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의 시험인 주간,역시 시험을 보는 중인 아들이 목요일 낮시간에 들어오자 마자
엄마 배고파를 연발하는 바람에 점심을 함께 먹고 설겆이를 깨끗하게 마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오후까지 몇 시간 남은 자유시간에 세상의 모든 음악을 틀어놓고 오전에 함께 공부한 렘브란트중에서
도판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그림들을 마저 보려고요.

파워 오브 아트의 저자는 이 그림을 놓고 설명을 하더군요.다른 사스키아의 초상화와는 달리
이 그림은 그녀가 죽은 후에 완성한 작품이라고,그래서일까,다른 초상화와는 다른 분위기가 풍기고 있다고요.
그림속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사스키아,그녀와 함께 한 세월이 렘브란트에 남긴 흔적을 그림으로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1630년대의 사스키아의 모습입니다.

꽃의 여신으로 분장한 사스키아입니다.이 때의 그녀는 앞으로 10년후 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겠지요?
이번 분기에 본 일본드라마중에서 사랑해,용서라는 처음엔 조금 이상한 제목이라고 생각한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동안 본 일본드라마중에서 가장 많이 울어서 힘이 들기도 했고 생명이란 무엇인가,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 드라마이기도 했는데요
집앞에서 울고 있는 초등학교 2학년 아이를 도와주려고 한 일이 결과적으로 그 아이를 죽이게 된 5학년아이
그 아이와 부모,그리고 피해자가 된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드라마였습니다.
대사중에서 그렇구나 마음을 두드리는 대목이 많아서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장면이 많았지요.
그 중에서도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있는 어린 아이가 상징하는 생명이 없다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제 마음을 절절하게 두드리는 것이 있었고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겉보기엔 별 일이 없어보여도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그들을 지원하는 정신적인 네트워크는
형성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사스키아는 연달아 아이를 잃고 결국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만 아픈 바람에 그 아이를 제대로
안아주고 돌보는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티투스인데 그 아이가 성장하도록 키우는 것은 내연의 관계를 맺게 되는 하녀
헨드리케입니다.
내연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부인 역할을 제대로 해냈고 몰락해가는 렘브란트를 제대로 돕는 역할을 한
그녀를 교회는 받아들이지 못하더군요.그녀는 치욕적인 판결을 받게 되는데 당사자의 기록이 없으니
그녀가 무엇을 느끼면서 어떻게 살아갔는가는 결국 추측으로만 존재하고 되고 맙니다.


티투스는 아버지의 붓끝에서 여러 점의 그림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를 키우기도 하고 (티투스) 렘브란트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아서 키우기도 한 헨드리케의 초상화입니다.

저자는 이 그림을 예로 들어서 렘브란트의 그림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설명하더군요.
이 그림속의 여성도 역시 헨드리케인데요,그가 사스키아를 그릴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한
것을 알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네요.

1634년작인데요,아르테미시아로 분한 사람은 역시 사스키아입니다.


사십년 세월에 걸친 두 장의 자화상,그 사이를 따라가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자화상,목요일 수업에서의 렘브란트 읽기는 끝났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아직 미진하다고 조금 더
공부해보자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