산군 폭정에 늘 노심초사라 집을 둘러싼 군사들에 놀라 자결까지 생각했다죠.
지혜롭기로 소문난 아내 신씨가 이런 어리버리 남편을 안정시키고는 말합니다.
군마 머리가 집쪽으로 향해있지 않고 밖으로 향해있으면 모시러 온거라고.
다행이 군마는 대문 반대 방향,,,쿠테다 당일 이렇게 왕위계승을 통보받고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향했습니다.
로또,로또 하지만 역사상 최고 로또 당첨은 중종일 겁니다,,그야말로 자고나니 영웅이.
어찌나 급했는지 반정 당일의 즉위식 때는 면류관이 아닌 평시에 쓰는 익선모을 썼다죠.
중종이 초기엔 얼마나 허수아비였는지 알수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아시죠??
왕비 아버지가 신수근인데 그는 연산군쪽이라 반정 날 죽임을 당하죠.
신씨는 죄인의 딸을 왕비로 맞을수없다며 반정세력들에 의해 결국 궁밖으로 쫒겨나고.
그리움에 중종은 경회루 누마루에 올라 인왕산 신씨의 사가를 응시하곤했는데
이를 안 신씨가 자신의 홍의를 바위에 걸어놓으니 치마바위라는.
반정이 성공하면 다음 차례는 논공행상이 벌어지죠.
논공행상이란게 부풀어지기 마련,,,자파 세력확대를 위해.
반정세력들은 일가친척 등 자파를 무더기로 공신에 올렸죠,,,무려 117여명.
힘없는 중종이야 어쩔도리 없었을 터.
조선초는 토지개혁으로 일시적이 나마 개인에 땅이 나눠졌죠.
문제는 세조찬탈 등 정권쟁탈전으로 많은 공신이 양산되고 권문세가의 횡포로 토지,노비들이 바닥났다는.
벌써 당시는 노비만 전 인구의 1/3을 차지했는데 그 노비를 권문세족들은 수천을 거느리기도.
아시나요? 세계적으로 가장 악랄한 노예제도를 지닌 국가가 인도와 조선이였다는 사실.
자국민을 노예로 삼은 나라는 인도 제외하면 조선밖에 없었을걸요.
보통은 전쟁 포로나 국사범 정도를 노예로 삼죠.
인간의 바른 본성을 이끌어낸다는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라? 아이러니네요.
성리학은 간고의 시대에 지배층의 욕망을 절제하고 공존을 찾는 과정서 생긴 학문입니다.
중종은 사림을 양성해 훈구에 맞서기 위해 조광조를 후원합니다.
신진 사림을 통한 반정공신들을 통제하는 이이제이네요.
날개를 단 조광제는 훈구세력에 맞설수 있는 신진 세력 양성을 위해 취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를 도입합니다.
과거로는 너무 느리니 추천제로 자파세력을 키우려구요.
대사헌에 오른 후에는 공신 117명 중 71명을 취소하고 노비,전답응 환수합니다.
이성의 시대 20세기,,,금융실명제,종합소득세에도 반발이 그리 드셌는데,추측이 가나요?
4년도 안되게 극적인 숙정이 이뤄지다 보니 그 반발이야.
중종 조차도 신진세력에 휘둘릴까봐 겁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한달도 안돼 위훈삭제(僞勳削除)건이 결정적으로 실각합니다.(기묘사화)
결국 위훈삭제는 일주일만에 취소되고,현량과로 등용된 관료들은 쫓겨나고, 조광조는 유배를.
당시 나이 37세,그리고 다음 해에 사사.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술계를 말하지않을수없네요.
走肖는 趙를 파자한 것,,,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남곤 등 훈구세력들은 중종이 흔들리는 것을 알고는 간계에 들어간거죠.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을 쓰고 벌레가 먹게한 다음 이를 궁궐에 띄워보냈다는.
자연의 섭리를 곧 하늘의 뜻으로 여긴 당대인지라 보통이 넘는 간계네요.
물론 이는 야사에 나온 얘깁니다.
사실이라면 궁궐에 띄워 보낸 하천은 경복궁 금천이겠네요.(광화문과 근정문 사이)
사찰이나 궁궐은 지존이 사는 곳이라 속세와 구분짓기위해 대궐 정문 지나서 작은 천을 만듭니다.
그래서 禁川~~
중종의 시호는 中宗입니다.
시호에서 벌써 어리버리하고 사림과 훈구에 양다리 걸치며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을 읽을수 있네요.
전기를 볼때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상대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조광조 38세 졸,,,37~38세에 죽은 자들이 많아요.
모짜르트,멘델스죤,카르멘의 비제,쇼팽,,,,
고흐,라파엘로,로코코를 꽃피운 와토,물랭루즈의 화가 로트랙도.
'프랑스 문학을 100년이나 앞질러버렸다' 다는 찬사와 함께 베를렌 동성애자 랭보까지............
학포의 그림 <산수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학포의 산수도에도 시대상이 뭍어납니다.
풍월하는 문인화에 시대상이라???사실 현실을 벗어난 예술이 어디 있기나했던가요.
그림은 절벽 아래 강산에 배가 한척 있네요.
배에는 뱃사공이 노를 젓고,산천 구경나온 나그네가 타고 있습니다.
절벽에는 소나무 몇그루와 집이, 먼 깊은 산에 구름이 덥혀 있고.
학포당에서 그렸는데 산수도 우상(右上)에 있는 화제(畵題) 말미는 이리 끝맺었어요.
/고깃배야 오지 마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
기묘사화 후유증이 저 산수화에도.
조광조 복권을 주장하다 삭탈관직된 후 낙향한 그의 심사를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조광조는 14년 지기 학포를 이리 평했네요.
/얘기하면 난초의 향기가 난다.비 개인 후 가을 하늘이요,얕은 구름이 걷친 후의 달같은 사람이다./
나무는 소나무입니다.
소나무는 사군자에 들어가진 않치만 사대부들 소나무 사랑은 유별나죠,,,
으뜸이라는 뜻의 '솔'~.
소나무의 덕성을 본받고 싶은.
이는 소나무가 우리나라의 대표 수종이고
오래 살아서가 아닐겁니다.
소나무는 성장 방식이 독특합니다.
늘푸른 나무지만 보이지않게 은밀히 잎을 갈이치우죠,,,떨어진 그 잎을 불소시게로 사용하고.
남이 눈치체지 못하게 은밀하게 잎을 떨어 뜨리는 주도면밀을 칭송하는 거죠.
학포는 문장 외에 시화에 능했습니다.
조선 중기 윤두서(윤선도의 아들에 손자),말기의 허련으로 이어지는 남종화단의 종조입니다.
현재 남겨진 10여점은 한국회화사의 한 족적이구요.
재밋게도 '송하보월도'로 유명한 이상좌 호도 학포(學圃)입니다.
같은 시대를 산 둘은 중종 때 수묵산수화의 문인 대표화가.
선비들의 호에는 그의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채마밭을 배우고 일군다'는 學圃엔 이상좌,양팽손의 그런 자연관이 들어있습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A장조
첼로,로스트로비치
피아노, 리히터
3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