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금요일 고전읽기 모임의 멤버들이 모여서 세 편의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로마에 관한 영상물 하나, 그리고 로마제국의 탄생과 몰락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물중에서
두 편 하나는 네로와 다른 하나는 기독교의 탄생이 가져온 로마사회의 변화에 대한 것이었지요.
로마사를 다 읽고 나서 나머지 4편도 찾아서 함께 보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글로만 읽을 때와 영상을 볼 때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지요. 물론 현대의 기술을 동원하고
시청자에게 볼 거리를 제공하는 차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방침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기서 조금만 더
하고 바라는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아서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이 의미있는 것은
영상을 통해서 너머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하는 힘때문이겠지요?
토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크라수스 조각상이 있나 찾으러 들어온 사연은 토요일 낮 시간 로마사를 함께 읽는
멤버들에게 인물에 대한 소개글을 써보라고 주문했는데 그 중의 한 여학생이 인물소개글에 조각상을 올리면서
크라수스가 맞는지 확인을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검색을 해도 크라수스에 대한 조각상을 찾지 못하고
그 대신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이 소장하고 있는 로마의 인물상들이 소개된 코너를 찾았습니다.
아니, 이런 것도 있었단 말이야? 그렇게 느껴도 이미 때는 늦었지요. 당시 그 곳에 갔을 때는 너무 많은 볼거리가
있어서 하루하고 반나절을 갔어도 흡족하게 다 볼 수는 없었고 당시만 해도 그리스 유물에 더 주목하느라 로마에
관한 것은 거의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말았거든요.
처음 소개한 인물은 가이우스 마리우스, 늘 술라와 더불어 이야기되는 사람이고 카이사르의 인척이기도 하지요.
7번의 집정관을 거쳤다는 그는 군대를 장악해서 군사들이 나라가 아니라 개인 장군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한
인물, 말하자면 로마 공화국의 군대 구조를 변화시킨 인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의 인척이란 이유로 술라가
살생부를 만들었을 당시 카이사르도 문제가 되었지만 카이사르를 살려주면서 술라는 어쩌면 이것이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게 될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더라고요.
폼페이우스입니다. 저는 이 조각상을 보고 나서는 군인으로서는 아주 젊은 나이부터 재능을 발휘한 그가
정치적으로는 그에 못 미치는 판단력을 보여주는 글을 읽으면서 상상한 모습과 달라서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뭐랄까 웃음이 많은 얼굴이란 이미지라고 하면 될까요? 조각가의 손길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인물상은 그것만으로도
바라보는 이쪽에서 여러가지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 그것이 예술가가 갖고 있는 힘이겠지요?
카이사르입니다. 그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있지요. 개인적으로 그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상관없이 그가
로마사의 분수령이 되고 있는 지점에 대해서 이번 기회에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터라 흥미를 갖고 얼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입니다. 밀라노 칙령, 니케아 공의회로 인해 앞으로의 로마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인물
수도를 옮겨서 지금의 이스탄불에 자신의 이름을 딴 콘스탄티노풀을 만들고 새로운 로마를 세워 나간 인물
우리에게 익숙한 삼위일체 교리가 사실은 논쟁에서 이긴 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라면 정통과 이단이란
과연 정해진 것인가 의심하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루시우스 베루스 누구지? 낯선 이름을 보다가 연도를 확인하니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와 더불어 공동으로 통치했다는 바로 그 베루스네요. 이렇게 얼굴을 보고 나면 앞으로
그에 관한 글을 읽을 때 조금은 더 선명하게 이미지가 떠오를 것 같네요.
앞에서부터 티투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라고 합니다. 티투스는 로마에 갔을 때 그의 개선문을 본 적이
있어서 제게 확실하게 각인된 이름이기도 하고, 그가 다스리던 시대에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했던 것이라
연관해서 이름을 기억하게 되기도 하는 인물이고요, 트라야누스는 다키아 원정기를 기둥에 새긴 것과
그가 만들었던 시장에 가보았던 기억도 남아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 회상록이란 책을 읽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아직 시도를 못하고 있는 중이라
그의 이름을 만나니 다시 그 생각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안토니누스 피우스, 이름에 피우스가 붙은 것은 경건한 이란
의미를 사후에 추증한 것이겠지요? 황제의 이름에 피우스란 이름이 붙은 것이 인상적인 이 인물이 다스리던 시대가
로마역사상 가장 평온해서 역사적으로는 기록할 만한 사건이 없었다고요. 재미있는 것은 그런 시대일수록 드라마틱한
일이 별로 없어서 역사기록을 읽는 사람들에겐 따분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 사실은 그런 시대를 살고 싶은 법인데
말이지요.
콤모두스, 마르쿠스 아우엘리우스의 아들이지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 있고요., 스토아 철학을 어린 시절에 읽고 감명을
받아서 절제하는 삶을 산 황제가 자신의 부인의 어리석음과 허영심을 그리고 아들의 성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에게 공동황제처럼 일을 처리하게 한 뒤 결국 아들의 성격을 파악하고 후회했다는 글을 읽으면서 혈연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지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다음 너무 큰 영토를 혼자 다스리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고 동, 서를 갈라서
자신은 동부를 맡고 다른 한 명에게 서부를 그리고 각각의 휘하에 부제를 두고 4명이 통치하기로 정했지만
그것이 그의 사후에는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바로 그런 결정을 하고 4명이 정해지고 나서
조각상을 만들어서 세운 모양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까메오입니다.
기번의 책을 읽다가 흥미가 생겨서 조금 더 읽어보고 싶어진 인물, 정치적인 것, 개인적인 것, 그리고 시대 상황에
대한 것을 다 포함해서요.
정작 찾으려던 크라수스는 발견하지 못했지만 즐거운 탐색의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