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양동마을 전경~~~
왼편이 안강평야.
반가(班家)하면 먼저 떠오르는 동네는 어딜까.
안동 하회마을이라구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더 반가다운 기품을 드러내는 곳이 있으니 바로 경주 양동마을.
둘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
그러나 자리매김에 차이가 있으니, 하회는 강가요 양동은 낮은 산자락에.
그래서 양동마을이 훨 시원시원해 보이죠.
1459년 월성(경주) 손씨의 종가 서백당이 들어선 이후 17세기 즈음에는 700여 가구 까지,,,지금은 1백여가구.
이중 70여 가구가 한옥.
경주와 포항 딱 중간. 마을 가까이에 경주에서 흘러온 형산강이 포항으로 흐르고.
주차장,연이 자라는 곳은 예전엔 소작농,외거노비 등 하층민이 살았고,,,반가들은 위쪽에.
서백당(書百堂,1459,중요민속문화재)~~
매일 참을 인(忍)자를 백번 쓴다는 뜻.
양동마을서 가장 오래된 반가로 지금의 양동마을 역사,아이덴티티는 이곳에서 부터.
솟을대문 사이로~~
1459년 서백당이 들어선 이후 경주(월성) 손(孫)씨와 여강(여주) 이(李)씨 두 세도가가
후손 분가 형식으로 서로 경쟁하듯 확장.
당연 고가 대부분은 양 문중 소유.
재밋는 건 양 문중은 처가를 접수하면서 번성했다는.
경주 손씨로 입향조인 손소(1433~1484)는 이 마을 외동에 장가들며 처가 재산을 접수.(본가는 후손이 끊김),
여강 이씨로 입향조라 할수있는 회재 이언적(1491~1553)의 부친도 손소의 고명딸에 장가들면서.
즉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로로 월성 손씨(月城孫氏) 손소(孫昭)가 양동마을에 들어왔고,
이어 여강 이씨(驪江李氏) 이번(李蕃)은 손소 고명딸에 장가들었다는.
그 소산이 바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이언적도 외삼촌인 손중돈(손소 아들) 이곳 서백당서 태어났고
이언적은 어려서 외삼촌의 관직처를 따라다니며 성장했으니 학문적으로 손중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터.
회재는 퇴계 성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영남학파의 종조격인 인물.
퇴계,율곡 이전에 근기지방엔 서경덕이였다면 영남은 이언적.
서백당 내 6백년 향나무~~
향나무 뒤로 사당.
당연 제향 때는 저 향나무를 잘라 향을 살랐겠죠.
사당 뒷쪽에서 본 서백당 안채(우측)
향나무 뒤로~
마을 들머리에 있는 정충비각(旌忠碑閣)~~
병자호란 때 목숨을 바친 손종로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 때 세움.
언덕배기에 향단(香壇)이 보이네요.
향단(香壇,보물)~~~
예전엔 99칸 짜리였으나 지금은 70여칸.
이언적이 경상관찰사로 부임하면서 지은 건물로 이임하며서 동생한테 물려줌.
이언적의 부를 짐작할수 있는 대목.,,,천상 청백리는 아니였던 모양.
중앙 위쪽으로 관가정이 보이고~~
관가정 초입 고목 셋~~
왼쪽 둘은 은행나무,우측은 회화나무.
둘다 학문과 관련 된 상징수.
공자는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를 가르쳤고,회화나무는 학자수라는 별칭이.
관가정(보물)은 우재 손중돈(1463~1529)이 살던 집~~
우재는 서백당에서 태어났으나 이곳으로 분가했으니 관가정은 5 백 년간 월성손씨 대종가.
관가정(觀稼亭)~~
의미하는게 중의적이네요.
저기 정자에 오르면 앞 안강뜰이 훤히 보인다는.
직역하면 곡식이 자라는 것을 살피는 곳이라는 뜻이지만 들판에서 일하는 노비에 대한 감독도.
관가정에서 바라보면 멀리 경주시도.
사당 앞 배롱나무~~
퇴락한 고가에 피여나는 배롱나무의 시각적 효과란.....
붉은 배롱나무 한그루만으로도 단숨에 생기가 돌죠.
그래서 예로부터 관가나 무덤 주변에 많이 심었고.
고가가 그윽하게 잠겼네여
솟을대문 편액은 이호문(二乎門)~~
객이 두번은 불러야 응한다는 뜻이겠죠.
당호는 영귀정(泳歸亭)~~
회재 이언적이 어려서 공부한던 곳으로 후손들이 추모 공간으로 지었다는.
'영귀정(詠歸亭)'이란 이름의 정자가 적잖죠.
의성 서변리에도 울진에는 영귀정 터가.
많은 이유가 있어요.
당호 출처는 어디가 가장 많을까? 논어입니다.
'영귀(詠歸)'가 된 것도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공자가 자로,증점,염유 등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각자의 포부를 물었죠.
모두들 정치적 경륜 운운하는데 유독 증점(증자의 아버지)만이 다음과 같이 답했다는.
/늦은 봄철에 봄옷을 갈아입고 5∼6인의 어른과 6∼7인의 아이들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고 싶습니다./
(莫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者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이에 공자는 오여점야(吾與點也)라 했다는.
내 생각이 증점같다며 흡족해 한 것.
설천정사(雪川精舍)~~
여기 툇마루에 서면 안강평야가 한눈에.
이언적 후손 모모씨가 강학하던 곳으로 이후 후손이 그를 추모해 세운 것.
2001년 화재로 최근 다시 건립.
설천정사 대문~~
예전엔 저 들녁이 죄다 월성 손씨,여강 이씨 소유였다나. 너머 안강평야까지~~
그러니 안강평야는 두 문중의 물적 기반.
양동마을은 안강평야 동쪽 끝이요,
서쪽 끝엔 이언적을 배향하는 옥산서원과 회재가 41세 때 낙향해 7년 간 살았던 독락당(獨樂堂,세계문화유산)이 있네요.
"안강뜰은 모두 내것이로다!" 하며 西로 갔을까요?
사이 사이 보이는 초가들은 당시엔 양민들이나 외거노비들이 살던 곳.
텃밭들은 옛 초가 터.
무첨당(無添堂,보물) 집입로~~
도열하고 있는 배롱나무가 환상~~~.
무첨당~~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의 종가집 별당으로 간결하면서도 세련미가 압권.
무첨당(無添堂)이라???
'조상에 한점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
무첨당 누마루에 올라서 보니~~
대청엔 左海琴書 편액이~~~
좌해금서(左海琴書)는 대원군이 집권 전 썼다고 전해지는 죽필글씨로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
안채 정원에 핀 해당화~~
별당과 안채(우측) 사이 높은 터에 사당을~~
사당~~
사당서 바라본 안채~
사당서 바라본 별당,무첨당~~~
창은정사(蒼隱精舍)~~
철종11년에 건립한 주택으로 'ㅁ'자 형태.
정교하고 세련된 건축양식으로 건축학도들의 학습 명소라네요.
이 집 주인장이 대원군 때 영남 유림을 대표해서 영남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다나.
양졸정(養拙亭)~
자리앉음새가 드라마틱하네요.
영조(1734년) 때 이언적 후손들이 지은 정자.
한국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2년에 중건.
심수정(心水亭)~~
'낮은 곳으로 흐르며 다투지도 아니하는 물의 성품을 닮은다'는 뜻이겠죠.
이언적(李彦迪) 동생인 농재 이언괄(1494~1553) 추모 정자.
양동마을서 가장 큰 정자로 대청마루엔 삼관헌(三觀軒), 심수정(心水亭), 이양재(二養齋) 등 새개의 편액이.
대청마루와 연결된 함허루(函虛樓) 편액이 달린 누마루에 오르면
맞은편 양동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심수정은 철종 때 소실이 되었다가 1917년에 다시 지었고.
그러나 우측 곳간은 1560년 당시 건물.
심수정 내 수백년 된 회화나무 고목 셋~~
왜 세 그루일까???
회화나무의 인문학적인 상징을 보면 알수있죠.
회화나무는 한자로는 槐木,학자수라는 별칭이.
중국 주나라 때 부터 신목으로 여겨져 집안,관청,사찰 등에 많이 심었다는.
장사하는 사람은 가계 앞에,공부하는 사람은 서재 앞 등등.
특히 학자들의 사랑을 독차지 해 문리(文理)를 깨우치는 신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이리 정승 탄생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 그루를 심은 거죠.
그래서 우리나라 곳곳엔 괴목정이라는 지명이 많은데 회화나무 고목이 있어서.
회화나무는 생태학적으로도 매력적~~~
이파리, 꽃,향기가 아카시아 꼬마 버전이랄까.
아카시아는 봄에 꽃피지만 회화나무는 초여름에 약간 푸르스름한 색깔로.
향기도 좋고 회화나무 꿀은 귀하게 여기고.나무는 중풍 예방한다며 배게,지팡이 등으로도.
공해에도 강해 요즘엔 가로수도 인기.
인사동,압구정동 거리는 물론 88 강변도로 반포~청담까지 가로수가 죄다 회화나무,,, 북경에도.
그런데 대문 밖에도 한 그루가 있네요.
하늘의 기를 지상에 전해주는 신목으로 여겨저 문밖에 심으면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한다나.
마을 전체를 찬찬히 살피면 지형이 '勿'자 형국임을 알수있네요.
풍수에서 勿 자 지형은 길지로 여겨진다네요.
勿이 '맑음'을 의미하기도,,,계곡수이니 맑을 터.
그런데 산을 좋아한 나로서는 좀 의아함이.
산 정상이나 능선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능선의 태반은 저런 勿자 형태라는.
큰 능선에서 갈라진 작은 능선들이 새끼치듯 뻗어나가면서 능선들 사이로 작은 계곡이 만들어지고.
나아가 하부는 작은 평지가 형성되면서 자연부락이 들어선다는.
우리나라 마을은 저런 형국이 적잖다는 얘기.
&&....
1)오랜만에 3박4일 경주 여행을 다녀왔는데....첫날이 양동 마을.
마지막 날 감포 앞바다 갯바위서 사진찍다 미끄러졌다는. 바닷물이라 부식이 금방.
자료 다 날라가고 핸펀 교체하고,,,사진은 백업된 양동 마을만(그것도 일부) 살았다는.
손목 인대도 늘어나고,,,좀 짜증나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사.
2)올린 사진은 많은 고가(古家) 중 1/4도 정도.
3)이번 양동마을에서 역사의 이면을 느껴보았으니...
경세가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입니다.
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퇴계 성리학은 회재에서 시작됬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래서 영남학파의 종조 같은 존재.
사실 회재의 아버지는 양동마을에서 처가살이를 시작한 후
양동마을은 결국 여강(여주 앞을 흐르는 남한강을 여주 사람들은 여강이라 부름) 이(李)씨의 천하가 되었다는.
향단,무첨당,영귀정,석천정사,심수정 등등 양동마을 내 고가 대부분은 이씨 문중의 종가 내지는 파종가(派宗家).
우스게로 안강평야는 월성 손씨 아니면 여강 이씨 소유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
안강평야는 두 문중의 물적 기반인 셈인데,
양동마 을은 안강평야 동쪽 끝이요,
회재 이언적을 배향하는 옥산서원과 회재가 41세 때 낙향해 7년 간 살았던 독락당(獨樂堂)은 서쪽 끝.
동에서 서까지 안강평야는 회재 내지는 후손의 관리(?)하에 있었을지도.
역사의 이면을 추론해보는 것이야말로 역사공부의 묘미일 터.
옥산서원은 사액서원이라 경주부윤(시장)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인근 사찰은 옥산서원에 소속되어 사찰은 종이,신발,목판 간행 등을.
*)경주부 내 부곡에 거주하는 갓바치,대장장이 등 장인 200여명을 옥산서원 소유
*)사액이라 애초 20여명 노비를 하사받았으나 자체 증식으로 200여명으로 늘어났고
*)심지여 장기(포항)에 어선 세척까지 소유해 소금,건어물 등을 조달했다는.
추측컨데 안강평야도 옥산서원이라는 권력 축으로 해 두 문중의 수중에 들어갔을듯.
성리 학의 근본은 자기수양!!
4)눈덮이고,봄꽃 피고,신록에,단풍까지 비발디 사계 같이 매력적인 곳.
건축사적인 관삼이라면 적어도 하루는 시간 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