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아람누리에 갔을 때 우연히 발견한 책중에
청소년을 위한 동양미술사란 책이 있었습니다.
마침 세계사 특강을 하는 아이들에게 그 시대의 그 지역의
미술이나 건축을 보여주고 싶어서 빌렸는데요
도판이나 설명이 확 매력을 끄는 책은 아니었어도
그동안 읽은 중국사덕분에 오히려 제게 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오늘 중국편만 읽었는데 인도,일본,그리고 동남아시아까지
다루고 있어서 덕분에 낯선 세계와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즐거운 예감이 드네요.
오늘 책속에서 만난 다시 보고 싶은 화가,그의 그림을 조금
더 알고 싶은 화가중의 한 명이 바로 치바이스입니다.
메모해서 이름을 적어온 몇 화가중에서 처음 손이 가는
화가인데요 그의 이름을 영어로 알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찾을 수 있으련만 그것이 아쉽습니다.
중국의 피카소로 불렸다는 치바이스,그가 90세가 넘어서
그린 그림이라고 소개되어 있네요.
세기를 넘어서 산 화가가 보았을 인생의 다양한 드라마
그것들이 다 섞이고 녹아서 나온 필력이겠구나 싶고
그의 인생와 그림이 궁금해집니다.


찾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란 말이 생각나네요.
검색을 하니 그가 쓴 책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책 소개
작년에는 덕수궁 미술관에서 런보녠(任伯年)·우창숴(吳昌碩)·황빈훙(黃賓虹)·치바이스(齊白石)·쉬베이훙(徐悲鴻)의 회화 작품을 한데 모아 ‘중국 근현대 오대가(五大家) 회화 작품’전이 열렸고, 올 가을에는 한중 수묵화를 함께 감상하는 ‘리커란(李可染)·장우성(月田 張遇聖)’전이 열릴 예정이라고 합니다. 중국 회화라고 하면 소식(蘇軾)·조맹부(趙孟?)·동기창(董其昌)·황공망(黃公望)·석도(石濤)·팔대산인(八大山人) 등의 문인화에만 익숙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서예와 수묵화를 바탕으로 하되 근대 중국화의 진로를 모색하면서 서구의 새로운 경향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화가들이 속속 소개되고 있는 셈입니다. 그 중에서도 치바이스는 ‘생동감 있고 천진한 필묵 표현’으로 중국 회화의 전통을 계승한 최후의 근대 화가이기도 하고, 지난 세기의 중국 화단을 이끌어간 선구적 인물이기도 합니다. 리커란은 치바이스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선생은 진정 ‘가슴에 삼라만상을 품고’ ‘손끝으로 조화를 이루는’ 경지에 도달하신 분이다.”
화가 치바이스의 진솔한 인생 고백
개인의 인생 이야기가 한 편의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파란만장한 삶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생 고백이 갖춰야 할 미덕은 바로 솔직함일 것입니다. 자기방어와 허식을 겹겹이 둘러쓴 자서전은 이미 자서전으로서의 가치를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화가 치바이스 노인의 진솔한 인생 고백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늘그막에는 그래도 화가로서 자그마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겪어온 날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럼 먼저 내가 태어날 당시에 우리 집안 형편이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하찮은 소재에 단숨에 생명을 불어넣는 붓놀림
치바이스는 1864년 1월 1일(음력 1863년 11월 22일)에 “아이를 품에 안고 따뜻하게 재우는 일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일”이라시던 인자한 할아버지의 생일과 같은 날 태어났습니다. 이때는 서양 세력의 침략과 관리의 부패로 혼란스러운 청나라 말이었습니다. 치바이스는 후난 성(湖南省) 샹탄 현(湘潭縣)에서 태어났는데, 이곳은 마오쩌둥(毛澤東)의 고향으로도 유명한 중국의 아주 가난한 시골 마을입니다. 흉년이 들어 집안에 양식이 떨어지면 하도 오랫동안 쓰지 않은 아궁이에 빗물이 고였는데, 그러면 황당하게도 그곳에서 개구리가 살 정도로 집안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노화가는 쇠똥을 빚어 만든 땔감으로 밭에서 주워온 토란을 구워먹던 가난한 밥상을 잊지 못합니다. 할아버지가 평생 동안 알았던 글자 300자를 모두 배운 치바이스는 현명한 어머니 덕에 서당에 다니게 되고, 서당에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행복한 1년을 보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로써 그림에 몰두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늙은 어부, 소, 말, 돼지, 양, 닭, 오리, 물고기, 새우, 게, 개구리, 참새, 까치, 나비, 잠자리 같이 날마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것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는 언제나 “말을 하려면 남들이 알아듣는 말을 해야 하고, 그림을 그리려거든 사람들이 보았던 것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치바이스는 제도권에서 회화 수업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몸이 약해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목공일을 시작했다가, 타고난 예술적 감각과 꾸준한 노력으로 시?서?화를 익혀 생명감 넘치는 근대 문인화의 새로운 기풍을 만들어냈습니다. 생활의 가난은 화가로 하여금 한평생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게 만들었지만, 가난한 고향 마을에서 흔히 보는 소재들은 그의 그림들을 훨씬 친근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그가 사랑의 눈으로 보듬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림의 소재들, 즉 반찬거리에서 나팔꽃과 같이 흔해 빠진 들꽃이나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까지, 그 중에는 귀하고 천한 것이 따로 없습니다. 그에게는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이 전달하는 느낌을 중시하는 자유로움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한평생 그린 것은 자연과 평화 그리고 자유
바이스는 그림을 그릴 때나 시를 지을 때 언제나 꾸미는 것을 싫어하고 그 속의 정신을 중시했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화가들이 산 밖의 누대와 구름 밖의 산봉우리를 그대로 세심하게 따라서 그리는 것이나, 쩔쩔매며 도장을 잘 새기려고 애쓰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그림을 그리거나 실물을 그대로 따라 그리기 보다는, 언제나 화가의 가슴속에 간직한 감상으로 천하를 놀라게 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또한 그는 한평생 고개 숙여 무리를 이루거나 정치권에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저 두 손으로 그림이나 그리고 도장이나 새겨서 한평생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대만족이었습니다. 치바이스는 1956년 세계평화평의회(World Peace Council, 1950년에 81개국 대표가 모여 창립한 세계 평화운동 기관)에서 국제평화상을 수상했는데, 그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내 고향을 사랑하고, 내 조국의 풍요로운 산과 강 그리고 토지를 사랑하고,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므로, 한평생 평범한 중국인의 감정을 그림으로 그리고 시로 썼다.최근 몇 년 동안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끊임없이 추구한 것은 다름 아닌 평화였다는 것을.”
공명은 정해진 임자 없으니 허리 굽히는 자들을 평생 웃어주리라.
우리는 그의 인생 고백을 통해 독학과 여행, 죽는 날까지 계속된 작품 제작 등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완성한 화가의 모습뿐만 아니라, 자식들을 사랑하는 아버지, 아내를 사랑하는 지아비, 부모를 섬기는 효자, 스승과 친구의 은혜를 잊지 않는 참인간 그리고 아무리 고되고 힘들더라도 삶을 꾸려가기 위해 노력하는 생활인의 모습도 함께 엿볼 수 있습니다. 치바이스가 초상화를 그려 수입이 생기자, 날마다 글씨만 쓰려고 하는 손자가 걱정되어 “어디 솥에 글을 끓여 먹는다더냐”고 걱정하시던 할머니는 “이제 보니 정말 그림을 솥에 넣고 끓이는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뒤에도 치바이스는 그림에 직접 화제를 쓸 수 있게 되기까지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목수 출신이기에 고상한 화제는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림만 맡기고 화제는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화제를 쓰건 안 쓰건 받는 돈의 액수는 같았기에 치사한 처사를 참아야 했던 그가 처음으로 지은 시는 ‘모란을 부귀라고 부러워 마소. 배와 귤의 단맛에는 떨어진다오(莫·牡丹稱富貴, 却輸梨橘有餘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화려하게 꾸미거나 격식을 따지는 시보다 자연을 노래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시를 더 좋아했던 그는 진정 모란보다는 배와 귤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습니다.말년에 이르러 치바이스는 여러 번에 걸쳐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선언을 합니다. 부패하고 외세와 결탁한 관리들이 찾아와 그림을 사가려고 귀찮게 하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도적이 되기는 싫어. 장안에 굶어죽은 귀신 추하지 않다네’라며 물리치기도 하고, 조국이 수복되었으나 물가가 치솟아 정성들여 그린 그림의 값이 빵 한 조각도 사먹을 수 없는 수준이 되자 또 한 번 ‘잠시 주문을 받지 않음’이라는 종이를 내겁니다. 그러나 평생을 밭을 갈 듯 그림을 그렸던 노화가는 팔지만 않았을 뿐 하루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한국어판에서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그림과 1947년 이후의 작품을 추가하였습니다. 커다란 산수화보다는 규모가 작은 일상의 모습을 많이 그렸던 치바이스의 그림과 담백한 화제시도 함께 감상하면서 동양화의 담박한 운치를 이 책에서 한껏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인터파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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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저자 | 치바이스
치바이스 본명은 춘즈(純之)이고, 바이스(白石)는 호, 별호로 부평초 노인(萍翁), 차산음관의 주인(借山吟館主者), 삼백석인부옹(三百石印富翁) 등이 있습니다. 후난 성 샹탄 현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몸이 약해 농사일을 할 수 없어 조각을 배워 목공일을 하다가, 스승 후친위안(胡沁園)과 왕카이윈(王?運)을 만나 글공부를 하게 되고 그림에 대한 안목을 넓혔습니다. 1917년에 베이징에 정착하여 그림을 그리고 전각을 하며 시를 지었습니다. 1927년에 국립 베이징 예술전문학교 교수가 되었으며, 1949년에는 중앙미술학원 명예교수로 초빙되었습니다. 1953년에 중국미술가협회 주석으로 당선되었으며, 문화부로부터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습니다. 1963년에 세계평화평의회에서 선정하는 ‘세계 10대 문화 거장’이 되었습니다. [인터파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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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옮긴이의 글
일러두기
1장 가난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1863)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다
보배처럼 아껴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약한 아버지와 강인한 어머니
나의 이름, 치바이스
2장 글 깨우치고 학교에 다니다(1864~1870)
병치레로 보낸 유년기
할아버지와 아는 글자가 똑같아지다
외할아버지의 서당에 들어가다
그림에 빠져들다
가난은 떠날 줄 모르고
3장 나무 베고 소 키우다가 목수가 되다(1871~1877)
가난한 살림을 돕고자 목동이 되다
결혼과 할아버지의 죽음
수공 기술이라도 하나 배우기로
4장 조각공에서 화공으로(1878~1889)
저우 사부에게 소목장 일을 배우다
'개자원화전'을 발견하다
글은 사오판 선생께, 그림은 친위안 선생께
직업 화제를 붙이다
5장 시와 그림 그리고 전각으로 이름이 나다(1890~1901)
그림에 솥을 넣고 끓이다
시 모임에 들어 자연을 노래하다
돌 한 지게를 갈고 새기고
산을 빌려 집을 짓고 시도 짓고
6장 다섯 번의 여행(1902~1916)
강산의 도움을 얻고자 길을 떠나다
칠석날 난창에서 시를 짓던 추억
천하 제일, 구이린의 산수
친저우와 광저우를 유람하다
은사의 깊은 마음 잊을 수 없어
혈육과 지인을 잃는 슬픔
7장 베이징에서 살며(1917~1936)
계속되는 병란으로 고향을 떠나다
베이징에 정착하다
메이란팡과의 만남
일본 전시회와 가까운 이들의 죽음
부모님 돌아가시다
황시공의 은혜로 차산거에 머물다
제자 루이광의 죽음
대사의화, 시초 그리고 인보
눈에 띄게 늙어가다
8장 피난 시절(1937~1948)
나이를 바꾸다
아내 춘쥔이 죽다
'그림 팔지 않음'
조국이 수복되다
추천의 글
연보
[알라딘 제공]
여기까지 읽고 나니 그림을 검색해서 볼 것이 아니라
이 책을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이렇게 뜻하지 않게 만나는 화가가 무슨 이야기로
제 마음을 두드려서 흔들어놓을지 자못 기대가 되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