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줌아웃
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익숙한 것과의 결별
주인이 괜찮은 술집에서 오랜 친구와 함께 마신 술.
새벽에 일어나 읽은 좋은 책, 밑줄...
장정이 마음에 드는 공책과 검은색 파커 만년필.
가끔 글쓰기, 일기.
토요일의 등산, 땀, 그리고 목욕.
새벽의 노량진 시장, 아이들이 좋아하는 기어다니는 꽃게.
해질녘 여름 시장 좌판 위의 우뭇가사리 넣은 콩국.
인사동 툇마루의 막걸리와 골뱅이, 아내와 함께 한 대작.
여행, 산속에서 지낸 밤, 쏟아지는 별.
속이 가라앉는 바다 내음과 소리, 물 위로 튀는 고기 한 마리.
......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내 일상을 지켜주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일상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 그 팍팍한 생활에 물을 뿌린다.
실크로드를 따라 타클라마칸 사막을, 캐러밴과 함께 헤매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워 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스탄불의 어두운 어느 카페에서 몇 개월의 오랜 여정의 피로를 술 한 잔으로 아니면, 히말라야가 보이고 그 산 위의 눈이 녹아 내려 이룬 호수가 보이는 곳에서 며칠을 지내며, 둥근 보름달이 그 호수에 비치는 것을 보고 싶다. 아니면 가족 모두 캐나다나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곳으로 이민을 갈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한 삶이 있는 것은 또한 아니다.
삶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구체적이며, 매일 아침 눈을 비비고 일어났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그것이 바로 삶인 것이다.
우리가 아침에 먹은 음식이기도 하고, 저녁에 좋은 사람과 나눈 빛깔이 고운 포도주이기도 하다. 마음속의 꿈이기도 하고,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기도 하다. 수퍼에서 산 몇 마리의 코다리이기도 하고, 스칠 때 얼핏 나눈 웃음이기도 하다.
삶은 작은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위대함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신은 세부적인 것에 존재하는 것이다.
일상의 일들이 모자이크의 조각처럼 모여 한 사람의 삶을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루하루는 전체의 삶을 이루는 세부적 내용이다. 바로 일상이 모여 작은 개울이 되어, 강처럼 흐르는 삶이 된다. 그러므로 오늘이 그냥 흘러가게 하지 말라. 내일이 태양과 함께 다시 시작하겠지만, 그것은 내일을 위한 것이다. 오늘은 영원히 나의 곁을 떠나가게 될 것이다.
아쉬워하라.
어제와 다를 것 없이 보내버린, 어제와 같은 오늘이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라.
----------------------------------------------------------------------------------
(구본형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중에서.1998)
딱딱하기만 할 거 같은 경제, 경영서인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이런 보석같은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마치 피천득님의 수필 의 연장페이지를 보는 듯 익숙하고도 잔잔한 느낌이었지요.
작가는 자신있게 말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아주 잘 보낸 인생이 된다고 말입니다. 인생이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 있겠느냐고 세상 사람들이 딴죽을 걸어온다면, ‘하고 싶은 일도 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당돌하게 주장합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은 어느 날 갑자기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매일 조금씩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평생을 하다보면 그 일을 아주 잘하게 되는 것이라구요.
얼마 전, 평소 운동을 함께 하는 아주머니랑 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는데, 유학까지 다녀와서 모두 대학교수로 재직중이고, 손자들도 다들 커서 학교 잘 다니고 있고, 몇 년 전 공기업 퇴직한 남편과 함께 취미삼아 텃밭 일궈가며 편안히 살고 있다 했습니다.
안팎으로 여유있게 보이는 그 분의 우아한 노년은,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요.
“이젠 아무 걱정 없으시겠어요? 두 분이 함께 여행도 많이 다니시고 그러세요.”
“그러게요. 그러고 싶은데, 이젠 기력이 없어서 그러질 못한다우. 예전에 맛있게 먹었던 음식도 똑같게 다가오지 않고, 신기한 걸 봐도 가슴에 와 닿질 않는다우. 젊다는 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지? 그때그때 그냥 넘기지 말고 느껴요. 나처럼 후회하지 말구. 기운 없는 요즘은,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 하는 게 제일 좋다우“
그 말씀을 하실 때의 아주머니의 씁쓸한 눈빛이, 한동안 제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더라구요. 앞만 보며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왔지만, 어느 순간 고개들어보니 야속하게도 환갑을 훌쩍 넘어버린 쇠잔한 노인네가 되어 버렸다는 그...
내가 살아내야 하는 ‘내 몫의 삶’과,
남이 평가해주는 ‘보여 지는 삶’ 가운데 놓인 사람들...
누구에게나 그런 갈등의 요인은 있지만, 누가 더 슬기롭게 대처하느냐에 따라서 자신만의 인생의 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남과 견주어 그 차이를 따지지 말고, 다만 본인이 세운 기준에 충실하다 보면 훗날 진정한 인생을 살았다고 감히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생’이라는 존재가 개인이 완성해야하는 하나의 커다란 그림이라면, 그건 아마도 커다란 붓으로 단시간 내에 그려진 멋들어진 속사화가 아니라, 아주 작은 부분들로 정성스레 채워가야 하는 세밀화일 것입니다. 작은 벽돌들이 모여서 웅장한 건물이 완성되듯, 하루하루의 세부적인 삶은 바로 ‘인생을 채워가는 작은 벽돌’일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가기에 앞서, 무엇보다 자신과 만나기 위한 ‘느긋한 산책’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입니다. 부러움으로 일관하는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쓰기보다는,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와 자신만의 건실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그렇게 내 몫의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낸다면, 후반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신의 삶이 무엇이었는지 말할 수 있게 되겠지요.
마음 가는대로 하고픈 것을 찾아 모든 시간을 그것에 소모해도 나중에 아쉬움이 많을텐데, 허투루 의미없이 흘려버린다면 훗날 넘 억울하지 않을까요?
지금 이 순간도 자신만의 ‘위대한 삶’의 한부분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추켜세워 보세요. 한결 마음이 편안해지실 겁니다.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 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멋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 하고...
그 사람에게 / 신동엽 (1968)
오래된 일기장 한 켠에 적어놓은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이 시를 처음 읽는 순간 뭔가 찡~한 느낌을 받았었던 옛 기억이 납니다.
윤동주와 함께 신동엽 시인은 영혼이 가장 맑은 시인이라고 일컬어진다죠? 1969년 간암으로 별세했으니까, 아마 이 시는 병상에 누워 젊은날을 추억하면서 써내려간 자전적인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최선을 다한 인생이 아니라면, 간결한 시구절을 통해 사랑의 아쉬움을 노래한 시인처럼 훗날 후회할 것들이 얼마나 많이 생길까요?
......
올해 칠순을 맞은 고모가 계십니다. 젊어서 갖은 고생 다한 덕에, 남부럽지 않은 재산도 모으고 자식들도 잘 키우면서 그 연배의 여느 어른들처럼 그런 훈장같은 자랑스런 젊은날을 보내신 분이지요. 그러던 고모가 작년부터 병석에 누워계시는데,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큰애 가져서 자장면집을 지나는데, 자장면 냄새에 어찌나 군침이 돌던지... 하지만 돈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바보같이 사먹지 못했어. 돈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왜 그런 바보같은 주변머리를 가졌을까? 아파서 누워있는데, 왜 그때 생각이 자꾸 나는 건지. 넌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말아라!"
비단 ‘쓰고 싶은 곳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쓰라’는 경제적인 것에 국한된 메시지만은 아닐 겁니다. 그건 인생의 9부 능선을 넘은 대선배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인생의 솔직담백한 경험담이 아닐런지요. 매순간순간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감정에 최선을 다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라는.
지금...후회와 아쉬움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시나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산골길서 우연히 마주친 두군거리는 사모의 대상처럼,
지금의 소중한 일상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마세요.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
문득, CF의 스쳐가는 한 카피가 입 안에 맴돕니다.
지금 하고 싶은 거, 지금 하세요!
^^
Just the way you are - Billy Jo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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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totheself
'06.8.22 7:34 AM까망포도님
음악과 더불어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이 책을 읽었는데요
그가 쓰는 글들을 차례로 읽어보게 되는 것은
글들이 제 안의 어떤 부분을 건드려서일겁니다.
최근에 읽었던 글중에서 인상적인 책은 황홀한 일상이란 (제목이 정확한 것인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기억하긴 어려운데 아마 바로 그 제목이거나
아니면 비슷한 제목일 겁니다.) 책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상이 지겹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저도 일상의 어느 부분이 황홀하다고 생각하는 점에서는 저자와 같은 생각이라
아주 즐겁게 밑줄 그어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게 나네요.
어제는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집을 나서서
동네 공원의 의자에 앉아서 들고 나간 소설을 읽었습니다.
바람이 살랑거리는 곳에서 읽는 소설의 맛은 얼마나 색다르던지요.
그리고 일어나서 걸어가다가 만난 늦게 핀 장미 한 송이였습니다.2. 토란토란
'06.8.22 9:59 AM소소한 일상에서의 즐거움을 언제부터인가 깨닫게 되었지요. 그래서 오늘 아침 읽는 이 글이
마음에 와닿고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 힘도 나네요. ^^
얼마전 제 싸이에 제 사진을 올리면서 제목을 '나와 마주하기'라고 지었고 간단하게 글도 남겼는데
그중에서 내가 좋아하는것들이라는 소제목을 쓰고 이렇게 얘기했어요.
- 오래된 나무, 귓가를 스치는 바람, 흙냄새, 유쾌한 친구와 한잔하며 수다떠는거,
마음 내킬때 펜들고 끄적이기, 우리 딸내미와 돌아다니기
지금 현재 삶에서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 작은것에서도 재미를 발견한다면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무엇보다 자신과 만나기위한 '느긋한 산책'이 필요하다는 말에 동감합니다.
음악도 가슴에 와닿구요. *^^*3. 우향
'06.8.22 10:51 AM아...너무 좋습니다.
커튼에 살랑거리는 바람과 더불어 좋은 글 & 음악
까망포도님께 감사드립니다.4. 진선미애
'06.8.23 11:50 AM사십줄에 들어선 남편이 어느날 그러더군요
'어릴땐 먹고 싶은건 많아도 돈이 없어서 맘대로 못 먹었는데
이젠 돈은 있는데 먹고 싶은게 없다' 무심히 한 말이지만 그때 제 마음이 왜 그리 짠~ 하던지요5. 까망포도
'06.8.23 10:54 PM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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