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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에서 한나절(1200년전 지존석조물을 보다)

| 조회수 : 1,679 | 추천수 : 26
작성일 : 2011-02-21 17: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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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만 없으면 어느 종가집같겠네요.
어딜까요?

화순군 쌍봉사(雙峰寺,이양면 쌍봉리)입니다.

정말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 드디여.

쌍봉사 하면?? 금방 3층 목탑과 철감국사 부도가 떠오르죠. 

잘 모르시는 분을 위해 일화 하나 소개합니다.

유홍준님이 몇년전 중앙일보에 기고한,,, 5년은 더 된 글의 도입부가  대충 이러합니다.

당시 영국박물관 전현직 박물관장이 학술발표 차 한국을 찾았는데 막간을 이용 유적지를 가고싶어했다네요.

유씨는 경주유적,안동권의 고택,백제 유적 그리고 남도산사,,,이리 네곳을  추천하며 한곳을 선택하라는.

당연 경주를 택하리라 예상했는데 뜻밖에도 남도 산사를 택했고.

그런데 좀 난감한 일이 생겼다는,,, 당일이 북적이는 초파일 이여서요.

잠시 고민에 들어갔지만 쌍봉사를 생각하니 걱정이 확 가셨다네요.

그들이 절대 실망하지않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고.


난 지금 그런 쌍봉사를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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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주차장이 거슬르긴 하지만 포근하게 안겨있네요.

얕은 야산(사자산)을 배경으로 고즈넉하게.

요사채 굴뚝에서 연기라도 피어오를시라면 정말 한 그림하겠어요.

여느 명산의 명찰처럼 위압감이라곤 찾아볼수없는 게 장삼이사들의 도량입니다.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지리적 개념이 서질않으실거여요.

광주광역시 남쪽으로 화순군이 있어요.

해방공간서 최초 반미투쟁이 일어났던 화순탄광이 여기에 있죠.

화순읍에서 서남남쪽으로 29번 국도를 타고 한시간 정도면 차(茶)산지 보성군이 나와요.

쌍봉사는 그 중간 쯤,국도를 벗어나 쌍봉리를 왼편으로 하고 산길 따라 10여분 거리 끝 지점에 있습니다.

예전엔 쌍봉사 까진 당연 농로뿐이였으니 걸었어야.

지금은 쌍봉사 앞으로 찻길이 생겼는데 20여분면 보성군 율어면,더가면 벌교가 나옵니다.

율어면??

율어는 태백산맥에서 염상진,하대치의 해방구요.

지난해 여름 태백산맥 한질을  다시 샀습니다.

예전 것은 누가 가져갔는지 이빨이 몇개 빠져서요.

역시나 명작은 시공에 구애받지않더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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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사의 상징 10미터 높이의 삼 층목탑~~~


목탑,,,일본서야 일반적이지만 우리로서는 보기 힘들죠,, 속리산 법주사 팔상전(5층) 정도.

혹 느낌이 오지않나요??

페놀로사라는 동양미술사가가 있어요.

그는 7세기 일본의 수도였던 나라에 있는 약사사(藥師寺) 삼층목탑을 보고는 그만 굳었어요.

 

/아,저건 얼어붙은 한 곡의 소나타다!/

약사사 삼층목탑도 시간을 거스르면 쌍봉사 삼층목탑과 만나게 되겠죠.

나라의 많은 고건축물이 백제계니까요.

그러니 쌍봉사 탑은 황룡사 9층목탑을 재현한다면 당연 기준작이.

풍수상으로 범선인 쌍봉사에서 목탑은 돛이니 쌍봉사의 상징이여요.
(청주시는  무심천을 항해하는 범선형국인데 중앙동에 있는 철당간(국보)이 돛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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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기 이전과 이후~~~~~

아~그러나 그 삼층목탑은 숭례문과 같은 운명을 타고말았어요.

사진은 타기 직전과 복구 후 모습이구요.

어떠시나요? 시각화 된 한곡의 소나타 맞나요??

옛 사람에 사찰의 당간이나 탑은 등대같은 존재였어요.

그래서 산모퉁이를 돌아선 길손의 시야에 들어오는 저 목탑은 한편의 장엄한 오페라 서곡이였을지도.

불탄 사연이 참 기구하죠.

숭례문이야 개발비에 눈이 먼 속물로 불탔지만 쌍봉사는 치성드리던 노파에 의해.

남도에 있는 소규모 산사에 시주다운 시주가 들어온 때는 80년대 후반 부터였다네요.

때는 1984년,,,놀랍게도 쌍봉사엔 비구니 둘만 거주해 있었는데 초파일 제수 마련을 위해 탁발 나간 사이에 그만.

아랫마을(쌍봉리) 할머니가 촛불을 켜 놓고 치성들이다가 졸으셨는지.... -_-

그때 일화 하나~~

와중에서 지나던 농부가 양은솥을 머리에 쓰고 불길 속으로 들어가  삼존불을 구했는데,

그때 대웅전 안에서 /사람 살려! 사람 살려!/하는 소리가 났답니다.

그 농부가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가 사람을 구했는데 나와서 보니 그것은 불상이었다는.


 

그런데 신구가 좀 차이나지 않나요?

지붕을 보세요!

1962년 해체수리했는데 숭례문을 다시 고친 시기와 비슷.

해체 당시 상량문이 발견 되어 숙종 때(1690)에 중창되고,경종 때(1724)에 삼창되었음을 알 수 있었고.

수리 당시 작성한 도면을 바탕으로 1986년에 복원했죠.

그런데 옛 대웅전과 지붕의 모습이 다르네요.

옛 대웅전은 지붕 양 옆에 삼각형 박공(그리스 신전에선 페디먼트)이 만들어진 팔작지붕이었어요.

하지만 새 것은 네곳의 기왓골이 가지런히 꼭대기에 모이는 사모지붕의 형태입니다,,,마치 석탑의 상륜부처럼.

이리 바뀐 것은 해체수리하면서 과거 사모지붕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시각적으론 삼각형 박공이 드러나는 예전이 훨 좋네요.

방화 이전은 국보였으나 새 건축물은 당연 취소되었다는.

웃기게도 같은 운명인 숭례문은 국보1호 지휘가 유지된다죠.

21세기 건물을 국보라니 그것도 '1호',,,이런 반문화적인 작태가 또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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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가까이~~~

탑이지만 사방 한칸의 대웅전이로 사용하고있습니다.

원래는 삼층전(三層殿)으로 불리며 목탑구실이였죠.

황룡사 9층목탑,나아가 일본 현존 가장 오래된 목탑인 호류지(法隆寺) 목탑인 오중탑과도 연결이 서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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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보이는 법륭사 목탑~~~

 

교토 보다 더 오랜 서기 7세기 초 일본의 수도 였던 나라에 있는.

나라에는 일본 문화재의 20%, 국보만 40점이나 있,,당연 나라는 백제와 연결되고.

쌍봉사 3층목탑하고 어떤 연결고리가 보이지않나요?

 

법륭사는 우리와 너무 친숙합니다.

1)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있던 곳.

2)동양의 비너스,목조 백제관음이 있는 곳.

3)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 금당(가운데)이 있는 곳.

4)일본 최고(最古) 목조탑 5중탑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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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해 보이죠??

당우들이  하나 같이 위압의 수직이 아닌 수평으로 경영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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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석축들은 당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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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녁에서만 볼수있는 싱그런 겨울풍경.

겨울의 암회색 단조로움을 대나무가 푸르름으로 채색하고 있네요.

저 길 따라 5분 오르면 1200년 전 석조물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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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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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차나무에서 나는 새순으로 차를 만들면??

대나무 이슬 먹고 자라니 죽로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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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차나무가 자라고~~~.

 

철감선사 부도는 저 담장 안에 있습니다.

제법불이( 諸法不二)입니다.

차( 茶) 와 선( 禪) 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닌 다선일미( 茶禪一味).

철감선사는 죽어서도  다선삼매( 茶禪三昧)네요.

 

차나무는 은행나무처럼 독성이 있어 벌레가 없죠.

독성을 삭혀야 하기에 

무쇠솥에 찻잎을 넣고 두손을 솥 안에서 주무르며 덖어내는데 덖음질만도 일고여덟번 반복하고.
그래서 업으로 사는 사람들은 덖음질 열로 인해 손마디가 휘여져있다죠.
이쯤되면 계율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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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하대 1200년전의 작품~~~~

 

2,3미터,,,무덤의 주인공은 쌍봉사를 일으킨 철감선사 (798∼868),,, 호가 쌍봉. 

단위 석조물 중 가장 아름답고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 수작입니다.

부도로는 유일한 국보.

미술사학자들은 신라하대를 흔히 '부도의 시대'라 부르죠.

부도는 선승의 무덤인데,그만큼 조형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이때 많이 만들어졌다는 뜻이겠지요.

철감선사 부도는 명작의 명작으로 손꼽힙니다.

 

잠시 부분도로 한번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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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아래) 위에서 사자가 놀고있네요.

사자 옆으로 기둥을 세워 구획했는데 특이하게도 연잎을 말아서,,,이런 기둥이 빙둘러 여덟 개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8마리 사자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제 다리를 무는 등 천진스럽게 놀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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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석의 가릉빈가(극락조)~~~

 

가릉빈가들은 피리,나팔,생황을 연주하고 있는데 어떤 것은 장구를 치고있어요.

활짝 핀채로 하늘을 향한 연꽃잎(앙련,仰蓮)들이 8각형을 이루며  이 가릉빈가들을   받치고 있고.

가릉빈가는 안상(眼像,사람 눈모양)의 액자를 만들어 그 안에.

 

가릉빈가 아시죠?

새의 몸체에 사람의 몸과 팔을 가졌어요.

어린 아이의 몸체에 새의 날개를 지닌 기독교의 천사처럼.

사이렌처럼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 극락에 사는 불가의 상징새입니다. 

가릉빈가,날개달린 천사도 그러하지만 반인반수는 고대 인류문명의 창작물이죠.

고대 이집트나 근동에선 반인반수가 초인적인 존재였지만,

그리스에 이르러서는 인간과 대비되는 동물적 본성이나 미개함의 상징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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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 몸돌에 공양천인상,사천왕상,비천상,자물쇠 달린 문(문비)을 새겼네요

몸돌도 그러하지만 8면을 구획하는 기둥도 배흘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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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기와지붕을?

망자가 이승과 같은 집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죠.

지름이 2cm남짓한 막새기와 안에 8엽의 연꽃무늬를 새겼네요.  

처마밑에는 목조건축물처럼 서까래와 부연을 만들었고.

대단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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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숙미의 극치 비천상(위쪽)~~~

자 어떠 시나요??

간결히 군더더기 하나 없으면서도 표현할건 다했네요.

화감암을 떡 주무르듯 그  정교함이란 석공의 신앙적 발원이 아니고서야 어찌,,, 감탄!

 

그런데요,저 부도엔 한시대의 정치,문화,사상,종교사가 오롯히 들어있어요.

당시로 한번 들어가 볼까요?

저 부도가 세워질 때는 통일신라가 망하기 직전 9세기로 소위 신라하대입니다.

아시죠? 격변의 신라하대 시대상들을.

왕은 신하에 의해 수시로 피살되고,경주 중앙권력의 힘이 빠지면서 지방 호족들이 발흥하던 시기요.

이곳 쌍봉사에서 가까운 완도 청해진의 장보고도 그 와중에서 피살되었고.

귀족들의 사치는 극에 달했고,백성들은 수탈에 시달리고.

백성들 봉기에,,기회를 엿보던 지방 호족들은 견훤의 후백제,궁예의 태봉 등을 세웠고.

그 정점이 바로 개경 호족 왕건의 고려 건국이구요.

그런 호족이 발흥하게된 계기가 이래요.

신라는 엄격한 신분사회,,,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3두품,,,권력들도 이리 나뉘니 이를 골품제라.

신분에 따라 직책, 결혼, 심지어 집의 규모까지 정해졌죠.

왕은 처음에는 당연 성골에서,그런데 성골 숫자가 줄어 선덕,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의 시대는 끝.
김춘추가 왕에 오르면서부터 진골의 시대가 열리고. 삼국통일을 이룬 후 한동안 평화가 왔지만 이도 잠시.


김춘추 이래로 진골 중심의 권력은 신라하대로 이르면서 권력과점화가 심화되요,,그들이 다해먹는다는.

그러나 지식인  중심의 6두품은 귀족층의 일원으로 권력의 토대였음에도 여전히 신분적 제약을 크게 받았다는.

17개의 관등 중 제6관등까지만 오를 수 있었으니,,,요즘으로 치면 차관급까지.

낮은 것은 아니었지만,더 오를수 없는 것에 대한 신분적 차별을 느꼈고.

6두품을 '득난'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엔 주요 직책을 얻기가 어렵다는 자조적인 의미가.

유학은 당시 당 문물 유입과 유일한 문자인 한자를 깨치는 수단이였기에

6두품들은 대부분 유학을 공부했는데 문서수발이나 행정실무를 담당해야했다는.

반면 불교는 '왕즉불(王卽佛)' 기치 아래  왕실 이데올로기를 담당했고,그리고 그 불교는 진골이 장악했다는.

이렇듯 유교는 삼국시대에는 통치 이념은 아니었죠,,통치 이념은 불교.

그러니 6두품은 권력핵심에서 늘  찬밥.

그래서 그들은 관직을 얻고자 유학을 공부하였다는,,,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강수,설총입니다.

신라하대에 이르자 정치적 혼란으로 6두품의 설 자리가 더 좁아졌죠.
국내서 유학 공부로서는 약발이 안서니 아예  당나라 유학.

유학가서 빈공과(외국인 위한 과거)에 합격하면 외국인에도 벼슬을 주니, 이를 기반으로 귀국후 권력를 얻자는 계산.

한마디로 중앙 권력독점으로 신분상승의 틈조차 없자 6두춤 이하 지식인들은 돌파구를 당에서 찾은거라는.

마치 60,70년대 미국 유학 러시처럼.

최치원,그리고 견훤의 책사 최승우, 왕건의 책사 최응이 대표적,,,최치원과 최승우는 같은 날 같은 배를.

보통 당으로 배가 떠나는 시기는 북서풍이 부는 10월부터 2월까지.

신라에서 소주까지는 배로 1,500리, 결국, 6두품들은 유학으로,승려들은 선불교로 무장해 지방호족과 연합,중앙권력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결국 이들의 승리는 고려 건국으로 이어졌고.


 

통일신라는 교종인 화엄종 천하~~.

화엄종은 교학과 염불 중심으로 '왕즉불' 즉 왕은 곧 부처였다는.

그러니 불사(佛事)는 당연 국가적 사업 ,,, 불국사,석굴암 총책임자가 총리 김대승이였듯이 .

왕사,국사는 왕의 최측근으로 통치의 이데올로기적 수반,,, 자장,의상등이 대표적.

자장이 경주서 떨어진 태백산,오대산,설악산 일대의 사찰을 세운 이유도 변방을 지키고자하는 통치적 고려였죠.

그는 오대산 월정사,태백산 정암사,설악산 신흥사 등등을 세웠고.

왜 중앙이 아닌 변방에???

사찰은 변방,접경지에 대한 통치의 첨병역할을 수행했으니까요.

그래서 의상의 화엄십찰(十刹)도 양양 낙산사 등 변방에 많고 .

와중에 당나라에서는 교종에 반기를 들고 신사상 선종이 싹트고있었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온 후 양무제의 추격을 피해 숭산 소림사에 들어가니 선종 종조가 됩니다.

선(禪)이요?

/무엇이 조사(달마대사)를 서쪽에서 오게했습니까?/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2,3,4,5대를 거치고 6조 혜능에 이르러 남종선,북종선으로 나뉘는데 혜능은 남종선의 종조가 됩니다.

이어 8조 마조 도일, 서당 지장으로 이어지는데 신라하대의 선불교는 바로 서당 지장 것이 들어와요.

마조 도일의 이 한마디에 선불교의 핵심이 있네요 

자심즉불(自心卽佛)~~~ '타고난 마음이 곧 부처'이니 인간 평등이죠.

달마를 시작으로 2백년만에 '범인도 부처가 될수 있다' 했으니 사상사에서 엄청난 사건 아닌가요?

신라 하대 도의선사는 바로 서당 지장에서 배워 821년에 귀국하니 도의는 이땅 선종의 할아버지가 됩니다.

그런데 도의선사의 신사상은 물좋은 경주가 아닌 설악산에서 싹을 틔워요.왜 변방에서???

'왕 외에 또다른 부처라니??',,,경주 권력 입장에선 당치도않은거죠,,, 빨갱이도 이런 빨갱이가 없네요.

그래서 도의선사는  위험한 서라벌 피해  설악산 골짜기 양양 땅 진전사로 들어갑니다

때마침 무한 권력투쟁으로 서라벌의 힘이 약해지면서 지방호족의 발흥이 시작되요. 

당에서 들어온 신사상 에선 '누구나 一家를 이룰 수 있다'했으니 그들로서는 왕에 대한 욕심도 생겼겠죠.

호족들은 앞다퉈 귀국한 선승들을 모시고 자신의 원찰을 건립하는데 바로 九山에 禪門,,,

9명의 유학파 선승이 호족의 후원으로 자신의 문중 사찰을 열었다는 뜻. 

장흥 보림사를 필두로 문경 봉암사,원주 법흥사,남원 실상사,곡성 태안사,보령 성주사,강릉 굴산사 등등.

왜 장흥 보림사가 필두였을까요??

당시 선승들은 장보고 선단을 이용했듯 장흥과 지척인 완도 인근이 당시 선진 당문물이 들어오는 곳이였기에.

당연 보림사는 장보고의 원찰이였고,,,보림사와 쌍봉사는 차로 30분 거리.

이리 장보고가 이땅에 끼친 영향은 비단 상단에 있지만은 않죠.

호족들은 자신의 이미지같은 철불을 주조하고 자신의 원찰 을 통해 더욱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선승들은 신격화 차원까지 이르는데 그 결과물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보고있는 저 부도입니다.

당연히 2세기를 앞선 자장,의상,원효의 화엄사상에선 고승들도 우주의 미물이기에 불과하기에 부도가 없구요.

그리고 이들 보다 2백년 앞서 당에 유학한 자장,의상은 당진,서산 등 서해를 건넜지만

이들은 장보고의 선단이 있는 남해 완도 청해진에서 떠났고.

부도의 주인공 철감선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와 장보고전에도 나와요.

철감선사 도윤(1798~868)은 헌강왕(825) 때 당나라 양자강 하류 소주(蘇州) 쌍봉사에서 공부했어요.

847년 범일국사와 함게 돌아와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獅子山門)을 쌍봉사에서 열고,,, 71세로 경문왕 때 입적.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은 영월 법흥사로 알려져있는데 왜 쌍봉사가??

바로 철감선사의 제자 한분이 영월로 넘어가 새로운 사자산문을 열였다는.

철감(澈鑒)은 죽어 경문왕이 내린 시호입니다.

범일국사는 바로 강릉 굴산사 개창조.

굴산사 아시죠?그곳에 우리나라 당간지주 중 가장 크고 우람한 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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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탑 옆에 있는 비좌와 이수(螭首)~~

비문이 새겼있는 비석은 사라졌네요,,,비좌 위에 비문 몸돌,그 위에 지붕같이 얹혀진 것이 이수입니다.

몸돌은 사라지고 이수를 받치고 있는 거북 발좀 보실레요.

왼쪽 발은 발가락을 땅에,오른발은 위로 쳐들고 있네요,,,힘차게 전진하고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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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너머 눈 덮인 산좀 보실레요.

저 골짜기가 '조대감골'이여요,,, 영감,대감,상감의 그 대감입니다.

조대감이라?????

중종 때의 풍운아 조광조를 일컬은다는.

38세에 능주(쌍봉사 소재 이양과 접해있음)에 귀양 후 1달만에 사사되었는데 그 시신이 이곳에 가매장되었죠.

(이순신이 노량대전 전사 후 아산으로 이장 전 남해 관음포에 가매장되었듯이)

역적 시신인데도 쌍봉리에 낙향해있던 학포(學圃)양팽손(梁彭孫,1480~1545)이 거두웠습니다.

그리고 인근 서운태(서원터) 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제향을.

쌍봉리에는 학포(學圃)가 학문하던 공간 '학포당'이 있고.


 

양팽손은 22세인 1510년(중종 5년)에 6살 연상 조광조와 같이 사마시에 합격 후 홍문관 교리를.

기묘사화 직후 고향 쌍봉리로 낙향했구요.

조광조 유배지에서 마지막 한달도 함께 했는데 염,장례,제향도 그의 손으로,,, 1년뒤 시신을 다시 용인 심곡으로.

죽어서도 둘은 함께 했는데,능주 죽수서원과 정암의 고향 용인 심곡서원에도 함께 배향되었습니다.


 

조광조 사상의 핵심은  지배층의 도덕 재무장운동,,,한마디로 공자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것.

세조의 찬탈,연산군 폭정,중종반정으로 지배층 부패가 극에 달하자 34세 열혈남아로 참을수가 없었던 게죠.

조광조의  마지막은 참 담백했습니다.

 /먼 길 돌아가기 어렵다.관은 아주 얇은 것으로 하라./

그리고 초가 주인에게 감사말 전하고,마지막으로 학포를 찾았습니다. 

/양공,어찌 이토록 늦게야 오시는가. 태산이 무너지는가.양주(梁柱)는 꺾이는가. 철인(哲人)은 시드는가/

,,,,사마천 사기(史記)에 나오는 공자의 마지막 노래를 부르고는,

/양공, 신이 먼저 갑니다/,,,,하고 사약을 마셨다는.
그리고 공자의 마지막 말은 /아아, 천하에는 오랫동안 도(道)가 없구나/였네요.
이는 조광조가 내밷지는 않았지만 흉중에 심은 마지막 말이기도 하겠지요. 
조광조 최후는 허균의 형 허봉이 쓴 야사 <海東野言>에 자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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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봉리충신각(雙峰里忠臣閣)~~~

쌍봉사 아랫 마을은 쌍봉리입니다.

29번 국도에서 쌍봉사 길로 들어서면 이곳이 쌍봉리로 한눈에 전통이 밴 마을임을 느낄수 있어요.

고목에 색바랜 충신각,고택,정자가 보이고.

쌍봉사 사하촌으로 한때는 일대의 경제 문화 중심지였겠죠.

충신각(忠臣閣)은  진주성에서 전사한 김인각,병자호란 때 전사한 그의 아들 김시협 부자를 기린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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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포당의 외삼문(外三門)~~

은행나무는 당시 학포가 심은 거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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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포의 서재 학포당~~~~

그러고 보니 쌍봉리는 우리 사상사에서 나름의 큰 족적 두개가 맞닿아있네요.
신라하대 선사상과 조광조의 도덕정치.
우리 정치사에서 정암 조광조 만큼 드라마틱한 사람도 없을걸요.
요즘 노통을 얘기해지만 드라마틱에 있어 조광조에 비하면야.
정암이 정계에 있던 기간은 4년에 불과했지만 이후 성리학,아니 사대부 권력사는 그를 시금석으로해 흘렀으니까요.

그는 이미 성균관 시절 부터 낭중지추였죠.
일부에서 그를 조기 기용하려 하자 더 크게 키워야한다며 반대했을 정도였으니.
이는 우리 역사에서 정암이 처음이자 마지막.
조광조 라인은  무오사화로 죽은 김종직,그리고 그 제자 김굉필을 이어받는 것.
김굉필이 기묘사화 건으로 함북도에 유배와 있었는데 그곳 찰방이 바로 조광조 아버지.
조광조는 여기서 김굉필의 문하생으로.
 

그런 그에게 중종반정 후 기회가 와요.

그는 중종의 반정공신들에 대한 견제책으로 대사헌(지금 검찰총장)에 오릅니다.

그 대사헌에 있으면서 반정세력을 향해 칼날을 휘두르죠.

1)불교 궁중행사인 기신제를 폐지하고,

2)민간인을 대상으로 이잣놀이를 하던 내수사를 없애고

3)옥황상제,노자에 제사지내던 소격소를 폐지하고,

4)개혁 추진세력 조기 양성차 현량과라는  관료 추천제를 신설하고,

5)위훈삭제(僞勳削除)를 통해 당시 권력들의 토지,노비를 몰수했고,, 위훈삭제란 거짓 공적을 박탈하는 거.


 

반정 당시를 한번 되돌아볼까요.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앉치니 중종반정입니다.

조선왕조에서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운 최초 사건인데,이는 신하가 택군(擇君)하는 시발점.

실은 조선조는 왕보다 신하(당파,척족등) 파워가 더 막강했죠.

중종이 왕에 오른 직후의 조회 때는 박종원 등 삼정승이 퇴장한 후에야 왕이 일어날 정도였으니.

이후 신권이 왕권을 압도하면서 무기력한 조선은 계속되죠.


 

반정으로 쫓겨 강화도서 3달만에 죽은 연산군 얘기를 안할수없네요. 그리 폭군이였을까?

공식적인 연산군 얘기는 <연산군 일기>와 <중종실록>에 나오는데 이게 반정세력들에 의해 쓰여졌으니 뭐.

실록에 들어있는 얘기지만 얼마나 허황된지 그 실례 하나~~

성종의 큰아들이 연산군,큰형이 월산대군입니다.

월산대군에 부인 박씨가 있었어요,,,박씨의 오빠가 반정세력의 우두머리 박원종.

실록엔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겁탈해 얘를 배자 자결케하는 폐륜을 저질러 오라비 박원종이 거사한걸로 나오죠.

근데요,당시 연산군 나이 30대,박씨 나이 60을 바라볼 나이였다는.

당시 여자 나이 50줄이라....감이 오나요?

저 때가 1500년대 초인데,한참을 지나 1700년대 유럽도 평균수명이 40을 넘기지 못했다는.

벌써 황천길이 낼모래인 사람이 애를 뱃다???

월산대군은 박씨와 20년 넘게 살았는데 애가 없어요.물론 후처한테는 있죠.

이는 박씨에 문제가 있다는 거,,,
실록에는 사초에 근거한게 아닌 민가에 이런 얘기가 떠돌고있다고 기술했습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입니다.

박종원 일파가 북한산 자락에서 칼을 간후(그래서 세검정) 당시 북문으로 불린 창의문(현 자하문)을 치고들어옵니다.

경복궁 북문인 신무문까지 돌파하고 대궐을 장악한 후 곧바로 19살 먹은 진성대군(중종)을 찾아가죠.

연산군 폭정에 늘 노심초사라 집을 둘러싼 군사들에 놀라 자결까지 생각했다죠.

지혜롭기로 소문난 아내 신씨가 이런 어리버리 남편을 안정시키고는 말합니다.

군마 머리가 집쪽으로 향해있지 않고 밖으로 향해있으면 모시러 온거라고.

다행이 군마는 대문 반대 방향,,,쿠테다 당일 이렇게 왕위계승을 통보받고 가마에 태워져 경복궁으로 향했습니다.

로또,로또 하지만 역사상 최고 로또 당첨은 중종일 겁니다,,그야말로 자고나니 영웅이.

어찌나 급했는지 반정 당일의 즉위식 때는 면류관이 아닌 평시에 쓰는 익선모을 썼다죠.


 

중종이 초기엔 얼마나 허수아비였는지 알수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인왕산 치마바위 전설 아시죠??

왕비 아버지가 신수근인데 그는 연산군쪽이라 반정 날 죽임을 당하죠.

신씨는 죄인의 딸을 왕비로 맞을수없다며 반정세력들에 의해 결국 궁밖으로 쫒겨나고.

그리움에 중종은 경회루 누마루에 올라 인왕산 신씨의 사가를 응시하곤했는데

이를 안 신씨가 자신의 홍의를 바위에 걸어놓으니 치마바위라는.


 

반정이 성공하면 다음 차례는 논공행상이 벌어지죠.

논공행상이란게 부풀어지기 마련,,,자파 세력확대를 위해.

반정세력들은  일가친척 등 자파를 무더기로 공신에 올렸죠,,,무려 117여명.

힘없는 중종이야 어쩔도리 없었을 터.

조선초는 토지개혁으로 일시적이 나마 개인에 땅이 나눠졌죠.

문제는 세조찬탈 등 정권쟁탈전으로 많은 공신이 양산되고 권문세가의 횡포로 토지,노비들이 바닥났다는.

벌써 당시는 노비만 전 인구의 1/3을 차지했는데 그 노비를 권문세족들은 수천을 거느리기도.


 

아시나요? 세계적으로 가장 악랄한 노예제도를 지닌 국가가 인도와 조선이였다는 사실.

자국민을 노예로 삼은 나라는 인도 제외하면 조선밖에 없었을걸요.

보통은 전쟁 포로나 국사범 정도를 노예로 삼죠.

인간의 바른 본성을 이끌어낸다는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라? 아이러니네요.

성리학은 간고의 시대에 지배층의 욕망을 절제하고 공존을 찾는 과정서 생긴 학문입니다.


 

중종은 사림을 양성해 훈구에 맞서기 위해 조광조를 후원합니다.

신진 사림을 통한 반정공신들을 통제하는 이이제이네요.

날개를 단 조광제는 훈구세력에 맞설수 있는 신진 세력 양성을 위해 취한 제도가 바로 현량과를 도입합니다.

과거로는 너무 느리니 추천제로 자파세력을 키우려구요.

대사헌에 오른 후에는 공신 117명 중 71명을 취소하고 노비,전답응 환수합니다.

이성의 시대 20세기,,,금융실명제,종합소득세에도 반발이 그리 드셌는데,추측이 가나요?

4년도 안되게 극적인 숙정이 이뤄지다 보니 그 반발이야.

중종 조차도 신진세력에 휘둘릴까봐 겁이나기 시작합니다.

결국 한달도 안돼 위훈삭제(僞勳削除)건이 결정적으로 실각합니다.(기묘사화)

결국 위훈삭제는 일주일만에 취소되고,현량과로 등용된 관료들은 쫓겨나고, 조광조는 유배를.

당시 나이 37세,그리고 다음 해에 사사.


 

주초위왕(走肖爲王)의 술계를 말하지않을수없네요.

走肖는 趙를 파자한 것,,,조광조가 왕이 된다는.

남곤 등 훈구세력들은 중종이 흔들리는 것을 알고는 간계에 들어간거죠.

나뭇잎에 꿀로 走肖爲王을 쓰고 벌레가 먹게한 다음 이를 궁궐에 띄워보냈다는.

자연의 섭리를 곧 하늘의 뜻으로 여긴 당대인지라 보통이 넘는 간계네요.

물론 이는 야사에 나온 얘깁니다.

사실이라면 궁궐에 띄워 보낸 하천은 경복궁 금천이겠네요.(광화문과 근정문 사이)

사찰이나 궁궐은 지존이 사는 곳이라 속세와 구분짓기위해 대궐 정문 지나서 작은 천을 만듭니다.

그래서 禁川~~

중종의 시호는 中宗입니다.

시호에서 벌써 어리버리하고 사림과 훈구에 양다리 걸치며 우유부단한 그의 성격을 읽을수 있네요.


 

전기를 볼때 이상한 습성이 있습니다,,,상대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는 경우.

조광조 38세 졸,,,37~38세에 죽은 자들이 많아요.

모짜르트,멘델스죤,카르멘의 비제,쇼팽,,,,

고흐,라파엘로,로코코를 꽃피운 와토,물랭루즈의 화가 로트랙도.
'프랑스 문학을 100년이나 앞질러버렸다' 다는 찬사와 함께 베를렌 동성애자 랭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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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포의 그림 <산수도>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학포의 산수도에도 시대상이 뭍어납니다.

풍월하는 문인화에 시대상이라???사실 현실을 벗어난 예술이 어디 있기나했던가요.

그림은  절벽 아래 강산에 배가 한척 있네요.

배에는 뱃사공이 노를 젓고,산천 구경나온 나그네가 타고 있습니다.

절벽에는 소나무 몇그루와 집이, 먼 깊은 산에 구름이  덥혀 있고.

학포당에서 그렸는데 산수도 우상(右上)에 있는 화제(畵題) 말미는 이리 끝맺었어요.

 /고깃배야 오지 마라 행여 세상과 통할까 두렵노라/

기묘사화 후유증이 저 산수화에도.

조광조 복권을 주장하다 삭탈관직된 후 낙향한 그의 심사를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조광조는 14년 지기 학포를 이리 평했네요. 

/얘기하면 난초의 향기가 난다.비 개인 후 가을 하늘이요,얕은 구름이 걷친 후의 달같은 사람이다./
 

나무는 소나무입니다.

소나무는 사군자에 들어가진 않치만 사대부들 소나무 사랑은 유별나죠,,, 으뜸이라는 뜻의 '솔'~.

소나무의 덕성을 본받고 싶은.

이는 소나무가 우리나라의 대표 수종이고 오래 살아서가 아닐겁니다.

소나무는 성장 방식이 독특합니다.

늘푸른 나무지만 보이지않게 은밀히 잎을 갈이치우죠,,,떨어진 그 잎을 불소시게로 사용하고.

남이 눈치체지 못하게 은밀하게 잎을 떨어 뜨리는 주도면밀을 칭송하는 거죠.
 

학포는 문장 외에 시화에 능했습니다.

조선 중기 윤두서(윤선도의 아들에 손자),말기의 허련으로 이어지는 남종화단의 종조입니다.

현재 남겨진 10여점은 한국회화사의 한 족적이구요.

재밋게도 '송하보월도'로 유명한 이상좌 호도 학포(學圃)입니다.

같은 시대를 산 둘은 중종 때 수묵산수화의 문인 대표화가.

선비들의 호에는 그의 인생관이 들어있습니다.

'채마밭을 배우고 일군다'는 學圃엔 이상좌,양팽손의 그런 자연관이 들어있습니다.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 A장조
첼로,로스트로비치
피아노, 리히터
3악장 아다지오 칸타빌레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intotheself
    '11.2.21 9:44 PM

    앉아서 받기엔 송구한 그런 글이네요.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으로 마음속에서 접수해놓았습니다.감사, 감사

  • 2. 해피~스
    '11.2.21 10:02 PM

    이 방대한 자료를 어찌 다 .....
    정말 아무 수고없이 받기엔 좀 염치없을라 합니다.
    요즘 날도 좀 풀렸던데 근시일내에 꼭 다녀와야겠습니다.

  • 3. 변인주
    '11.2.22 1:14 AM

    철감선사 부도 자세한 설명 하나 만으로도
    그곳을 가 본듯 가까운 맘이 들게 합니다.

    서로를 사랑하는것에 가장 좋은 방법인
    상대를 알아가는것.

    앞으로는 부도하나에도
    정성과 공경을 해야겟어요.....

    어떤 단어는 뜻도 잘 모르는 무식함에도
    그래도
    감명받고
    잘 읽고 갑니다... 꾸벅~

  • 4. coco
    '11.2.22 6:22 AM

    개방대학이 따로 있나요. 고맙게 잘 보고 읽었습니다. 쌍봉사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전경을 다 보기는 처음입니다. 아주 매력적인 절이라고 들었는데 이해가 되는군요. 왠 나무들이 다 그렇게 멋지게 생겼는지 나무 하나하나가 예술인 것 같습니다. 제가 무지 좋아하는 대나무에 소나무들... 죽로차... 남도의 유혹을 제대로 전하네요. 구수한 명창의,,, 아런 생각이 드는데 절에서 무슨, 독경에 목탁 소리여야 하나요?ㅎㅎ

    비교적 최근에 어디서 읽었는데 당나라 장안에 물론 한반도에서 온 유학생들도 있었지만 당시 2만명의 일본 유학생이 있었다고 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도저히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을 할 수가 없네요.ㅠㅠ 그렇게 많은 일인들이 장안에 가서 공부할 수 있었을까, 그중 얼마나 돌아갔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일본 사람들은 고구려인, 백제인, 신라인 이런 식의 가장 보편적이니 단어를 써서 역사기술을 하지 않고 도래인, 귀화인등의 언어를 써서 두리뭉실 역사를 뭉게는데 항상 불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일인으로서 오래 당에서 공부하고 일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도래인에 포함되는지 그들이 단지 한반도에서 들어간 사람을 의미하는 건지 하는 생각도 해보긴 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딱 이십년 전, 1990년도에 이미 중국의 북경대학, 대련의 동북 사범대학등, 중국의 여러 중점대학들엔 일본학생들이 그들의 기숙사와 건물등을 따로 지을만치 엄청나게 많았어요. 당시 일본이 잘 나가는 시기의 끝말이어서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일본이
    대단하다고는 했지만 그리 그들의 현시성을 감각적으로 느끼지 못했는데 중국에서 지내게 되면서 아불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중국지식인들은 일본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고요. 또 러시아 근대사 전공하는 서양학자들은 일본에 다 빠져있었던 그런 기억들이 납니다. 지금 그들의
    머리엔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지만요.ㅎ 모르긴해도 중국으로 머리싸매고 있을겁니다.ㅎㅎ 당시에 한반도는 항상 동북 아시아의 중요한 관심에서 늘 빠져있었어요. 깍두기같은 식으로 취급되고 있었다고 할까요? 어디선가 보니까 고대 일본 문화의 흔적도 한반도에 참 많더군요. 그런 것들도 함께 우리것화해서 우리도 문화를 더욱 넓혀갔으면 좋겠어요. 우리 불교문화도 인도와 당등
    이리저리 다 혼합짭뽕해서 들어온건데 우리안에 만들어져 있다는게 중요하잖아요. 중국, 한국, 일본이 대등하게 주권을 갖고 평화롭게 살아가려면 자국적인 것의 강조도 중요하지만 보편적인
    교류와 이해, 이런 시각을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할 듯 싶어요. 물론 그런 것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도 분단이 해결되고 한반도가 정상화 되어야할 급선무가 있겠지만요.

  • 5. mamahelen
    '11.2.22 12:47 PM

    저도 인투님처럼 앉아서 받기 매우 송구스럽지만

    그저 고맙고감사한마음을 표현할수 없을 정도 입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 6. 코르셋
    '11.2.22 1:09 PM

    잘 차려논 밥상에 숟가락만 들고
    뛰어든 느낌입니다.
    마음으로 읽고 감사한 마음 가득전합니다.
    벌써 다음을 기다립니다

  • 7. 열무김치
    '11.2.22 7:48 PM

    벌써 봄 나들이 다녀오셨나 했더니, 아직 곳곳에 쌓인 눈이 보이네요.
    겨울 같은 전경에 대나무며, 차나무가 파랗게 있는 것이 신기하기만해요.
    불에 약하기만한 목조 건물들의 훼손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데, 읭 ? 2탄을 기다려야겠군요.

    p.s 혹시 wrtour님 국사 선생님이세요 ?
    제가 중학교 때 너무나 좋으신 국사, 세계사 선생님 두 분을 만나
    지금까지 그 영향 아래 살고 있거든요 ! 그 분들은 어디 계실까...
    또 삼천포군요, 저는 ㅎㅎ

  • 8. wrtour
    '11.2.22 10:35 PM

    인투님~~
    해피~스님~
    변인주님~~
    하늘재님~
    코코님~
    mamahelen님~
    코르셋님~
    가야어머님~~
    길어서 송구ㅠㅠ
    눈 많이 아프셨죠??
    행복한 봄날 맞으시길~~^^꾸벅.
    코코님 아,그러하군요
    가야 어무이,저 교단에 서본적 없는데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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