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피렌체의 연인이란 소설속에서 본 그림들을
다시 따라가면서 보던 중
바사리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 사람이 신에게 바치는 열정,미켈란젤로라서
월요일 아침,잠이 깨고 나니
제일 먼저 마음이 가는 일이
그가 젊은 (어린?) 시절
사람 몸의 구조에 관심이 가서 수도원 부속병원에서
시체 스케치를 간신히 허락받고
감사표시로 수도원의 수사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책형
조각상을 만들어주었다는 17세 나이의
그 나이의 조각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그 작품을
다시 만나고 싶은 일입니다.
가능한지는 찾아보아야 알겠지만
그 조각상을 다시 못 만난다 해도
찾아가는 과정중에서 무엇을 보게 될 지 모른다는 것이
인터넷 서핑으로 그림보는 일이니까요.
그 재미를 기대해도 좋겠지요?


역시 처음부터 기대가 충족되는 시간이네요.
자신을 조각가로 규정했겠지만
사실 그의 스케치를 보고 있으면 그가 회화에 전념했더라도
손색이 없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까?
그가 신화를 소재로 많은 작품 활동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과 만나게 될까 하는 아쉬움이 생기네요.


요즘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고 있는 어린 학생중에
대안학교를 다니다가 그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일반 학교로 전학을 한 6학년 남학생이 있어요.
그 아이를 만나면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조기교육,무엇이든 빠르게 많이 넣어주고 싶은
그런 교육이 과연 바람직한가에 대해서요.
다른 6학년에 비해선 늦게 시작한 영어
아직 쉬운 책으로 서서히 읽어가고 있지만
매번 만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아이의 실력도
놀랍고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감탄하면서 배우는 능력입니다.
아하 그렇구나,이것이 그렇게 되는 것이구나
이것은 왜 여기에 나오는 것인가요?
이런 질문할때의 생생한 관심이 살아있는 그런 아이를
만나는 것이 마치 보석을 발견하는 기분입니다.
어제는 헬렌 켈러 이야기를 함께 읽다가
the birthday of her soul이란 말이 나와서
함께 이야기했지요.
설리번을 만나고 서로 씨름하다가 결국
설리번을 받아들이게 되지요,헬렌이
그 소중한 만남이 그녀에겐 영혼의 생일이 되는 것인데
soul이 그런 뜻이구나 얼굴을 빛내면서 발음하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우리가 빨리 빨리를 외치다가
놓치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품이 1492년작이니 제가 찾는 것은 아니라해도
근접한 시기의 작품이로군요.
1492년하면 역사적으로는 콜럼버스가 스페인에서
동방으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시도한 해이기도 하지만
제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죽은 해로 기억되기도 합니다.
아마 미술사를 읽다가 두 연대가 겹치는 것에서
외워진 연대겠지만 그의 죽음으로 이탈리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해라서 기억에 남는 모양입니다.
로렌초의 조각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공부도 할 수 있었던
어린 미켈란젤로는 그 곳에서 만난 지식인들과의 교류덕분에
교양을 많이 쌓을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같은 십자가상의 책형을 그린다고 해도
화가마다 얼마나 다른 얼굴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겠지만요.
특히 이 스케치에선 그런 느낌이 더 두드러져서
다시 바라보게 되네요.

기회가 되면 꼭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 조각중의
한 점인데요
밀라노에 있네요.
노래를 틀어놓고 한 점 한 점 들여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