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고창읍성(高敞邑城)입니다.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백제 때 고창을 모***라 불러서라네요.
충남 서산 해미읍성,전남 순천 낙안읍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읍성.
그러면 정서를 환기시키는 미학적 측면에서 3대 산성은??
충북 보은 삼년산성,충북 단양 온달산성,경북 문경 견훤산성 정도 되겠네요.
정문서 바라본 우측(서문쪽)~
정문서 바라본 좌측(동문쪽)~~
정문 북문이 보이고~
옹성을 통과하면~~
정문인 공북루(拱北樓)~~
편액에서 북쪽을 지키는 문임을 알수있고.
세종 때 축성했다네요.
전라우도인 고창,고부,김제,무장,영광,장성,함평,,,등등,,,심지여 제주도까지(당시 제주도는 전라우도)
전라좌도인 담양,순창,임실 등등.
전라도19개 군현 백성이 징발되 3년만에 낙성한 대역사.
성곽 위로 난 길을 따라 동문으로 향합니다.
북문 앞으로 고창 읍내가 보이고~~
참 깔끔한 고을.
성내 소나무~~
동문이 보이네요.
총 길이는 1700여미터~~
고창읍성은 장성 입암산성,영광 법성진성과 더불어 전라 서해안 3대 전진 기지.
등양루(登陽樓)~~
편액에서 동문임을 알수있고.
동문 앞에 항아리같은 옹성을 쌓아 이중방어선을 구축~~.
동문 지나 남쪽으로 향합니다.
성안은 소나무 세상~~
북,동,서문만 있고 남문은 없네요.
대신 치(雉)를 길게 빼 방어 효과를 높였고.
성곽의 돌출된 부분을 이르는 치 (雉)는 꿩을 의미.
꿩의 지혜를 빌린 성곽 구조물로,치는 고구려가 최초로 사용한 특허품.
꿩은 몸을 풀숲에 숨기고 머리만 내밀어 밖의 동태를 살피죠.
서문이 보이네요.
서문 편액은 진서루(鎭西樓)~~
문틀 안으로 읍내가 보이고.
고창은 동쪽과 남쪽은 노령산맥이 지나가 산으로 둘러쌓였고,반면 서쪽은 넓은 들판.
그러나 서쪽 끝도 선운산 등 산으로 둘려쌓여 전체적으로 소쿠리같다는.
서문 앞에도 옹성이~~
정문인 북문 공북루~~
원점에 회기했네요.
공북루를 들어서면 성안은 이리 평지~~
당시엔 동헌,객사가 들어서 고창현 행정,군사의 중심.
일반 백성은 성 밖에 살다 유사시 성안으로 들어왔고.
일제는 성내 동헌,객사등을 회손하고 경찰서,면사무소로 사용.
해방 후에는 고창여중,여고가 성안에 있었다는.
제게 뭐냐구요??
여인네들이 대보름날 성밟기(답성놀이)하면서 머리에 돌을 이고 걷는 모습.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저 행해지고 있고.
한바퀴 돌면 다리병이 낳고,두 바퀴면 무병장수,세바퀴면 극락왕생한다네요.
당시엔 정읍 등 이웃 군현 주민들도 참가할 정도로 인기있는 이벤트.
사실은 수준 높은 노동력 착취었겠죠.
해빙기 땅을 굳게할수 있고 무너진 돌도 보충하고 등등.
해인사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도는 탑돌이도 이와 유사.
최초 대장경판이 강화 선원사에 있었죠.
태조 때 한강을 거슬로 올라 충주에서 육지로 내린 후 문경 새재 넘고 다시 낙동강 물줄기 타고 개경포 까지.
대장경 판을 내렸기에 開經浦.
개경포에서 내린 후 소달구지,남부여대로 해인사 까지,,,이게 전통으로 이어졌고.
읍성 바로 앞에 있는 동리 신재효(申在孝,1812~1884) 고택, 동리정사(桐里精舍)~~
신재효는 당시 유행하던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춘향가>〈심청가>〈수궁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타령> 정리한 장본인.
또 짧은 판소리인 단가 수편을 짓고 후학을 양성한 판소리 중흥조.
당시 신재효는 고창 현감 밑에서 이방 노릇을 하다가 호장이 되었으니 관직으론 고창현 2인자.
자신의 집을 '동리정사(桐里精舍)'라 이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고.'동리'는 그의 아호.
소리청에 소리꾼들이 몰렸으니,
천석꾼이라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생활비까지도 대주었다나.
어느 날 신재효는 한 선비와 함께 길을 가다 갓 만드는 갓장이(笠工)를 만났는데,,,,
그는 갓장이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정겨운 이야기까지.
이를 본 선비는 "체신머리 없이 왜 상놈에게 그토록 다정하게 대하는가?" 했고.
그러자 신재효 왈,
" 양반은 통갓을 쓰고 뽐내며 귀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갓 만드는 사람을 얕보는 버릇이 있네.이는 선비가 할 짓이 아니야!!"
동리정사는 주변 지대 보다 반층 정도가 낮네요.왜??
대청 밑으로 계곡수가 흐르게 하고 사랑채 앞을 연못으로 꾸미는 등 풍류의 공간으로 만들어서.
제자 중에 진채선(1847~?)이 있었으니~~
고창군 무장(갑오농민 전쟁 때 최초 농민군 봉기한 곳)에서 출생.
조선 후기 전주대사습에서(?) 신재효에 의해 발굴된 최초의 여자명창으로 결국 신재효의 애재자이자 연인으로.
그녀의 명성이 한양까지 퍼져 경회루에서 열린 경복궁 낙성연 무대에 섰고.그때 부른 노래가 스승이 지은 <방아타령>.
이를 본 대원군은 운영궁 대령기생으로 차출.
(경복궁 역사 때 많은 노래(노동요)를 만들어 일꾼들에게 부르게 했으니〈경복궁타령>도 그중 하나)
11월 말 개봉 예정인 신재효 도리화가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 <도리화가> 티저 포스터.
진채선이 신재효에게 돌아올 수 없게되자
스승은 정인을 향한 그리움으로〈도리화가>를 지어 진채선에게 보냈고.
그때 신재효의 나이 회갑을 앞둔 59세,진채선의 나이 24세.
그럼 말년은???
그녀는 스승을 위해 흥선 대원군에 선을 대주었고 흥선은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라는 무관직을 내려주었다는.
73세를 산 스승은 고창읍 내 성두리에 뭍혔고,
진채선은 대원군 실각 후 고향에 내려와서 스승을 만났다는데(?) 이후는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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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고창읍내서 해결하고 선운사 인근 팬션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