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 쉬고 모이는 목요일 건축사, 오늘로 벌써 세 번, 지난 시간에 이어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바로크에
관한 것을 보고 들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매번 멤버 구성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요, 오늘은 멀리 분당에서
아템포님이 참석하셔서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습니다. 강남 역사모임에서 만나는 것보다 훨씬 반가웠던
것은 아무래도 그 먼 길을 온 마음에 감동한 것 때문이겠지요?
지난 번에 함께 배운 바로크에 대한 것을 간단히 복습한 다음, 오늘 유난히 많이 참석한 어린 학생들을 배려해서
지혜나무님이 우리들에게 보여준 동영상이 바로 쉬는 날의 루브르에 온 어린 아이들이었는데요
아무래도 그 다큐멘터리에서는 그림에 관한 것이 많아서 (저는 물론 침흘리면서 보고 있었지만 건축에 관한
것을 더 보자는 의견에 밀려서 중단하고 ) 루브르를 건축적인 측면에서 조망하는 다큐로 바꾸었습니다.
중세에 성채로 이용되던 루브르가 프랑수아 1세, 앙리 4세 그리고 루이 14세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변화되어
왔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이 제겐 좋은 공부가 되었지요. 그리고 메디치의 방이라고 명명된 루벤스의
그림들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서 여러 번 그 방에 갔어도 그림을 제대로 못 보고 지나쳤다는 것을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된 것도 소득이었고요.

자료를 찾으러 사이버상의 루브르에 들어오니 보아야 할 자료가 너무 많군요. 오늘 하루 종일 바쁜 날이라서
이제야 건축사 정리할 시간이 났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 그래도 정리하던 일이라 그냥 넘어가기 어려워서
일단 운만 떼어 놓습니다. 그러면 지혜나무님이 후속으로 내용을 보강해 줄테니까요.
The History of the Louvre: From Château to Museum
이런 제목을 보고 나서 아하, 소리가 절로 나는 것을 보니 역시 한 번 듣는 것의 효력을 바로 느끼게 되네요.
우리가 생각하는 루브르는 오래 된 궁전을 박물관으로 내놓은 것이지만 그 뒤로도 계속 새로운 건물이 보강이
되어서 실제로는 신구의 조화가 어우러진 공간이란 것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답니다.

사실은 2009년 겨울 루브르에 갔을 때도 시간이 모자라서 이번에는 리슐리외 관만 제대로 보자 마음먹고
하루 종일 그 곳에 있었는데 눈으로 보고도 그 공간의 특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주로 작품 보는 일에만
몰두했었던 것이 오늘 다큐멘터리를 보고서야 눈에 들어왔으니 눈이라고 다 같은 눈이 아닌 셈인가요?

지난 시간에는 건축에 관심이 갔다면 이번에는 실내, 그것도 서로 다른 바로크 (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독일
그리고 영국, 미국 ) 외부와 내부의 차이 외부가 바로크라면 내부는 로코코, 이런 식으로 간단명료하게
줄여서 생각하는 것이 꼭 정확한 것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지요. 막연하게 로코코는 건축에는 적용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작은 규모의 인간적인 ( 인간성이 좋다 뭐 그런 의미가 아니라 건축이
갖는 대규모가 아니라 human scale이란 의미에서 ) 건축물을 로코코식이라고 하더라고요.

마담 퐁파두르를 찾으러 들어오니 같은 화가가 그린 다른 여성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녀는 뉴턴에 대해서
숙고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졌네요. 그러니 한 시기를 한 가지로 조망하면 얼마나 빠뜨리기 쉬운 것이 많은가
연결고리가 생겨서 이것 저것 함께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한 편으로는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그런 생각 한 편,아니 능력있는 저자가 다양하게 볼 수 있는 저서를
써내면 되는 일이 아닌가 공연히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성직자,왕, 귀족의 취향이 바로크적이라면 경제력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브루주아의 문화가 로코코 풍의
실내를 만들어내고 살롱을 통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한 것이라고 거칠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부세의 그림이 그런 경향을 잘 표현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모닝 커피가 그림의 제목입니다.

루이 15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퐁파두르 부인, 그녀는 부세를 화가로서 신뢰해서 많은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고 하네요.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스케치인데요 오늘 강의 듣고 나니 이 스케치가 달리 보인다는 것, 신기합니다.
공간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누가 쓰는가, 누가 그 시대의 미감각을 주도하는가에 따라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점을 다시 생각해본 날이기도 했습니다.

서양화를 보다 보면 모자를 파는 사람, 모자 가게, 혹은 모자를 쓴 여성이나 남성을 그림의 소재로서 가끔
만나게 되는데요, 제 주변에도 모자를 아주 잘 소화하는 여성이 있어서 그런지 유심히 보게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보는 것으로 하고, 함께 수업에 참석한 사람들의 덧붙인 글로 풍성하게 서로 나누는
그런 시간이 되었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