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덕수궁에 갔었습니다.
언젠가 시립미술관에 가는 길에 보니 덕수궁의 현대미술관에서
마리노 마리니의 조각전이 있다는 현수막을 보았었지요.
그 때는 누군지도 몰랐었는데
그 다음 everymonth 모임때문에 곰브리치를 읽다보니
바로 그 이름이 나오는 겁니다.
그렇구나,그래도 이렇게 거의 이름만 나온 수준으로는
그 조각가에 대해서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더군요.
다만 덕수궁 앞에서 전시소식을 읽다가 그냥 끌렸던 것외에는
그래서일까요?
계속 다른 일에 밀려 못 가다가
르네 마그리뜨전의 초대권을 주신 분이 있어서
어제 나가는 길에
르네마그리뜨를 보고 덕수궁으로 간 것이지요.
전시장에 간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몇 작품앞에서는 정말 눈물이 솟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어제 아침 everymonth에 익명의 공간이라서
쓸 수 있을 것이라고
그동안 이 공간에서 고마웠다고
당분간 올 수 없노라고
암수술을 받게 되어서라고 글을 남긴 분이 있어서
더 그랬을지도 몰라요.
2차대전의 와중에 있었던 이탈리아에 살았던 조각가가
전쟁의 상흔속에서 창조한 말과 기수의 이미지
그 중에서 커다란 외침이란 제목의 작품앞에서
발길이 떨어지질 않더군요.
기수의 표정이 한없이 슬퍼서 조각으로 이런 느낌을
줄 수 있는 조각가가 놀라웠습니다.
별로 손을 댄 흔적이 없는데도 표정을 그렇게 풍부하면서도
깊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지인가 갑자기
부럽기도 하고 놀랍기도 한 느낌이더군요.
조각속의 기수의 슬픔이 제 마음에 와락 스며들면서
겉으로는 그냥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슬픔이 있을까
상처를 들여다보기도 어려운 사람들,혹은 들여다보아도
어찌 할 수 없이 아파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사람들
비명을 질러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사람들
그렇구나,진정한 예술은 우리를 지금의 우리에서
다른 곳으로 데려갈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그 자리에서
느꼈습니다.
마리노 마리니는 이탈리아의 피스토이아 출신이라고 합니다.
피스토이아는 원래 에트루리아 문명의 세례를 받은 곳이라고
하네요.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피렌체에서 드로잉 수업을 받으면서
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드로잉와 회화에서 출발했으나
북유럽 여행에서 만난 기마상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 다음에는 기마상 시리즈를 계속 만들어내는 조각가의
길을 걸었다고요.
그런데 그가 조각을 하기 전에 드로잉이나 회화로 표현한
작품들도 진열이 되어 있어서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일에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부조와 고부조,환조의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던 날이기도 했지요.
청동의 질감이 이렇게 다를수도 있구나
도대체 그는 어떻게 이런 느낌을 낼 수 있었을까
하고 놀란 날이기도 하고요.
조각작업을 주로 하면서도 한 번도 회화를 포기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 글로 써있더군요.
정말 그랬습니다.
생의 후반기에는 주로 회화작업을 많이 했는데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한 작가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이 많이 되었지요.
르네 마그리뜨전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 토요일이 전시가 끝나는 날이라서 그럴까요?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전시장에 모인다는 것은 제겐 거의 충격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화가인데도 이럴 수 있다는 것이 마치 새로운 싹을 본 것처럼 좋았지요.
그에 비해 덕수궁은 참으로 한산하더군요.
사실 마음속의 감동을 더 준 전시장인데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아직 전시기간이 남았으니
찾는 발길이 늘고 조각앞에서 마음이 움직이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이 생겼습니다.
b. 1901, Pistoia, Italy; d. 1980, Viareggio, Italy
Marino Marini was born in the Tuscan town of Pistoia on February 27, 1901. He attended the Accademia di Belle Arti in Florence in 1917. Although he never abandoned painting, Marini devoted himself primarily to sculpture from about 1922. From this time his work was influenced by Etruscan art and the sculpture of Arturo Martini. Marini succeeded Martini as professor at the Scuola d'Arte di Villa Reale in Monza, near Milan, in 1929, a position he retained until 1940. During this period Marini traveled frequently to Paris, where he associated with Massimo Campigli, Giorgio de Chirico, Alberto Magnelli, and Filippo Tibertelli de Pisis. In 1936 he moved to Tenero-Locarno, in the Ticino canton, Switzerland; during the following few years the artist often visited Zurich and Basel, where he became a friend of Alberto Giacometti, Germaine Richier, and Fritz Wotruba. In 1936 he received the Prize of the Quadriennale of Rome. He accepted a professorship in sculpture at the Accademia di Belle Arti di Brera, Milan, in 1940.
In 1946 the artist settled permanently in Milan. He participated in Twentieth-Century Italian Art at the Museum of Modern Art in New York in 1944. Curt Valentin began exhibiting Marini's work at his Buchholz Gallery in New York in 1950, on which occasion the sculptor visited the city and met Jean Arp, Max Beckmann, Alexander Calder, Lyonel Feininger, and Jacques Lipchitz. On his return to Europe, he stopped in London, where the Hanover Gallery had organized a solo show of his work, and there met Henry Moore. In 1951 a Marini exhibition traveled from the Kestner-Gesellschaft Hannover to the Kunstverein in Hamburg and the Haus der Kunst of Munich. He was awarded the Grand Prize for Sculpture at the Venice Biennale in 1952 and the Feltrinelli Prize at the Accademia dei Lincei in Rome in 1954. One of his monumental sculptures was installed in the Hague in 1959.
Retrospectives of Marini's work took place at the Kunsthaus Zürich in 1962 and at the Palazzo Venezia in Rome in 1966. His paintings were exhibited for the first time at Toninelli Arte Moderna in Milan in 1963–64. In 1973 a permanent installation of his work opened at the Galleria d'Arte Moderna in Milan, and in 1978 a Marini show was presented at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in Tokyo. Marini died on August 6, 1980, in Viareggio.

그의 작품을 세가지로 분류하여 전시하였는데
하나는 포모나 시리즈라고 해서 에트루리아의 풍요의
여신이 포모나란 것에 빗대어 전쟁의 저편에서
작가가 도달하고 싶은 평화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려고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과 기수,그리고 마지막으로 초상작업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전시회를 할 때 찾아와서 알게 되고
그 뒤 친하게 된 작곡가 스트라빈스키의 초상
그리고 샤갈의 초상도 있었고 장 아르프의 초상도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서 놀랍고 즐겁기도 했지요.

이 작품이 바로 그 앞에서 눈물이 났던 커다란 외침인데
이렇게 보아서는 전혀 분위기나 느낌을 전달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다 돌아보고 나가는데 다른 한 방에서는 그 시기의
한국에서 활동한 조각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단연 권진규의 작품이 많았지요.
덕분에 마리노 마리니의 말과 권진규의 말을 마음속으로
비교하면서 보게 된 시간이기도 했고
20세기 한국 조각가들중에서 젼혀 몰랐던 사람
혹은 이름만 알고 작품은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작업도
함께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나오는 길에 아트 샵에 들렀더니
마침 마리노 마리니 재단에서 어린이들을 위해서 만든
책자를 팔길래 한 권 구해서 덕수궁 벤취에 앉아서
읽었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책인데도 아니,책이라서
너무 잘 만들었네요.
약간 시샘하는 마음도 있고 놀라는 마음도 있는 와중에
얇은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나니
전시장 안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것도 새롭게 볼 수 있기도
했습니다.
오늘 전시장에서 설명을 맡은 조금은 수줍어하고
경상도 사투리가 진하게 묻어나오던
그래도 하나라도 더 이야기하고 싶어서 계속 설명을 하던
도슨트분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말을 제대로 못해도 하고자 하는 말이 분명하다면
사람들의 마음속을 파고 드는 살아있는 말이 되는구나
그런 것을 느낀 날이기도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