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일거리를 넘겨주고 잠시 틈이 나서 친구와 전시회를 갔습니다.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 작품 전시회였어요.
그냥 유명 스타의 부인이면서 전위예술가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던
요코는 매우 매력적인 사람이더군요.
전시회를 보고 나서 팬이 됐습니다.
전체적으로 유쾌하고 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였습니다.
시간이 되면 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작품들을 보면서 우선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지만 많은 위안을 받았어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비디오를 보여주는 코너가 몇 군데 있어요.
그 중 걸어가는 성인 남녀의 엉덩이만 촬영한 것이 있었어요.
누드를 단지 보여줄 뿐이죠.
우리는 엉덩이에 대해 이런저런 성적인 환상을 갖지만
현실 속의 엉덩이는 좀 그렇죠.
섹시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어쩌면 초라하기까지 한 일상을 유머스럽게 보여주는 것같았어요.
그리고 뮤직비디오도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는 장면으로 시작해요.
그런데 형체가 분명치 않게 보여요.
영국경찰도 보이고, 주변의 풍경도 있고, 군중들도 있죠.
음악은 계속되지만 형체는 점점 알아보기 힘들어져서
나중에는 그냥 색의 파편들이 되어 버려요.
서서 이걸 보고 있노라니 모든 게 상대적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더군요.
그런 경험 많이 있잖아요.
나만 힘든 것같이 느껴지다가도 사정이 더 안 좋은 경우를 보면
새삼 그래도 나는 행복하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경우.
뮤직비디오도 처음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지만
점점 형체가 없어지고 나중에는 색조차 없어지거든요.
그 즈음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모든 게 정말 상대적이라는.
심각한 시위상황조차도 그렇게 형체와 색깔조차 섞여서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내가 처해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자르기>라는 제목의 비디오도 있어요.
무대에 요코가 까만 투피스를 입고 바닥에 조용히 앉아 있어요.
잠시 후 관객들이 하나씩 나와서 날카로운 재단 가위로 그 여자의 옷을 조금씩 잘라요.
나중에는 속옷까지.
시종일관 요코는 무표정하게 있어요.
여자의 옷을 자른다는, 그 엄청난 폭력이 조용히 다가오는데도
마냥 무표정하게 앉아있는 요코의 상황이,
그 무겁고 무표정한 공포감이 충격적이더군요.
개인의 무력함이랄까,
특히 여자라는 존재의 무기력함이 절로 느껴지는 작품이었습니다.
작업실의 모든 것을 반으로 자르고
바람의 반, 삶의 반 이런 식의 설명이 붙어 있는 작품도 좋더군요.
반으로 잘린 물건들의 단면은 공허하고 무의미해보여서 좀 허망했지만
정말 삶의 단면은 그런 것일 것같아요.
명품의 대명사인 까르티에 통에
도토리 두 알을 담아 놓은 것도 있어요.
요코가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그림의 내용을 글로 써서 액자에 넣어 둔 '지시문 회화'들도 참신하고 아름다웠요.
매일 아침 판자나 유리에 못을 하나씩 박으시오.
못이 가득차면 작품이 완성됩니다.
이런 식이에요.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는 흰색을 칠한 사다리가 있고
그 사다리가 있는 곳의 천정에는 네모난 전등갓이 있어요.
그 전등갓에 뭐라고 글씨가 조그맣게 써있고
글씨를 읽을 수 있는 돋보기가 천정에 매달려 있어요.
yes라고 써있대요.
올라가서 읽어보게 되어 있는 건데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위치여서
차마 올라가보지 못하고 밑에 써있는 작품 해설만 읽었는데
나중에 엄청 아쉬웠어요.
올라가볼걸 하고 후회했지요.
이 전시회는 9월 14일까지 로댕갤러리에서 하는데요.
4천원짜리 티켓을 사면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피카소 판화전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판화전을 먼저 봤는데 이건 좀 괴로웠어요.
월요일은 휴관이구요. 개관시간은 10시부터 6시까지.
위치는 1,2호선 시청역 하차 8번 출구
남대문 방향으로 도보로 약 3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 동방플라자 1층이구요. 그 옆의 건물은 삼성생명입니다.
전화는 2259-77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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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전시회에 가보세요
보리 조회수 : 898
작성일 : 2003-08-05 19:56:12
IP : 211.227.xxx.243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김혜경
'03.8.5 8:31 PM (218.237.xxx.220)보리님 고맙습니다.
2. 복사꽃
'03.8.5 11:32 PM (220.73.xxx.174)보리님의 너무나 자세한 소감 정말 잘보았습니다. 직장이 남대문쪽이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그곳을 지나 다닙니다. 다니면서도 들어가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님의 전시회소감을 읽으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리님의 자세한 설명 덕에 이번주말엔 로댕갤러리에서 모처럼만에 여유로운 주말 보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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