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호흡이 가쁘다.
'왜 이럴까?'
'............'
'아니! 세상에 내가 산전수전 공중전 다하면서 살았는데
까짓 계단 열 개를 못 올라가 숨이 꼴깍 막히다니...'
십여 일전의 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답답하고 들쉼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괜챦으려니하고 자전거를 끌고 서울숲까지 달렸는데
되돌아올 땐 정말 죽을 것만 같아 다리마다 그늘 아래서
쉬었다 달리기를 반복하며 겨우 돌아왔다.
'휴우~'
살을 맞대고 사는 아내에게도 말을 안한 채
일 주일이 지났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속보로 걷기를 한후 샤워를 마치고 앉으니
들쉼은 여전히 힘들어 앉아있기 조차 곤란하다.
열 일 제쳐놓고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를 받으니 '기흉'이란다.
氣胸~
폐에 구멍이 나서 바람이 가슴속으로 빠져나가 폐를 짓눌러대니
숨쉬기가 시원치 않은 건 당연하겠지...
들은 적이 있어 저으기 안심하고는 즉시 입원하고
이제서야 퇴원하여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누이에게서 한 통의 메일이 날아와있다.
여러 날이 지났건만 내 두 눈엔 이슬이 맺히도록 찡한 사연과 함께.
같은 고교동창인 다른 누이가 동창회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며
내게 전문을 보내주었다.
나 역시 비슷한 내용으로 재작년인가.. 블로그에 '부모님'이란
제목으로 올렸던 기억이 '옛날의 금잔디~'
직장인들의 바쁜 출근시간이 막 지났을 즈음,
꽃시장의 조화코너에서 탐스런 빨강, 노란색 장미 다발을 듬뿍 샀다.
화단처럼 꾸며놓은 화분속의 아기자기한 작은 꽃들이 너무 예뻐
이것까지 넉넉히 사고보니 가게 주인은
큼지막한 비닐 두 보따리를 내게 안겨준다.
약속시간에 늦을새라 총총히 지하철 계단을 밟았다.
그런데 바로 몇 미타 앞에 아버지가 혼자 걸어가고 계신것이 보였다.
오늘따라 왜 이리도 기운이 없어 보이시지?
반가운 마음에 몇 발짝 급히 뛰어놓다 갑자기 몸이 굳어져 멈춰서고 말았다.
"아! 그렇지. 지금 내겐 아버지가 안 계시지..."
걷잡을 수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양손에 짐을 들고있어 눈물을 닦기도 수월치 않은데,
누가 볼까봐 부끄럽기도 한데,
아무리 참으려해도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전철내에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구석진 곳에 벽을 향해 서 있었다.
어느 중년 남성이 내 팔을 툭 치더니 뒤 쪽에 좌석이 생겼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이 든 여자가 양손에 꽃을 잔뜩 들고 눈물을 흘리며 서 있는 낌새로 보아
가까운 사람의 묘소를 찾아가는 길임을 눈치채고 있음 즉 했다.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따스한 햇볕을 담뿍 받으시며 우리들을 맞으셨다.
빙긋이 웃으시며 위에서부터 차례로 우리들 이름을 부르시는 듯하다.
"아버지... ... ..."
맘속으로라도 더 이상 말이 안 나왔다. 아니 할 필요가 없었다.
아버지는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모조리 알고 계실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가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다 해도
가끔, 아주 가끔, 아버지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음을 알고 계시는지요?
살다가 가끔씩 아버지 모습을 뵙고 있음을 아시는지요?
가족끼리 드리는 추도예배는 나를 항상 울렸다.
그냥 줄줄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이 흐른다.
예전에 나 어렸을 적에 어른들은 울지 않는 줄 알았는데,
머리가 하나 둘 하얗게 변해가는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눈물을 흘린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항상 식기도를 빼놓지 않으신 것으로 보아
신앙속에 사신 것을 알고 있다.
왜정 말년에 전쟁물자를 공급한다며 교회 목사가 앞장서서
교회종까지 떼어서 바치는것을 보시곤
그들의 설교를 듣지 않겠다며 교회에 발길을 끊으셨다는 말을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 교회종을 헌납했던 그 목사의 동상이
삼일운동 민족대표의 공훈에도 불구하고 헐려버리고,
묘한 인연이라고나할까?
그 목사의 손자가 내 남편의 학교 후배이어서 이따금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그 후배가 전원주택을 짓고 동문가족들을 초대했을 때
주택 옆 언덕받이에 있는 그 목사의 묘소를 본 일이 있다.
한 사람의 종교일생을 바꾸어 놓은 이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그 후배야 알 리가 없겠지!
무심한 하늘을 올려다 봤다.
그 옛날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린 교회는 지금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
지날 때마다 올려다보곤 한다.
흰 드레스와 면사포의 신부, 연미복을 입은 신랑이 교회계단에서
찍은 결혼사진은 지금도 우리 형제들이 가끔 펼쳐본다.
"나 결혼할 때 아버지가 말야..."
언니가 말을 꺼냈다.
" '네가 앞으로 어느 정도의 경제수준으로 살게될지 모르겠지만
네 능력과 환경속에서 절반 정도만 누리고 살아라'고 하신 게
아직도 맘속에서 떠나질 않아.
그래서 우리나라에 가스렌지가 처음으로 보급되어 그 편리함에
써 본사람들이 누누히 권했지만
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이 대부분 사용했을때에야 구입했던 기억이 나."
"그래요? 나 결혼할때는 말야 언니, '빵을 구하는 일에 너무 급급하지 말라'
하셨어. 사람들이 너무 돈만 쫓다보면 더욱 소중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셨겠지.
그리고 상윤 아빠한테는 '높은 인격을 쌓기 전에 높은 직위를 탐하지 말라'
하시며 '많은 정치인들의 실정과 몰락을 보라' 하셨어.
그런데 난 내 아이들이 결혼할 때 좋은 말을 못해줬어.
그냥 '우리 가족이된 것을 환영한다' 고만 했지.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동생이 느닷없이 노래를 불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었다.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아버지 어머니 결혼 60주년,회혼식 때의 추억이 새롭다.
두 분께 노래를 부탁드렸을 때 손을 잡고 이 노래를 부르셨지.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메기같이 앉아서 놀던 곳."
아마도 젊은 날 두 분이 연애하던 시절을 회상하실게다.
우리 자식들이 모두 따라 불렀다.
"물레방아소리 들린다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
급기야 사위 며느리 손자 손녀들도 함께 부른다.
"동산 수풀은 우거지고 메기 머린 백발이 다 되었네.
옛날의 노래를 부르자 메기 내 사랑하는 메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