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번째 금요일, 반포의 옥구슬님 집에서 열리는 오페라 함께 보기, 오늘이 두 번째 날인데
오늘은 그냥 결석할까, 그래도 한 번 참여한 모임인데 가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갈등하게 된 사연은
오늘 밤 호암 아트홀에서 메토로폴리탄 오페라 오리 백작을 예매해두었기 때문이었지요.
하루에 오페라 두 편을? 그것은 조금 과한 일이 아닐까 싶어서 망서리다가 모범생 기질이 발동하여 결국 집을 나섰습니다.
고속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에 지하철에서 독일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재미있는 것은 어떤 언어보다 진도가 빠르다는 것
아마 그동안의 노력이 독일어에서 결실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혼자서 추측을 해보게 되네요 ) 대화도서관에서 빌려온 소설
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를 조금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설의 여자 주인공은 레닌그라드가 독일의 침공에 직면했을 때
에르미타쥬 미술관에 근무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미술관의 그림들을 정리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 이후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치매에 걸린 여성으로 나오고 있더군요. 에르미타쥬,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그림들이 많은 곳이라서
언젠가 한 번은 꼭 가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곳인데 소설에서 먼저 이렇게 만나게 되니 이것은 무슨 인연인가 혼자서
가느다란 인연의 끈을 하나 미리 준비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고속터미널에서 만난 산노을님 차를 얻어타고 반포에 도착하니 이미 다른 멤버들은 와 있었습니다. 추석후라 그런지
송편을 비롯한 떡 커피, 먹을 거리가 풍성해서 식탁에 앉아 거의 한 시간 이야기꽃이 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보기 시작한 오페라가 베르디의 운명의 힘, 처음 보는 오페라인데 돈 카를로역의 오페라 가수가 눈길을 끌더군요.
그가 주연으로 나온 멕베쓰를 초코왕자님이 마침 소장하고 있다고 해서 다음에는 그 작품을 보는 것은 어떤가 하는 이야기가 나왔지요.
집에서 보는 오페라라서 중간 중간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해 나가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시간입니다.
긴 비극이 다 끝나고 나니 오후 2시가 훌쩍 넘은 시간, 하이썬님이 들고 온 반찬을 곁들여서 맛있는 점심을 함께 먹고서는
가야 할 사람들이 먼저 일어서고 주인장과 하이썬님, 이렇게 세 사람이 남아서 못 다 한 이야기, 새로운 이야기로 다시 한참을
놀았지요. 그러고 보니 밖에서 공부하는 날이면 이렇게 늘어지게 수다를 떠는 일은 쉽지 않은데 역시 공간이 주는 묘한 변화를 느끼게
되네요.
그녀의 집에는 제가 들어 본 적이 없는 음반, 본 적이 없는 잡지, 그림이 있어서 새로운 공간에서 새롭게 만나는 자극도 상당하고
관심사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보면 역시 생각지도 않았던 일들이 벌어집니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면서도 한 번도 달려들어서 제대로
노력해보지 않았던 한문으로 된 책읽기, 내년에는 한 번 시도해보자고 옥구슬님에게 제안하기도 하고, 생각보다 강한 반응이 와서
즐겁기도 했고요. 대학시절에는 학교 다니는 일을 별로 즐기지 않았다던 하이썬님, 지금은 공부에 재미를 붙여서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해서
발제하는 그녀를 보면서 사람에게 무엇인가 꽃피는 시기를 일정한 연령대로 한정하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인가
그런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된 날이기도 했습니다.
아침 시간의 비극, 저녁시간의 희극, 두 장르 사이에 낀 시간들도 좋았고 저녁시간에 본 오리 백작 ,마지막까지 웃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금요일, 늘 풍성하면서도 어딘가 조금씩 다른 금요일이 갖는 매력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제게 생긴 변화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돌아오는 길, 가방안에는 아침에 들고 나간 것과 다른 것들이 가득했는데요, 돌려받은 트렘펫 앙코르 음반, 빌려온 낯선 오페라
그리고 몰락의 에티카라는 책 제목으로만 알고 있던 신형철의 산문 느낌의 공동체가 들어있었습니다. 느낌의 공동체, 산노을님에게
빌린 이 책을 오리 백작 보기 전 잠깐 펼쳐 보았는데 그렇게 볼 책이 아닌 것 같아서 한 꼭지만 읽고 덮었습니다.
집에 와서 트럼펫 곡을 틀어놓고, 화요일에 골라 놓은 (그 날 휘트니 미술관 전시 보고 와서 ) 호퍼의 그림을 보면서 쉬는 중에
갑자기 느낌의 공동체 한 꼭지라도 읽고 싶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