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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친토크

즐겁고 맛있는 우리집 밥상이야기

고추장을 담그다.

| 조회수 : 3,554 | 추천수 : 8
작성일 : 2004-02-25 20:00:57



된장 담그는 날엔
말날이니 손 없는 날이니 이것 저것 따지는 게 많았는데
고추장은 그냥 아무때나 편할 때 담그는 거래요.

어제 아침에 할머니께서
질금을 큰 함지에 하나로 담궈놓으셨길래 그냥 그러려니 했어요.
그냥 혼잣 생각에 '식혜를 하실 리는 없는데...'하곤 말았어요.
요새 아주 많이 게을러지고 날도 흐려서 계속 우울모드거든요.
밖에서 뭔가 부시럭거리는 소리도 나고
집 바깥으로 나가셔서 한참동안 무얼 하시는 것 같기도 했는데
그냥 애써 모른척했어요.

어제처럼 스산하고 날이 추운 날은 정말... 너무 싫어요.

어찌어찌 점심을 먹는 내내도 그냥 조용히 별 말 없이 먹고 치우고,
또 내 방에 들어와서는 책 읽고, 내 일 보고 하며 콕 박혀있었지요.

"**야, 고추장 담그는 거 찍을라믄(찍으려면) 찍어라."
하시는 말씀에 화들짝 놀라 나가보니
할머니는 벌써 엿물을 다 고아놓고 고춧가루를 섞고 계셨어요.

그때 부랴부랴 찍은 사진이 첫번째 사진이에요.
(예의 그 '레고모자'를 쓰고 하셨죠. ㅎㅎ)

질금물을 내리고 (아시죠? 식혜하듯이 질금을 물에 담가 단물을 여러 번 빨아내는 일)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펴 은근히 고으셨대요.
(바깥으로 나가셔서 오랫동안 계셨던 것은 바로 그 일을 하시느라...)
거기에 밀가루와 물엿(갈색물엿)을 넣고 또다시 뭉근히 고아 엿물을 만드시고
사진처럼 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으면 된대요.
사진에서 보면 버무리는 플라스틱 함지(작업중) 왼쪽의 하얀 것이 굵은 소금이구요.
그 뒤에 보이는 벌건 봉다리가 고춧가루,
푸른 플라스틱 바가지가 엿물 담은 양동이-아직 뜨끈뜨끈함-에 띄워져 있는 것이고,
함지 양 옆의 항아리는 담근 고추장을 넣을 항아리랍니다.
뒷편으로 저희 집 장독대 일부가 보이는군요.
(지난번 담근 된장도 그 장도대 제일 위, 가장 큰 항아리에 있답니다)

어쩐지 할머니가 삐지신 것도 같고, 제가 너무 나 몰라라 한 것이 죄스럽기도 해서
자세히 여쭙지 못했어요, 발이 저리니까요.

고춧가루가 좋아 빛깔이 참 고왔습니다.
간을 보라고 하시는데 저는 맛있었거든요, 달콤하고 매콤하고.
그런데 맛있으면 안된다 하십니다.
좀 짜다 싶어야한대요.
저번에 된장 담글 때는 달걀을 띄워 염도를 맞추시더니
이번엔 먹을 때(고추장이 숙성된 후)보다 훨씬 짜야한다고 하십니다.
고춧가루가 불면서 싱거워진대요.
또 묽기(점도)도 묽어야 한대요. 고춧가루가 불면서 되지니까요.
된장 신 건 먹어도 고추장 신 건 못 먹는다고 하십니다.
(옛날엔 된장 염도를 잘 못맞춰 시기(go sour)도 했나봐요.
오죽하면 된장 담글 때 신씨 성을 가진 며느리는 손도 못대게 했다는 말이 있을라구요)

할머니 앉으신 자리 오른쪽 앞에 보이는 유리판들은
서울집에서 부모님이 버려진 유리판이 보이는대로 모아다 드린 거에요.
시중엔 3-4만원 짜리 좋은 장독뚜껑도 많이 나와있지만
할머니는 비싸다고 유리판을 덮어두세요.
볕은 보고 비는 안 들어가니까 이게 제일이래요.
날이 풀리고 해가 길어지면
장독테두리에 나무쪽을 올리고 거기에 유리판을 올리면 바람도 통하게 할 수 있지요.
어디 외출나가서도 비올까 걱정하면서 장독뚜껑 덮을 일 때문에 종종거리지 않아도 됩니다.

장은 담근 후에 공기와 햇볕의 힘으로 숙성이 되는데요.
이걸 잘해야 맛있는 장이 뜬다고 합니다.
인우둥네 장독대는 가장 햇볕이 잘 드는 짚 앞 마당 한쪽 끝에 있구요.
주변에 건물이 없어 그늘도 거의 지지 않습니다.
옹기는 숨을 쉰다고 하죠. 공기와 효모들은 들락날락하면서 수분은 막아주는...(어디서 들은 얘기)
게다가 장독대 옆에는
할머니의 18번, '앵두나무 처녀'에 나오는 앵두나무 큰 게 두 그루나 있어요.
사진에 보이는 가지는 철쭉 가지인데 화분으로 키운 철쭉을 노지에 심어 엄청 큰 철쭉이 되었구요.
장독 근처에 꽃이 있으면 장맛이 좋아진다는 말도 있는데
하여간 까맣고 반들반들한 항아리들 옆에 앵두꽃이 피고 햇살이 따사로울 땐,
참 보기가 좋아요.
넉넉하고 따뜻하면서도 행복한, 그런 기분이 들거든요.
(봄이 되면 사진 한 번 또 찍어 올리죠)

저번 된장 담글 때는 정화수도 떠놓고 손을 싹싹 비비시며 기원하시더니
고추장은 그러질 않으세요.
아마도 옛 어른들은 된장을 제일로 생각하고 고추장은 그냥 곁들이 양념 정도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영양도 된장이 더 우수하지요, 아마?
고추 들어온 게 조선때이니까 고추장에 대해서는 된장만큼 비중을 두지 않았나봐요.

다 된 고추장을 항아리에 담고 웃소금을 뿌려놓고
그 위에 또 고춧가루를 살짝 뿌리더군요.
아랫사진은 웃소금만 뿌려놓은 상태입니다.

작년 고추장이 많이 남았고 또 고추장은 해가 갈수록 점점 검게 변해서 안 좋다고
(간장은 오래 묵힌 건 오래 묵힌 것대로 쓸모가 있는데 고추장 검은 것은 음식 때깔이 안 산다고 하셔요)
조금만 담그신다더니...
보이시죠? 아주 큰 양은 함지에 한가득이에요.

떡볶이, 비빔밥, 봄나물 무침, 오징어 찌개....
인우둥네 밥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고추장!
오늘, 만들었습니다.
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나나
    '04.2.25 8:06 PM

    고추장맛이 정말 환상적으로 나올것 같아요^^..

  • 2. jasmine
    '04.2.25 8:11 PM

    할머니 다리는 다 나으신거죠?
    언제나 맛깔스러운 얘기....인우둥님은 나이가 몇인지.....

  • 3. 싱아
    '04.2.25 8:25 PM

    아 ! 그엿물 고으는걸 봐야하는데.....
    할머니 모자가 넘 귀엽습니다.

  • 4. 신유현
    '04.2.25 9:11 PM

    음...신씨.,..^^;;; 전 장담그면 안되겠네요. ㅋㅋㅋ(자기합리화)
    저도 고추장담글려다가...전에 외할머니가 담가주신거 곰팡이피게 한거 신랑한테 들켜서.. 차라리 사다먹으래요.
    근데, 인우둥님은 너무 행복할거 같아요. 할머니가 하시는거 다 보고, 먹고...부럽습니다. ^0^

  • 5. 복주아
    '04.2.25 10:25 PM

    저도 인우둥 할머님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고추장을 담급니다.
    먼저 하루전에 찹쌀을 쪄서 엿기름물에 삭힙니다(장에는반드시 곡식이들어가야 한다는
    친정엄마의 말씀따라) 다음날 식혜처럼 된것을 자루에 넣어 엿기름물과 걸러내어
    밥알 찌꺼기는 버리고 큰솥에 넣고 불에얹어 마냥 곱니다. 조청이 될때까지......
    커다란 다라이에 쏟아 한김 나간후에 미리 준비해둔 마늘(반드시컷터기에서 컷터한것)
    30~50통을 넣고 메주가루(메주1개), 고추가루(8~10근?), 소주1,5리터,
    간은 조선간장 만으로 합니다.
    제가 정확한 양을 못대는것은 시골에서 농사지으시는 시 어머님이 주시는대로
    하기때문에...... 고추가루랑... 되는대로.. 간장은 맛봐서 약간 짭짜롬하게... 이런식입니다.
    마늘은 반드시 논마늘이어야 하며 찧거나 갈으면 안되고 꼭 컷터를 항것이어야 합니다.
    밭마늘은 많이 아린맛이 나며 씁니다.
    저는 그래서 5월 말쯤에 논마늘을 사서 시름시름 까놓았다가
    식구들 노는날 6월6일날 합니다(주일날은 교회에 가야해서 바쁘거든요)

    설명을 제대로 못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이 마늘고추장 맛있습니다.
    엿고추장이라 맛도 달달하구요^^;

  • 6. 인우둥
    '04.2.25 11:07 PM

    맞아요. 복주아님 말씀대로 메주 말린 것도 빻아서 넣으셨을 거에요.
    고추장에 넣으신다고 지난 장에 방앗간 가서 빻아오셨었거든요.

  • 7. 이론의 여왕
    '04.2.25 11:44 PM

    할머니 레고 모자, 볼수록 예쁘네요.^^

  • 8. 김새봄
    '04.2.26 8:46 AM

    할머님 벌써 저렇게 일 하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봄 날씨 예사롭지 않은데....
    인우둥님도 이 환절기 잘~ 보내세요

  • 9. 최은진
    '04.2.26 9:23 AM

    저두 모자가 눈에 띄네요.... 넘 이뿌네요....
    저런 할머니가 계심 얼마나 좋을까요.... 부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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