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시간에 나온 이야기중에서 제욱시스의 포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중권의 상상이란 글에서 저자가 인용한 것은
피디아스가 아름다운 미녀를 그릴 때 여러 사람을 두고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취해서 취합해서 그린다는
이야기를 통해서였는데 사실은 선별론이란 개념은 피디아스가
아니고 제욱시스의 선별론에서 나왔다는 것을 서두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지요.
오늘 아침에 찾아보니 플리니의 박물지에 실린 이야기가
번역되어 있네요.
당대의 최고화가가 누군가를 가리는 경쟁에서 포도로
새의 눈을 속인 제욱시스와 휘장으로 화가의 눈을 속인
파라시오스(발음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는
고대 그림을 설명하는 책에서는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단지 고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물화,혹은 인물화에서도 근대에 들어와 상당히
많은 화가들에 의해서 이런 주제가 그림속에서 변주로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이 설명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런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이란 것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겠지요?
어제 슬라이드로 본 도판에서는
15세기 채색 필사화가가 제욱시스와 크로토나의 처녀들이란
제목으로 그린 그림이 기억나고요(이 그림들은
화가의 선별론에 대한 예를 보여주는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포도이야기에 관한 것도 휘장으로 제욱시스를 눌렀던
파라시오스로 분한 자화상을 그린 그림도 보았습니다.
문제는 그런 도판을 웹하드에서 찾아서 보고 있지만
보람이의 설명으로는 엄마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 글에서 인용하도록 하기까지는 어려움이 따라서
못 할 것이라고 하네요.)
다른 하나는 프랑수와 앙드레 뱅상이 그린 제욱시스와
크로토나의 처녀들이 있습니다.
요한 하이스 멤미멩의 화가와 다섯 모델도 바로 이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네요.
선별론은 예술의 교사로서의 자연의 역할을 포기하지는 않지만
자연을 능가하는 완전한 아름다움에 이르는 것이 예술의
요체라는 생각이 바로 제욱시스에게서 비롯되었고
그와 같은 생각을 지닌 화가들,다른 생각을 지닌 화가들이
계속 완전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이것에
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그림의 역사는 진행되어 온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다시 글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한번 잘 못 디딘 발걸음이 계속 재생산되어 유포되는 과정에서
왜 아무도 글이 잘못 되었을 때 지적해서 바로 잡지 못하고
있는가,이름이 틀렸어도 그것이 무엇이 대수인가 하고
넘어가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라틴어 원전까지는 못 읽는다 해도 영어로 된 많은
기록을 통해서 이미 알려진 사실들을 검색없이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후대를 위해서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특강에서 만난 도판을 구할 수 없어서 공연히 다른
네덜란드 화가들의 정물화를 뒤적이면서 보고 있는 중입니다.


검색하다가 만난 처음보는 화가네요.BEERT라고 17세기초까지
활동했던 화가인 모양입니다.


이 두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그림인데요
아무래도 언젠가 시간을 들여서 네덜란드 정물화의
세계만 제대로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 것이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네요.