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무심히 넘기고 넘어갔구나, 이번에는 스피노자가 살았던 시대와 연결해서 제대로 보고 싶네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1492년 우리에겐 콜럼버스가 세 척의 배로 항해를 떠난 해로 주로 기억되는 연도이지만 스페인에 살던
유태인에겐 그들의 삶의 근거지를 뺏기고 떠나야 한 해로 기억되는 연도이지요.
언젠가 터키에 갔을 때 서점에 들어가서 구한 1492 ,소설이었는데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그 시기의 유대인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같은 작가의 책을 구해서 읽기도 했지요.지금은 작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지만 엉뚱한 곳에서 만난 소설로 (터키가 아니라 스페인에서 떠난 유대인이라 )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요즘 다시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스피노자가 바로 스페인, 포르투갈의 유대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으나 모욕을 당하고 (돼지 취급을 당했다고 하네요. 스페인사람들이 겉으로는 카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안으로는 그대로 유대인 의식을 치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 결국은 그 곳을 떠나 네덜란드에
정착한 유대인을 선조로 그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거든요. 유럽출신의 그들을 쉐파르디라고 한다면
동유럽이나 러시아 쪽 유대인은 아쉬케나지라고 한다고요. 그렇다면 아쉬케나지란 이름의 작곡가도 역시?
엉뚱한 관심이 솟구칩니다.
신교가 중심인 나라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꾸리면서 살아갔을 그들에 대해 생각을 해봅니다.그들의 결속을 위해서
어떻게 뭉치고 어떤 규칙을 정해서 규제를 했을지를,미리 정착하고 있었던 유대인들과 나중에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왔을 유대인들과의 사이는 어떠했을까?
그들 사이의 문제도 문제이지만 그 지역에 사는 다른 네덜란드 사람들과의 소통은?
합스브루크 가문인 카를로스 5세 치하에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상업으로 경제력을 확보한 암스테르담
당시 자유로운 분위기로 다른 지역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사람들이 많이 왔다고 하더군요.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데카르트였는데 그가 이방인으로서 이 곳에서 오래 살면서 무엇을 느끼고 살았을까요?
유태인 의사이자 작가라고 하는군요. 렘브란트가 한참 잘 나가던 시절에는 당시 그 규모의 집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의 집을 구해서 그 안에다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 혹은 작품을 마음껏
구해서 진열하고 바라보기도 하고 소품으로 쓰기도 했다고 하네요. 많이 벌었지만 돈을 모으는 일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다는 그는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의 죽음과 우리에게 야경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단체 초상화
이후에 주문이 잘 들어오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들에겐 그의 최대의 걸작중의 한 점으로
알려진 그 그림이 사실은 단체초상화이다 보니 주문한 사람들이 똑같이 돈을 내는 관계로 왜 나는 그림에서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는가 그러니 이 그림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지불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불만이
나왔다고요. 결국 끝까지 대금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 그런 것이 미술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나중에 파산하게 되고 사는 구역을 옮기게 됩니다.그 이후에 유대인구역에서 살게 되면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조금 더 밀착한 그림들,특히 애칭을 비롯한 판화가 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몰락이 오히려
그림의 세계를 확장하는 셈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의 마음을 뒤흔다는 작품들은 오히려 후기작에서 더 많은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 속에서 세계는 그런 고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