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일교시 시험을 보곤 졸라 쉬웠다고 전화를 건 아이
그래서 침착하게 나머지 시험도 잘 보라고 전하곤
잠이 들었는데 그 다음엔 무소식입니다.
낮에 집에 들어오니
영화를 다운받아서 보고 있다가 아이가 말을 하네요.
망했어
그 한마디만 내놓곤 일체 다른 코멘트가 없습니다.
오후에 도서관에 가보니 오늘 시험 본 아이들의 반응이
거의 비슷합니다.
망했다와 엄청 망했다의 어감 차이는 아이들이 느끼는
반응을 반영하는 것이겠지요?
결과가 나오기까지 신나게 놀테니 아무 말도 말라고
마치 선언하듯이 이야기한 아들은
오늘 시험본 친구들과 함께 찜질방에 간다고 합니다.
그런 장소에 가지 않는 저로선 참 난감하더군요.
그래도 너무 늦지 말고 오라고 하니
그 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에 오겠다고 합니다.
내일 아침?
학교는?
마침 내일이 개교기념일이라고요
가능한 일찍 들어오라고 당부를 했는데
밤에 들어오니 이미 나가고 없습니다.
시험 결과가 문제가 아니라
고등학생이 되는 내년 3월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가
문제로군 하는 걱정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밤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서 마음을 비우고
음악을 켜놓고선 (장한나의 연주는 찾지 못했으나
오늘 쇼스타코비치의 첼로곡을 인터넷상에서 찾았거든요)
아직도 더 보고 싶은 모네를 보고 있는 중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은 내 안의 모순을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날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내가 생각한 나와 실제의 나의 거리를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는 경우도 생기더군요.
민사고를 준비하다가 역량이 조금 모자라다 싶어서
일반외고 특차에 지원한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 시험에서 불합격하게 되자
평소에도 별로 다정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그 일로 인해 아이의 심정을 말로 많이 상하게 한 모양이더군요.
그런데 오늘 시험에서 또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은 아이가
만약 떨어지면 죽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듣곤
그 아이만은 제발 하는 심정이 되는 밤이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주는 상처
그 상처가 건강한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면
그래도 다행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정적인 에너지가 되어서 아이의 성장에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큰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그 아이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서
저도 다시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하기 싫은 공부를 그저 외고 시험 보겠다는 결심으로
그렇게 오랜 세월 늦은 시간까지 매여 있었던 아들에게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웠다고
결과에 상관없이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밤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