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름이 헛갈리지만 연주는 자주 듣게 되는 미샤 마이스키 (혹시 다른 이름이라면 지적해주시길)
그가 딸과 연주하는 것은 들은 적이 있지만 딸, 아들 그리고 본인 셋이서 삼중주를 하는 것을 오늘
우연히 티브이에서 발견했습니다. 상황은 열악해서 그 곳이 바로 체력단련장의 러닝 머신위에서 였지요.
운동하려고 튼 티브이의 번호를 돌리다가 딱 만난 순간,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지만 그래도
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음악회도 이미 시작한 지 오래였어도 그런 것은 전혀 상관이 없었는데요
마지막에 앙콜곡으로 베토벤의 클라리넷 삼중주를 틀라리넷 대신 바이올린 편곡한 곡과 청산에 살리라까지
다 듣고 나니 운동기구위에서 저절로 박수가 나오더군요.

집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르동 그림을 보고 싶어지네요.
한 가족이 음악으로 무대에 서는 경우 같은 악기를 연주하는 경우는 비교가 되어서 곤란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임동민,임동혁 형제가 같이 피아노를 친다고 들었던 때부터였습니다.
둘 다 국제 무대에 서는 피아니스트, 기량은 출중하겠지만 아무래도 똑 같이 선택되고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 아닐 때 어떤 한 사람이 받은 스트레스는 얼마나 대단할까,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왜 부모는
같은 악기를 선택하게 그대로 두었을까,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거든요.


한가족이 서로 다른 악기로 무대에 서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스스로는 악기에 대해서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던 차라 아이들이 미처 다 자라기도 전에
음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지만 영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 때의 실망감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아마 제가 조금 더 성숙한 엄마였더라면 그것은 내가 원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본인이 스스로 하고 싶어야
되는 것이란 점을 이해했으련만 그런 것을 알기엔 너무 어렸는지도 모르지요.

가끔 엄마로서 저지른 말도 되지 않는 폭력 (꼭 때리는 것만 폭력은 아니니까요 )을 생각하면 식은 땀이
납니다. 물론 지금 아이가 어려도 마찬가지 잘못을 하겠지만 그래도 정도는 덜 할까요?
지난 일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 그것이 아무 것도 개선해주는 것은 없으니 자책하지 말고 지금 안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하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자 마음 먹지만 그래도 가끔은 후회가 목까지 차오르는 경우가 있어요.
이상하게 오늘 연주를 보고 걸어서 집에 오는 길,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왜 그렇게 몰랐을까 그런
생각을 골돌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집에 와서 첼로 곡을 골라서 걸어놓고, 르동의 그림을 보다 보니, 그런 생각이 조금씩 가라앉고 ,그렇게
후회하고 조금씩 성장하고, 그런 것이 인생이 아닌가, 스스로를 다독이게 되기도 하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