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집에서 혼자 놀 때 먹은 음식
매생이 떡국 ( 물에 매생이와 떡만 넣고 )
팥칼국수 ( 삶은 팥 있기에 블랜더로 대충갈고 칼국수면 넣고 끓인 )
K 와 저녁약속을 잡았다는 어느 날
‘ 피곤하다 ’ 며 H 씨 혼자 보내고 집에서 뒹굴 거리다 심심해졌다 .
설거지 하고 빨래 돌리고 청소기까지 돌렸는데도 편안했다 .
‘ 이 알 수 없는 들뜬 기분은 뭘까 ?’ 라며 늙은 호박에 손을 댔다 .
씨 골라내고 껍질 벗기고 잘게 썰어 정리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
겨우 호박 두 통을 했을 뿐인데 손목이 아파온다 .
하지만 그만 정리하고 음식 쓰레기까지 버리고 왔는데도 그다지 지치지 않았다 .
참 묘한 일이다 .
커피를 볶았다 . 갓 볶은 커피 , 첫 잔을 만끽했다 .
내친김에 켜켜이 먼지 쌓인 자전거도 닦았다 .
경비실에서 펌프를 빌려 바퀴에 바람도 넣고 동네 한 바퀴 돌았다 .
10 월 밤바람이 좋더라 .
자전거 타고 돌아오는 길 , 돼지고기 200 그램을 샀다 .
묵은 갓김치만 넣고 찌개를 끓였다 .
찌개 끓는 동안 씻고 나와 냉장고서 꺼낸 찬밥과 늦은 저녁을 먹었다 .
맥주도 마셨다 .
요즘 집에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이 묘 ~ 한 감정이 뭔지 모르겠다 .
이따금 퇴근길에 H 씨에게 전화를 한다 .
저녁은 먹었는지 , 뭐 사갈 것 있냐 ? 묻곤 하는데 ,
“ 나 저녁 약속 있어요 …… .” 같은 말을 들으면 솔직히 반갑다 .
괜스레 발걸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고 .
K 와 저녁 먹고 명동 구경도 했다는
H 씨의 한 정류장 전이라는 문자에 자전거 타고 마중 나갔다 .
들키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묘한 해방감은 잠시 접어두고 .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 밤바람도 좋았다 .
오랜만에 자전거 타다 넘어진 H 씨 표정도 귀여웠다 .
어제는 현관문 열고 들어섰는데 불이 꺼져 있었다 .
옷 갈아입고 씻고 나와 며칠 전부터 말썽을 부린 형광등부터 갈았다 .
설거지 해놓고 한숨 돌리고 신문 뒤적이는데 H 씨 “ 일찍 왔네 !” 라며 들어왔다 .
‘ 좀 더 있었으면 청소하고 빨래 개놨을 텐데 …… . ㅋㅋ ’
들키지 말아야 할 감정과 함께 삼킨 말이다 .
요즘 혼자 집에 있는 게 부쩍 좋아진다 . 이건 뭘까요 ? 대체 ?
#2
가을이다
.
젓가락 들고 배추벌레 잡는 게 일이다
.
가을 상추와 부추와 고구마순과 호박은 이 시기 텃밭의 즐거움이다 .
묵은 동치미무와 묵은 김치 , 매운 고추 , 우엉과 계란지단으로 말은 김밥
더 추워지기 전에 가을 나들이 해야겠다 .
#3
K 에게
‘ 행복에 안과 밖이 있을까 ?’ 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
‘ 행복해 보인다와 행복하다는 느낌의 차이쯤 되지 않을까 .’ 라는 대답에 , ‘ 타자의 시선과 감정도 내 행복의 요소 , 즉 행복의 겉모습이라 할 수 있나 ?’ 는 물음으로 되돌아 왔다 .
남에게 보이는 나의 외모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장과 피와 기억까지도 모든 것이 나이고 나를 이루는 요소고 이것들의 변화 또한 나라고 말 할 수 있는데 , 내 행복은 내 모습에 비유해선 잘 설명되지 않더구나 .
애초에 행복이라는 추상명사에 안과 밖을 구분 지어 인식하려는 게 틀렸을 수도 있다 . 하지만 내안의 행복이란 말을 흔히 쓰는 것으로 봐서는 밖의 행복도 있을 거다 .
행복에서 안과 밖은 어쩌면 방향성일지도 모르겠다 . ‘ 일체유심조 ’ 라고 인식하고 반응하는 마음 작용에 관한 것 , 통제 가능한 육체활동 따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내안의 행복이라면 사회관계나 음식 같이 외부로부터 충족되는 욕구에 관한 것들이 밖으로부터의 행복은 아닐까 ?
‘ 이렇게 공부가 힘든데 나중에 돈마저 못 벌면 짜증날 것 같다 ’ 며 투덜거리고 네가 힘들어하더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 기본적으로 제도교육이 직업과 관련 있고 직업은 돈과 권력 , 명예로 치환되는 사회라는 점에서 공부에 대한 너의 보상 욕구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르겠다 . 출가한 수행자가 아닌 이상 밖으로부터 오는 행복을 완전히 무시하고 사회생활을 하긴 힘들다 . 하물며 그 욕구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도 아닐 땐 더욱 그렇다 . 하지만 K 야 밖으로부터 오는 만족감만을 궁극의 행복 , 완성된 성취로 여기진 말거라 . 그렇다고 내면을 갈고 닦는 것만이 다라는 얘긴 하지 않겠다 . 사회관계에서 행복은 안에서도 오고 밖에서도 오는 것이기에 이를 적절히 다스릴 줄 알아야 그 행복이 오래간단다 . 나아가 온전한 사람 , 삶을 완성하는 문을 열 수 있을 거다 . 직업이란 형태로 욕망이 표현되고 그 욕망을 위한 공부에 매진하게 하는 현실 제도교육에서 참 어려운 일일 거다 .
사랑하는 딸
적절한 호구지책을 넘어서는 돈의 크기를 좇는 공부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 비록 네 공부가 팔아야 할 지식이고 돈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 그러기엔 네 청춘이 너무 빛난단다 . 조금 더 저항하고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대들어도 좋을 것 같다 .
모내기가 잘된 상태를 이르는 ‘ 사름 ’ 이라는 옛말이 있다 . 지금 네게 필요한 상태 아닐까 ?
지금은 네 삶에서 아마 모내기 시기쯤 될 거다 . 그렇다면 모가 튼실하게 뿌리내리도록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지 아닐까 ? 집중해야 할 현재가 아닐까 . 네가 있는 자리 , 늘 ‘ 사름 ’ 을 살피는 습관이 어쩌면 자신과 주변의 어떤 욕망에 휩쓸리지 않게 해줄지도 모르겠다 .
날이 흐리고 차졌다 . 늘 목을 따뜻하게 하고 다니렴 .
직업과 돈에 대하여 나도 조금 더 생각해봐야겠다 . 좀 더 정리된 생각들로 돈과 생활 , 행복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길 바란다 .
K 야
오늘도 행복하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