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안쪽은 광한루원
도로 우측으로 지리산서 발원한 요천(蓼川)이 흐릅니다
요천은 남원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다 곡성에서 섬진강에 합류.
일부는 인공수로를 통해 광한루 연못으로 흘러들죠.
하천 주위에 여뀌꽃이 많아 여뀌 '요' 자, 요천입니다 .
광한루 바로 앞 요천.
예전엔 섬진강 수로 따라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다죠.
세종 때 정인지가 누각에 올랐답니다.
그리고 감탐사를.
/호남의 절경이로다.달나라에 있는 궁전인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이후 광한루(廣寒樓)가 되었고 남문엔 청허부 편액이.
달나라 광한청허부 궁전엔 미인 항아가 산다죠.
이곳은 남원성 남문이 있던 곳.
당시 남문 누마루가 바로 완월정(玩月亭).
남문으로 들어서니 만추!
우측 동선을 따라 이동합니다.
450년생 팽나무
광한루가 세워지던 시기네요, 광한루원 곳곳엔 고목 이 즐비.
완월정(玩月亭)
달을 희롱한다는 뜻.
그러니 우리 인간은 완월정 누마루에 올라야
맞은편 달나라 궁전 광한루를 가장 광한루답게 볼수있겠어요.
춘향 선발대회가 여기서 열립니다.
남원팔경 중의 하나인 광한추월(廣寒秋月)을
실질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누각.
왼쪽으로 삼신산 중의 하나인 방장섬이 보이고
광한루 못으로 들어가는 청류.
담장 밖 요천에서 흘러들어 와요.
1461년 남원부사 장의국이 대공사를 통해 요천의 물을 끌어들였다네요.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을 만들었던 것.
고리봉(1305m)~정령치(1172m)~만복대(1433m)에서 발원한
지리산 물이니 만큼 '1급수'
성춘향 사당
광한루에서 춘향전을 빼 면 어불성설.
/이도령이 하루는 춘흥을 못 이겨 방자를 불러 물으시되, “너희 고을 좋은 승지 강산 어데가 제일이냐?” 방자 여쭈우되,
“소인의 고을에 별반 승지 없사오나 낱낱이 아뢰리다.
북문 밖에 나가오면 교룡산성 좋사옵고 서문 밖 나가오면 관왕묘도 경치 좋고 남문 밖 나가오면 광한루 좋사온데,
오작교·영주각은 삼남 제일 승지로소이다.” “그러면 광한루 구경갈 터이니 나귀 안장 지어라.”(춘향전 에서)/
*교룡산상.관왕묘는 후술
춘향사당에 이르니 문화해설사 마이크 소리가요.
문화재 관람에서 가이드란....귀를 쫑긋 세워봅니다.
춘향사당은 일제 강점기 때 남원 기생들이 주도해 세웠다네요.
주도자는 봉선(鳳仙)!
순간 어,토지 그 봉순이?
그럼 박경리 선생은 이를 알고 봉순이라 했나...?...순간 상상의 나래를.
아이고야! 봉선이를 봉순이로 잘못들었네요.
그녀는 남원 권번의 수기(首妓,으뜸기생)로
진주 진양권번,부산의 동래권번,평양 권번,개성 권번 들을 독려하여 모금을 주도했답니다.
권번(券番)이요?
일제시대 기생들의 기적을 두었던 일종의 노동조합.
이후 춘향 제사도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제관도 남성이 아닌 권번의 기생들이 맡았고.
여성 제주는 이곳이 유일.
성은 최씨,,,봉선(崔鳳仙)은 8년간 제주로.
주천땅 다섯마 지기 기증도.
열녀춘향사
아래로 토끼와 거북 보이시나요?
별주부전에 나오는 그 토끼와 거북입니다.
일제에 대항을 위해 토끼의 지혜를 배우자는 그런 취지랍니다.
성춘향(成春香)
사당 내 영정으로 위당 김은호 (1892∼1979) 화백 작품.
위당은 역사적 인물의 영정을 많이 그렸죠,,,그게 표준 영정이 되었고.
촉석루 논개 영정,밀양 영남루 애랑 영정도.
주논개( 朱論介)
위당 김은호 작
따로 따로 보았을 때는 못느꼈는데
둘을 비교해서 보니 캐릭터 차이를 금방 느낄수 있겠네요.
비석군
거쳐간 남원부사들의 선정비 등등
남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이곳에.
선정비는 보통 부임을 마치고 떠난 후 주민들이 공덕을 기려 세워주는 게 정상이지만
대부분 재임 중 본인 셀프! 였다는.
광한루
일부는 온돌방으로.
우측 온돌 쪽은 익랑(翼廊)으로 후대에 증축한 것.
날개를 달듯 방을 들였다는 뜻.
두번째 석재 기둥!!
홈 보이시나요?
철창을 두른 흔적입니다.
일제는 2층 누각을 재판소로,아래는 감옥소로 전락시켰어요.
1910년부터 무려 18년 동안 .
여기엔 일제의 지배논리가 숨어있으니,,,,
임진왜란 당시 호남을 얻지 못해 패한 일본.
호남의 입구이자 상징인 남원 광한루를 한갓 죄인 처리소로 만들고 싶었겠죠.
이성계의 왜구 토벌 상징인 운봉 황산대첩비도 쪼개서 땅에 묻어버립니다.
전라선 부설 구실로 정유재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남원성 북문,서문도 해체하죠.
월랑(月廊)
세월이 흐르자 문제가 생겼어요. 누 북쪽이 기울지고 있었다는.
당시 남원부사는 남원 지역 유명 목수들을 모아놓고 공청회를 열었어요.
그리고 한 의견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기울림 방지용으로 월랑을 세웠는데 결과적으로 현관이라는 현대적 건축 시설이 탄생되였다는.
보통 누마루는 45도 각도의 계단을 세워 오르죠.
구조적 결함 해결하고,, 실용성 확보하고,,,,나아가 건축적 미관도 얻는 일석 삼조.
월랑을 통해 누각으로 올라가면 김종직,정철 등등 수많은 문사들이 남긴 편액들이
누각 내 현판으로 걸어놓은 편액들
누각에는 편액 80여점에 광한루의 역사를 기록한 누정기,중수기 등도 200여 편이나 됩니다.
기생이 남긴 것도 둘 있는데 기생 봉선이 남긴 글을 소개합니다.
乘鸞夜入廣寒樓 승난야입광한루
十二丹梯欲盡頭 십이단제욕진두
願乞紫皇金鳳詔 원걸자황금봉조
人間禁得別離愁 인간금득별리추
난새(신선이 타고 놀던새) 타고 광한루에 드니
아름다운 열두 계단 난간 위까지 이어졌네.
원하옵건대 금봉황을 시켜 상제께 전 합니다.
이후론 인간에게 이별의 근심일랑 주시 마소서.
妓生 鳳仙 (기생 봉선)
전라 관찰사 정철이 연못 안에 삼신산(三神山)을 만들면서 동시에 자라상도.
2미터가 넘는 대형 자라.
도교의 신선사상에 의거 자라라는 의견과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거북이라는 주장이 있네요.
거북이 바라다보는 방향이 동남쪽 지리산 천왕봉.
지리산서 불어오는 동남풍을 막는다는 풍수적 논리인게죠.
결국 광한루를 화재로 부터 방지.
* 三神山?
2100년 전 사마천 사기에 나온 것으로 봉래산(蓬萊山), 영주산(瀛洲山), 방장산(方丈山)
우리나라서는 흔히들 봉래 ( 蓬萊 ) 산은 금강 ( 金剛 ) 산 , 방장 ( 方丈 ) 산은 지리 ( 智異 ) 산,
영주 ( 瀛洲 ) 산은 한라 ( 漢拏 ) 산이라고들 하죠 .
자라돌 표지석,,,,별석(鼈石)
자라를 한자어로 별(鼈)이라.
판소리계 소설 별주부전이 바로 鼈主簿傳
사실 광한루원의 역사는 수백년 걸친 증개축의 역사라는.
고려 말 남쪽 지리산을 바라보던 요천 앞 작은 재(齋)에서 1만 6천평의 거대한 누원으로 발전합니다.
고려말 황희의 부친이 머물던 일재(逸齊)에서
황희는 유배와서 헐고 광통루(廣通樓)라는 누각을,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 정인지는 광한루란 이름을,
1461년엔 남원부사 장의국은 요천 물을 끌어들어 은하수를 상징하는 연못과 오작교를,
1584년 송강 정철은 연못 안에 봉래·방장·영주의 삼신산(三神山)을,
.
.
.
결국 삼신산은 광한루, 오작교와 더불어 월궁과 같은 선경을 상징하게 됩니다.
정유재란으로 전소된 것을 1638년 에 중건하고 이후에도 중건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이르렀고.
인면어(人面魚) 보이시나요?
가운데 노란 잉어!
잉어와 인간의 수명이 70여년으로
비슷해요.
정말이지 선경 이 따로 없네요.
광한루연가-춘향(남원시립국악단)
보이는 섬이 영주산을 상징하는 영주섬.
광한루~~~원(廣寒樓苑)으로 불러야하는 이유.
연못 주변에 노거수들이 즐비
특히 왕버들나무.
키가 크고 잎도 버드 나무 에 비하여 넓기 때문에 왕버들 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1582년 오작교 축조 당시 심어진 것으로 추정.
이제 영주섬으로 들어갑니다.
춘향전에도 영주섬 얘기가 나와요.
/이도령이 하루는 춘흥을 못 이겨 방자를 불러 물으시되, “너희 고을 좋은 승지 강산 어데가 제일이냐?” 방자 여쭈우되,
“ 북문 밖에 나가오면 교룡산성 좋사옵고 서문 밖 나가오면 관왕묘도 경치 좋고 남문 밖 나가오면 광한루 좋사온데,
오작교· 영주각은 삼남 제일 승지로소이다.” (춘향전 에서)/
영주섬에서 바라본 광
한루
영주섬서 바라본 오작교.
이곳이 바로,
작은 서제에서 시작해 땅을 파고,물을 끌여들이고,섬을 만들고,다리를 놓아 만든 이땅 최고 누원.
광한루는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평양 부벽루와 함께 4대 누각.
이중 으뜸은 광한루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정원을 크게 왕살,관아,개인으로 나눠본다면,
1.왕실은 경복궁 경회루, 비원
2.관아 조성은 광한루원
3.개인 조성은 담양 소쇄원(양산보)이 대표적이죠.
모두다 자연에 순응하고,자연을 닮고자하는 도교,성리학적 사고를 정원이란 공간에 표현
다음은 유홍준 교수의 광한루원에 대한 평.
/광한루원은 우리나라 조경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선 왕조 성립이후 궁궐의 후원을 꾸미면서 우리 조경문화는 음향오행사상과 풍수지리사상의 토대 위에서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 결합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데
광한루원은 바로 조선 전기 궁궐에서 완성된 조경문화가 널리 확산되는 과정의 산물이며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요소들로 가득찬 독특한 누원이다/
이무기가 승천하는듯
이무기 목덜미
모과나무
광한루원를 떠나 김시습의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 배경지인 만복사지로 고고!
어! 광한루 바깥 당장에서 해바라기 중인 표지석이 눈에 확 띄네요
광한루는 예 전 남원성 남문이 있던 자리네요 .
수은 최제 우가 전라도에서 최초로 포교활동을 하던 곳을 기념하는 표지석입니다.
수은은 당연 함양~인월~운봉~여원치를 거쳐왔겠죠.
1861년
해월 최제우는 광한루 아래 서형칠(약방)집에 머무른 후,
이후 교룡산성에 있는 은적암
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은적암서 바로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을 저술하죠.
이후부터 동학이라는 명칭으로 포교가 시작되니 남원은 동학의 성지가.
그리고 김개남이 호남좌도 동학군을 거느리고 남원을 거점으로 군비를 키울 당시,
교단 지휘소인 대도소(大都所) 역할을 한 곳 또한 광한루원 주변입니다.
1894년 광한루를 떠난 김개남의 주력 부대는 운봉 여원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최후를 맞이하죠 .
광한루 주변 옛사진
옛남원은 광한루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음을 알수 있네요.
광한루 앞마당은 장터였음이 사진에서도 보이고.
앞으로 요천이,,,그리고 섶다리도 보이는데 저 위치에 지금은 승사교 다리가.
우측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교룡산.
예전 여름철엔 섬진강 따라 나룻배가 하동~구례~곡성 거처 이곳 까지 들어왔다네요.
남원은 물길,땅길의 요지!
&&&....
만복사지
교룡산성
실상사 순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