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일요일 이틀간 로뎅에 관한 책을 한 권 읽었습니다.미술을 전공할 여학생과 읽어서 그런지
훨씬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는데요,같은 책이라도 누구와,그리고 어떤 관심을 갖고,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 사람과 읽는가에 따라서 같은 책도 얼마나 다른 독해가 가능한가 놀랄 때가 많습니다.
어린 시절 ,로뎅은 지나친 근시라서 제대로 읽고 쓰는 법을 배우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그로 인해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징집대상에서 빠졌다고 하는데요
그가 일하던 공방에서 오전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혼자 작업을 하다보니 저절로 자신만의 방식대로
작업을 하게 되고 그것이 주문받은대로 일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려 그를 고용한 사람 입장에서는
거추장스러운 고용인이 되어버렸다고요.
그래서 그는 새로운 고용주를 따라서 벨기에에 살게 되었다고 하네요.
그 당시 그린 풍경화를 한 점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벨기에에 사는 동안 그는 산책에 재미를 붙였고 동네 산책 수준을 넘어서 때로는 걷고
때로는기차를 타고 이탈리아까지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직접 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 때의 감격을 적은 글에서
마치 미켈란젤로를 자신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고요.

그는 미켈란젤로를 보고 대리석을 매끄럽게 다듬는 작업뿐만이 아니라 거칠거칠한 질감을 그대로 남겨두는
것에도 눈을 떴다고 합니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가는 미감을 보여주는 조각들,그의 조각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대리석이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되네요.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그런 점에서 그들은 창조자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겠지요?

그가 작업한 까미유 끌로델입니다.이 작품을 보고 있으려니 영화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영화에서 로뎅의 곁으로 가려는 딸에게 아버지가 충고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너의 독립성을 한 번 잃게 되면 되찾기 어렵노라고
그러나 사랑에 눈이 먼 끌로델에겐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않았겠지요?

신의 손이란 제목의 작품입니다.
삶의 중심에 강력한 존재가 있었던 시기와 그것이 파괴된 시기,그 이후에 그에 필적한 만한 강력한 존재의
상정이 불가능한 시대는 역시 작품을 만들거나 그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단지 예술에서만이 아니라 인생에서도 마찬가지일까,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아마 요즘 읽고 있는 현대철학에서 중심을 해체하고 주체를 해체하고 구조가 중심을 이루는 구조주의에 대해서
읽다보니 생각이 꼬리를 물고 그 쪽으로 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베르니니에서 로뎅,이렇게 앞으로 나가게 되다가 역시 미켈란젤로를 만나니
다시 그에 대해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나는군요.
그에 관해서 새로 쓴 전기가 나왔지만 또? 하고 손대지 않은 책이 대화도서관에 있는데
이상하게 이제 그만 하고 생각하고 있어도 미켈란젤로는 나를 잊지 말라는듯이 이 곳 저 곳에서 불쑥
나타나곤 하는 것이 신기하네요.
그것이 거장이 지닌 힘인 것일까요?
그러나 그에게 모델이자 정부이자 가정부 역할도 했던 로즈를 떠날 수 없던 로뎅이 결국 로즈를 선택하자
그 때서야 까미유 끌로델은 아버지가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절절히 깨닫게 되지요.
이런 뒤늦은 깨달음이 물론 까미유 끌로델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그녀가 앞으로 30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다가 죽게 되는 것을 보면서 마음 아프던 시간이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