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월요일은 아주 분주한 날입니다,제겐
오전에 영어와 불어로 마티스를 읽고, 낮에 잠시 쉬다가 상하이에 있는 국제학교로 공부하러 떠나는
여학생과 세계사 전반을 함께 읽는 시간을 보내고,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면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날이니까요.
그런데 어제는 7일에 서울에 올라올 계획이라고 한 미당의 윤혜신씨와 그럼 우리 만날까요? 그렇게 약속한
날이기도 했는데요, 아침 시간에 전화받고는 무심코 2시부터 5시까지 시간이 되니까 만나자고 약속을 했지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보람이가 엄마 하고 부르는 겁니다.
아차, 어제가 바로 보람이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없이 일본으로 떠나는 날이었는데 반가운 마음에 앞뒤
생각도 없이 약속을 하고 말았네요.

미안,미안 생각을 못했어, 약속을 바꿀께, 그러자 아이가 점심 먹고 선물사고, 그리고 환전하고 나면
떠날 때까지 혼자 있어도 되니 다녀오라고 하네요. 그래도 그럴 순 없어서 약속을 바꾸겠다고 했지요.
아침 수업을 마치고 일단 은행에서 만나서 환전을 했지요.
9만엔중에서 1만엔은 제가 주는 선물로 나머지는 자신이 인턴해서 번 돈으로 환전을 하고 나니
이제 이 아이는 성인의 길로 접어드는구나, 그동안 크느라 참 수고했구나, 이제는 권리보다 의무가 많은
나이로 접어드는 것인가 하는 고마운 마음과 안타까운 마음이 교차하더군요.

그룹 인터뷰를 통과했다고는 하지만 앞으로 다섯 번이나 남았다는 개인 인터뷰, 본인은 얼마나 힘이
들것인가 생각하니 나라도 마음을 가볍게 해 주고 싶어서 이런 저런 우스개 소리를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본인도 궁리가 많은 모양입니다. 엄마, 한 번 만에 차라리 떨어지면 부담이 덜 할까? 마지막에 떨려나면
연애하다가 갑자기 걷어차이는 기분이 될 것 같애.
그러니? 그래도 인터뷰 맛이라도 볼려면 두 번은 붙으면 좋겠는데..
아니, 그런데 기분에는 꼭 붙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내 친구들도 감이 좋다고 하는 아이들도 있더라

마음속의 스트레스로 참기 어려우면 소리를 지르기도 합니다. 아, 가기 싫어, 차라리 여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 일을 시작했을까? 엄마가 일본에 취직하는 것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줄 줄 모르고
공연히 시작해서 너무 빠른 속도로 진도가 나가는 것이 겁나기도 하고.
이렇게 며칠간 계속되는 아이의 변화무쌍한 감정상태를 상대하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참 묘한 시간들이 서서히 지나고 있었습니다.

인터뷰, 시험, 가고 싶은 회사의 설명회, 그리고 일차로 서류심사에서 통과한 회사에서 시험보라고 부르면
가야 하는 것, 이렇게 여러가지로 겹쳐 있는 상황에서 자꾸 비행기 타고 오고 갈 수 없으니 기간을 오픈한
비행기표를 구해놓고 어딘가 입사가 확정될 때까지 한 달 정도 일본에 있기로 작정하고 떠나는 길이라서
맛있는 것을 먹여서 보내고 싶더라고요. 어렸을 때 어른들이 오랫만에 만나면 무엇인가 먹이고 싶어하던 것이
신기했는데 저도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구나 싶어서 피식 웃음이 나왔습니다.
평소에 먹어보고 싶었던 것, 조금 비싸도 되니 먹으러 가자고 하니 그냥 감자탕이 먹고 싶다더라고요.
뭔가 기운이 날 것 같은 음식, 한동안 먹기 어려운 음식을 먹고 싶다고요.

점심 먹고, 일본에 꼭 선물해야 할 집이 있어서 선물을 고르고, 커피 한 잔 마시자고 들어간 곳에서
아이가 메일 체크를 하기 시작하더군요. 엄마, 한 곳에서 결과가 나왔나봐,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마음 편하게 커피 마시고 결과를 열어보면 어떠냐고 하자 이제 어느 정도 거절당하는 일에도
이력이 나서 상관없다고 하네요. 같은 이력이라도 어디서는 통과되고 어디서는 거절당하는 것을 보면
역시 인사팀의 캐릭터에 따라서 다른가, 아니면 회사가 요구하는 것이 다 다른가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제겐 이름이 낯설지만 보람이에겐 관심있는 문구,가구회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일단 서류에서는 붙었다고
그런데 문제는 시험이 3월 중순이라고 하네요. 앗 그러면 일본에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 문제로 자신이 이미 생각을 많이 해두었노라고 하면서 다음 학기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도록 강의를
다 조절해놓았는데 과목을 외국에서 온 교환학생들을 위한 한국사 강의로 4강좌 신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엄마가 걱정하는 나의 무식을 (이상하게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요 ) 조금은 고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아니 전공은 어떻게 하고? 지난 일년 프랑스에서 들은 과목이 전부 전공이라서 2학기에 딱
한 과목만 들으면 전공은 다 이수한다고 하네요. 알아서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보람이가
이제는 다 컸다는 실감이 났습니다.

집에 들어와서 짐 싸기를 마무리 하고, 떠나기 전 두 시간 정도를 일본에 있는 친구랑 인터뷰 연습을 하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참 놀라운 세상입니다. 국제 전화가 아니고 스마트 폰으로 서로 길게 통화하면서도 비용이 들지
않는다니.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자 승태가 누나에게 말을 합니다. 누나 성공하고 돌아와야 되는데
성공? 은행에 입사하기 위해서 인터뷰 보러 가는 누나에게 하는 인사치고는 너무 거창해서 막 웃었지요.
그랬더니 승태 왈 누나가 성공해야 내가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적은 것 아니냐고요.
아니 둘 다 성공하지 않아도 되니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되지 않니?

공항까지 짐이 많아서 부른 콜택시, 드디어 보람이가 타고 떠나니 정말 간다는 실감이 납니다.
국제전화 10초도 1분도 똑같은 비용이 들어서 자주 연락할 수 없다는 아이에게 나중에 비용은 엄마에게
청구해도 좋으니 언제라도 걸고 싶을 때 전화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밤에 놀고 있는 중에 전화가 왔더군요.
엄마, 지금 도쿄 가는 버스속이야, 버스 탔으니 안심하라고.
숙소를 오사카로 정했는데 공교롭게도 첫 번 인터뷰 장소가 도쿄라서 밤 버스를 타고 도쿄로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물론 결과도 중요하지만 보람이가 이 전 과정을 즐겁게, 성장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